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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사랑으로... (히 12:4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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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 12장 4절 - 13절
제목 : 아버지의 사랑으로...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젊었을 때부터 이 질문을 품고 고민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일까? 그는 이 질문을 품고 수 년을 지내던 중, 그의 마음에 거듭거듭 확인되면서 스스로 깨달음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을 책으로 써서 발간했는데, 그 책이 1973년에 출간된 이후, 현대의 고전이라 일컫는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칼라, 그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느끼고 표현하는 정서, 그의 삶의 능력과 태도와 목적..이 모든 것은 내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저희 교회가 경건의 시간의 보조교재로 매일성경을 사용하고 있는데, 매일성경이 큐티교재로서의 장점 중의 하나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고 묻는 질문입니다.

새해 열흘 동안 큐티 잘 하셨습니까? 새해에는 큐티 꾸준히 잘 하셔서 하나님을 잘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는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을, 문맥의 흐름에서 보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또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였기 때문에/, 믿음에서 떨어지려는 시험 상태에서 비틀비틀거리고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목숨걸고서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고 적당히 세속과 타협하려고 하고 따라서 여러분들 마음이 쉽게 낙심하고 삶이 맥없이 살아가고 비틀비틀, 위태위태, 우왕좌왕, 허둥지둥, 빈둥빈둥, 귀차니즘...이렇게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징계하시고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고/ 피곤하고 지친 손을 일으켜서 믿음의 삶을 힘있게 똑바로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본문은 이런 멧세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의 징계입니까? 하늘에서 벼락맞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인가요? 오늘 본문에서 '징계'라는 단어는 8번이나 나옵니다. 징계, 영어로는 chastening이라고 하지요? 징계라는 말은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하다'는 말로써 죄나 잘못에 대한 처벌, 형벌의 뉘앙스가 강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에 대한 헬라어 의미는 죄에 대한 처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강건케 하시기 위한 연단, 훈련의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어떤 뉘앙스의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냐는 이런 면을 생각하면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처벌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죄에 대한 댓가로 형벌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한 형벌, 죄의 댓가는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심판자처럼 "잘못만 해봐라, 그냥 놔 두지 않을테니까.." 하는 식의 처벌은 없습니다. "너 한번 혼 좀 나봐라!!" 이런 부정적 동기로 처벌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징계"라고 번역된 단어도 징계보다는 "연단", "훈련"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바른 번역일 것같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부정적 뉘앙스를 피하기 위하여 공동번역에서는 "견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영어 NIV 성경에서는 "discipline"(훈련)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연단'이라는 말로 대표하여 사용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의 연단, 훈련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연단인지를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는 한 어구가 있습니다. <7절> 보십시오. 개역 한글판에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라고 번역되었으나, 이 말 참 이해하기 어렵지요? NIV에 보면, "고난을 연단으로 보아 견디십시오(Endure hardship as discipline)"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해가 잘 되십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훈련(discipline)입니까? hardship, 삶의 고난, 역경, 나를 몹시도 힘들게 하는 환경들, 사람들.. 이 하나님의 연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안고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내 삶의 길 가운데 나의 마음을 몹시도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고 무겁게 하고 지치게 하고 못살게 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영적인 실상은 하나님의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지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은 사실은 내게 주어진 여건, 내 주변의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여건, 내 주변의 사람을 내 마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나의 마음을 지옥의 구렁텅이처럼 만들기도 하고 꽃피는 동산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예)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이 "화"라는 책에서 화를 다스리는 비결로 제시한 것이 이것입니다.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주변의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입니다. 사람이 내 삶의 정황을, 내 자신을 어떤 기준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마음의 상태는 좌우됩니다.

<요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행해 주신 일이 그것이지요? 정죄의 시선으로 바라보아 원망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고통의 시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창조적으로 긍정적인 가치와 소망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신 것이지요.

내 삶의 환경, 내 주변의 사람들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마음눈이 중요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명확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마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육신의 눈이 어두우면 '밝은 안경점'에 가서 안경 하나씩 쓰면 되고 영혼의 눈이 어두우면, '빛과 소금의 교회'에 와서 예수님 믿는 정직한 도를 배워 보십시오. 선악과를 먹음으로 밝아진 욕망의 눈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생명의 눈이 밝아짐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삶의 고통, 고난.. 피상적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나의 삶은 나를 사랑하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향하여 사랑의 뜻이 계셔서 인도하시는 과정임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그 사랑 안에 서서, 오늘 나를 몹시도 아프게 하고 시달리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오늘의 삶의 정황,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강건하게 하시고 나를 더욱 정결하게 하시는 연단, 훈련의 과정임을 기억하십시오. 마음눈이 달라지면, 인생이 바뀝니다. 하나님을 인정할 때에 마음눈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연단하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왜 우리가 싫어하는, 원치 않는 고통의 환경 가운데 처하게 하십니까?

첫째는,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연단하십니다. 교회에도 보면, 얄밉게 구는 남의 자식들, 가끔 때려주고 싶은 때 있지요? 다른 사람도 당신의 자녀 때려주고 싶은 때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남의 아들 때릴 수 있습니까? 때렸다가는 큰 일 나지요? 그러나 그 얄밉게 놀아서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놈이 내 아들이라면, 가만히 놔 두지 않습니다. 부모이니까, 아들이니까 무관심하지 않고 징계를 줍니다. 왜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이해하기 쉬운 예로 히브리서 기자가 깨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9절> 보십시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육신의 아버지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징계, 연단하시고 우리도 그 징계를 받고도, 아픔과 고통을 받고도 아버지 원망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도리어 공경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느끼기에 고통스럽고 힘들고 몹시도 아프지만, 우리를 연단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반항하지 않고 복종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 아닙니까? 깨우쳐 주는 것이지요.

예) 군대에서의 이야기.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래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 마음 상하지 않도록, 싫어하는 것같으면 이야기 안하고 이것이 사랑입니까? 아니지요?  미움의 반대는 사랑이지요? 그러면 사랑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냥 자기체면 살리고 자기도 힘들지 않고 괜히 간섭했다가 욕만 얻어먹기 쉬우니까, 적당히 몇 마디 하고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하고 싶은대로 그대로 놔 둡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냥 당신 하고 싶은대로 놔 두지 않습니다. 간섭하십니다. 연단하십니다. 아프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남이라면, 그냥 놔 두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다릅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가만히 놔 두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당신이 쉬운 길만 가도록 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 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삶에 hardship, 힘든 것들로서 연단하십니다. 특별히 나에게는 왜 이렇게 고난이 많을까 생각된다면,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으로 당신을 연단하시는 이유, 둘째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연단하십니다<10절>.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우스운 질문 같은데,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십니까? 목적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 자체가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가만히 놔 두시지 않고 때로는 고난과 아픔으로 연단하시는 뜻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무고히 고난의 과정을 통과했던 다윗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13년동안이나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죽을 고생을 했던 다윗,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하고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시119:67,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 고난이 없었더라면, 제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많은 고난을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이 고백 드리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나온 삶의 고난의 과정에 대하여 어떻게 기억하고 계십니까? 지금도 그 놈 때려주고 싶고 시간표 되돌리고 싶고...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혹시 그렇게 생각되십니까? 인간 본성으로는 이렇게 생각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삶의 피상을 넘어서 하나님의 손길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다윗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도 사랑하십니다. 당신이 세상에 집착한 욕망의 누더기를 벗도록, 껍데기를 벗고 참 자유를 누리도록 고난의 연단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녀들의 최선을 위하여 도우시고 간섭하시는 사랑입니다.

사람에게는 고난을 거쳐야만 정결해지는 마음의 영역이 있고 고난을 통해서만 강건해지는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억울한 일이 더욱 많고 내 삶이 누구보다도 더 힘들고 어렵고 아프다면, 그 아픔과 고난이 내게 던져주는 멧세지,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더욱 사랑하시는구나 이 멧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강건하게, 더욱 정결하게 만들어가시는구나 이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의 믿음의 삶의 추구가 몹시도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이 과정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끔찍이 사랑하셔서 당신을 정금같이 나오게 하도록 아버지의 사랑으로 당신을 연단하는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배반하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잘 견디십시오.

오늘 삶의 차가움, 몹시도 고통스럽게 하는 현실은 하나님의 연단임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중심의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더욱 잘 따르십시오.

여러분들은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처럼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든 환경이라 할지라도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운 것인 아니지 않습니까? 피흘리기까지, 세상을 거슬러 예수님을 따라갔던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당하는 어려움이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삶의 어려움들 때문, 낙심하거나 뒤로 물러나지 말고 어떻게 하라구요? 하나님의 연단임을 바라보시고 그 연단 뒤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기억하시고

1. 죄와 싸우는 당신의 믿음의 삶을 피흘리기까지 추구하십시오. 피를 흘릴지언정 죄와 타협하지는 마십시오. 피흘려 죽을지언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정신은 반듯하게 힘있게 추구하십시오.

2. 주저앉아 있지 말고 뒤로 물러나지 말고 곧은 길을 만드십시오. 예수님 믿고 따르는 곧은 길을 만드십시오. 이 멧세지를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교회는 예수님 믿고 따르는 신앙의 곧은 길을 만들기를 기도하며 추구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갈급함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고자 사람들이 교회는 찾지 않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하여 영적충만을, 인생혁명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근래에 우리나라가 사회문제에서 큰 관심사 중의 하나가 과연 2003년도의 대한민국의 이혼율이 과연 세계 최고를 기록할 것인가입니다. 2002년에 46.7%로서 미국에 이어 세계 12위였는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만큼이나 빠르게 증가하는 이혼율로 보아서 2003년에는 50%를 훌쩍 넘어 세계신기록을 기록할 전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의 대표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3.1운동 때에는 국민의 1%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이 독립선언에 서명한 33명 중 절반이 넘는 17명이나 배출하였는데, 지금은 20%에 달한다는 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전례없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이 혼란스러운 영적인 현실 앞에서도 다수의 교회들이 여전히 산길을 헤매고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심리에 잘 맞게, 구미에 맞추어서 한번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고 계속 잘 나오게 할까 이것에 지나치게 매여 있습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영적인 현실이 된 첫 번째 이유는 복음에 정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교회에 다니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는 도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냥 일요일 예배만 열심히 다니면, 잘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교회의 기초가 복음에 있음에도 복음이 증거되고 가르쳐지지 않음이 유감스럽게도 다수 교회의 현실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의 왜곡, 복음의 주 멧세지인 회개는 사람들이 듣기 싫으니 쏙 빠지고,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주되심은 명확히 증거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이 무엇인지 아셨습니까? 저희 교회에서 신앙훈련 입문과정을 배우면서 여러분 마음 안에 "예수님 믿는 것이 이것이구나" 깨달음이 있었습니까?

내 안에 아직도 예수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면, 다시 공부하십시오. 체면 때문에 그냥 아는 척 하지 마시고 다시 확인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는 정말로 예수님이 주님이십니까?

구약 호세아 선지자 시대에, 사람들이 바알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오늘 그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입술로 부르고 찾지만, 그 마음에 찾는 하나님은 풍요의 신, 바알신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가 곧은 길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 믿고 따르는, 신앙의 정도를 닦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 믿음의 삶을 드려왔던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처럼, 저희도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정도를 만들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의 복음을 명확히 증거함으로써, 모든 신자가 성직이고 제사장인 그 가운데 목사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바른 모습을 실천해 감으로써, 나의 마음과 일상적인 삶을 함께 나누며 함께 의뢰하며 그 가운데 예배당의 모임은 예수님의 도를 배우고 따르는 장으로서의 바른 신앙생활을 누려감으로써, 그리고 가난한 자나 부자나 차별이 없이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세상과 맘몬의 신을 이겨가는 모습으로써 곧은 길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 곧은 길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의 뒤이어 나아오는 후배들, 후손들이 어그러지 않고 바로 고침을 받으며 똑바로 정진해 가도록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산에 터널을 뚫어 새길을 내듯이, 처음 터널을 뚫고 새길을 내는 사람은 많은 수고를 감당하겠지만, 그러나 이후의 많은 사람들이 큰 혜택을 누립니다.

이 예수님믿고 따르는 신앙의 곧은 길을 만들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hardship으로 연단하십니다. 좋은 소망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강건하도록, 정결하도록 연단하십니다.

적당히 믿으면 핍박이 없습니다.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세상이 주는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무관한 외인이나 사생자나 고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안고 따르는 우리들의 믿음의 삶의 길을, 하나님께서 쉽게 만들지 않으시고 고난으로 강건케 하시고 고통으로 정결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삶의 고난은 불평하고 원망할 사안이 아니라 도리어 눈물로 감사하며 도피할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일어서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거쳐온 연단의 시간들, 오늘도 직면하는 어려움들 앞에 우리는 마음으로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조금 어렵다고, 조금 힘들다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 세상의 안일에 머무르지 말고 도리어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고 예수님 믿고 따르는 신앙인의 곧은 길을 만들어 보십시오. 당신 자신 뿐만이 아니라 당신을 본받고 따르는 이후의 사람들을 위하여 다시 일어나셔서 곧은 길을 힘차게 만드십시오." 이 초청에 당신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으로 연단하시는 은혜앞에 "주님, 많은 고난으로 저희를 더욱 정결하게 해 주십시오. 강건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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