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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고 가는 새해 / 요 4: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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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믿고 가는 새해
성경본문 : 요한복음 4:46-54

어느 평화로운 동네에 큰 술집이 하나 생겼습니다. 술집 옆에는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고민에 빠졌습니다. 술집이 얼마나 붐비는지 특히 주말과 주일에는 너무나 많은 술 취한 사람들이 추태를 부리기 때문에 교인들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철야기도 때마다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 술집이 불타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동네에서도 저 술집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이 없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기도했는데 얼마 후 정말 불이 나서 술집이 불타버렸습니다. 그런데 술집 주인이 교회가 기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소를 했습니다.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을 합니다. “교인들이 불타기를 기도했기 때문에 화재가 났고 그래서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측에서도 이렇게 변명합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도때문에 불이 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린 책임이 없습니다.” 판사가 듣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술집 주인은 기도응답을 믿고 있는데 교인들은 기도응답을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보니 술집 주인의 믿음이 더 훌륭합니다.”

  간청하는 아버지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지도 않고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왕의 신하라는 이 사람을 주목해 보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고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병으로 죽어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내려오소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지금 예수님은 가나에 계십니다. 그런데 이 왕의 신하는 가버나움에 삽니다. 갈릴리 근방에 있는 지역인데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에 있는 도시이고, 가나는 하룻길쯤 떨어져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집에 예수를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주여, 우리 집에 내려오소서! 내 아들이 죽어갑니다.”

  그때 주님은 냉담합니다. “너희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는도다. 너희들은 아들이 꼭 나아야 믿는 자들이다. 너희들은 보고 믿는 자들이다.” 주님은 냉담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다시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때문에 체면, 지위, 명예, 자존심도 다 포기하고 예수님께 엎드려 아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병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결코 예수님께 올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사람이 아닙니다. 땅위의 아버지가 다 그렇습니다. 아들 때문이라면 무릎도 꿇을 수 있는 것이 부성입니다. 병으로 죽어가는 아들 때문에 이 아버지는 체면을 불구하고 우리 주님 앞에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역사 속의 복음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재난, 고통, 질병, 실패 때문에 예수님께로 손들고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 나갈 때, 돈 벌고 건강할 때, 모든 일이 형통할 때는 예수님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재난, 내가 어쩔 수 없이 동서남북의 길이 막힌 그 상황에서 예수님 앞에 손들고 오는 죄인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고통, 슬픔, 아픔을 통해서 자기 앞으로 이끌어 오시는 섭리가 있습니다. 이 아버지도 예수 앞에 감히 나아오는 것은 아들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니면 예수와 무관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이 한사람이 오늘 예수님 앞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실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막연하게 온 사람이 아닙니다. 내 아들의 병은 예수님이라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47절에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소문에 의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적도 없습니다. 자기 아들이 치유된 것도 아닙니다. 소문만 듣고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는 ‘그렇다. 이 예수님께 해답이 있다’고 예수님께 찾아간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간청을 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믿음

  이 사실에서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소문에 의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전도에 의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소문을 퍼트리는 전도를 해야 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예수님의 소문을 알리는 전도는 교회가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의 소문 때문에 믿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로 나오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의 소문을 듣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말도 안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목수의 아들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소문을 이렇게 일축해 버렸다면 이 사람에게는 믿음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소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전도에 의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나와 가버나움은 공간적으로 거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경험해 보지 못한 소문에 의해서 주님을 찾아간 것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합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위험합니다. 믿고 경험해야 합니다. 경험하고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불완전합니다. 믿음 위에 경험이 있어야지 경험 위에 믿음이 있으면 불완전한 것입니다. 아이는 낳아 보아야 아이가 아닙니다. 태중에 있을 때도 완전한 한 생명으로 믿고 낳아야 합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보야 지가 아닙니다. 천국은 믿고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조급합니다. 아들이 죽어갑니다. “주여, 내 아들이 죽기 전에 내려오십시오.” 이 아버지는 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느긋합니다. 이럴 때는 주님이 참 얄밉습니다. 또 주님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주님이 잘 가십니다. 이 경우는 또 안 가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이 행동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떻게 하시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에디슨에게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 위대한 위인의 말을 한마디 들려주기 위해서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이제 저 멀리 공부를 하러 가는데 도움되는 충고를 한마디 해 주십시오.” 에디슨은 “시계를 보지 말고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즉, 느긋하게 지름길로 공부하려 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느긋하고 끈기있게 공부하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시계를 보지 말고 사십시오. 요즘은 시계홍수입니다. 건물마다 시계가 다 있습니다. 핸드폰도 시계가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시계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계는 왜 봅니까? 목사님, 설교끝날 때가 다 되었다는 신호입니까? 특히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할 때 시계보지 마십시오. 아무리 급해도 시계를 보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해야지, 상대방이 이야기하는데 자꾸 시계를 보면 당신은 별 볼일 없으니 빨리 끝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시계를 보시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호와 그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분의 시간에 맞추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급하지만 죽어 가는 아들을 둔 그 아버지만큼 급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느긋하십니다. 하나님은 지름길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애굽의 북단에서 유대 남단까지는 보름만에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보름만에 단체이동도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길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지 않고, 멀쩡한 바다를 갈라서,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서, 광야를 지나서, 40년만에 가나안에 입성하도록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왜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는대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합니다. ‘주여, 왜 보름이면 갈 길을 두고 왜 이리로 인도하십니까?’ 라고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름길로 일하지 않습니다.

  대가를 치러야

  우리 성전건축도 우리가 치를 대가를 다 치르게 하시면서 하나님은 성전을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공짜 생각을 바라지 마십시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성전은 지어질 것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값을 요구합니다. 새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드리기에 손색이 없는 새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이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도 주는 것이고, 기도도 하라는 것입니다. 보름만에 들어갈 그 길을 왜 40년 동안 이끌어 가시는가? 그분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급해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걸하는 그 한 아버지를 앞에 두고 주님은 어떻게 대합니까? 주님이 응답하지 않을 때, 주님이 머뭇거릴 때, 우리가 그 고비를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이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못 낳는 설움에 너무 슬퍼서 성전에 나아가 기도를 했습니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더라”고 사무엘상 1장 13절에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엘리 제사장이 보고는 술이 취한 줄로 오해를 했습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토한 것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네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 후에 한나는 기도응답을 믿고 얼굴에 근심이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기도했고, 그 응답을 기대했고, 바랐고, 기도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축복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믿음의 고비입니다.

  왕의 신하를 보십시오. 이 신하는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이 먼저 자기 말을 들어주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한번 와 주십시오. 내 아들이 죽어갑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강요하고 있는 이 신하에게 주님은 “아니다. 네가 먼저 행동하라”고 명령을 주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도다.” 아주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입니다. 애걸복걸하며 한번 집에 와 주시기를 바라는 그 아버지 앞에 주님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명령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도다.” 그 때 왕의 신하는 “주여, 무슨 그런 무책임한 말씀을 하십니까? 제발 한번만 와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믿고 가는 아버지

  50절에 보면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는 이 사람을 주목하십시오. 2004년도에 우리 모습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가는 이 사람의 모습과 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사람은 주님께 올 때 왕의 신하로 왔습니다. 병든 아들을 둔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가는, 주님의 제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2004년도 우리는 믿고 가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고 가는 것은 미련한 것 같지만 거기에 정답이 있습니다. 믿고 가는 것은 최상의 지혜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누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12살 된 딸이 죽어 가는 그 안타까움을 안고 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12살 된 딸이 죽어 가는 그 애타는 아버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살려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경우에 그대로 야이로의 집에 가십니다. 예수님의 기분을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가는데 회당장 야이로의 하인들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사오니 선생을 더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끝나버렸습니다. 우리 같으면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너무도 놀랐습니다. 누가복음 8장 49절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죽었다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너의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야이로가 제일 힘든 순간이 이 순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기서부터 시작하십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자기 집을 향하여 걸어가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 야이로의 믿음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야이로의 가정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볼 때는 다 끝났지만 주님은 그 때부터 시작하십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야이로는 그것을 감당했습니다.

  맺는 말

  믿지 못하면 기적과 표적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돈 벌고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믿음은 돈이 없어지면 없어지는 믿음입니다. 성공하고 믿겠다고 결심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실패하면 믿음도 잃어버립니다. 믿음의 바탕 위에서 돈 버십시오. 그래야 주님을 위해 그 돈을 쓸 수 있습니다. 믿고 출세하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의 신앙의 수준은 언제나 보고 믿으려 하고, 가지고 믿으려 하고, 얻고 믿으려 하는 이런 순서를 우리 스스로 뒤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나았도다.” “그 사람이 주의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나은지라” 이것이 2004년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전은 지어질 것을 믿고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름길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금년에 우리가 믿고 가는 이 사람을 주목하십시오. 이 사람은 왕의 신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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