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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실한 사랑, 참사랑 / 막 14: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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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한 사랑, 참사랑

본문: 마가복음14: 1-9

개를 키우다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습니다. 처음에는 귀여워서 다섯 마리를 모두 키웠지만 차차 커지니까 처리가 곤란해져 결국 개 보호소에 모두 갖다 주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미국 친구 하나가 우리의 처사를 보고 정말 화를 내를 것이었습니다. "귀여운 새끼 때만 이용하고 이젠 버리느냐"하는 논조였습니다. 이 친구의 말에 무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교훈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애완용이란 말을 흔히 붙이지만, 애완용은 바꾸어 말하면 자기 본위적인 애완물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짐승의 경우는 이 말이 통하지만 만일 상대가 인간인 경우는 모독적인 말이 됩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백인들이 우리 흑인을 가끔 '착한 검둥이들'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애완물처럼 보는 감정에서 하는 말이죠." "나는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흔히 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 과연 몇 퍼센트가 어린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으로 존중하며 말하는 것일까요?
애완물을 좋아하듯 어린이를 귀여워한다면 그것은 참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하나는 양녀를 들였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우면 귀엽기도 하고 위로도 되고 집안이 적막하지 않으리라는 자기 위주의 생각으로 양녀를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애완용으로 짐승을 키우다가 커지니까 싫어지는 따위와 별 차이가 없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애완은 사랑이 아니라 모욕이 될 수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돈 푼 좀 뿌리고 애완의 선심을 파는 아니꼬운 풍경을 수없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어렸을 때 병아리를 무척 좋아해서 꼭 껴안고 얼굴에 부비고 놀았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나는 병아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항의했을 때, 어머니는 "만일 네가 병아리를 정말 사랑한다면 너는 그것을 놓아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소유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행할 때에도 자기가 사랑을 베푼다는 의식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다면 그것도 이미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투명하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에게 베풀고 봉사하는 것이 과연 진실한 사랑에서 나온 것인가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다"(고후8:8)
본문에 보면 유월절 이틀 전에 주님께서 한센씨 병 환자였던 시몬과 나사로 삼남매가 살고 있던 베다니 동네에 들어섰습니다. 그 때 서로 앞을 다투어 주님을 접대함을 보는데 이는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식사대접의 기회는 시몬이 먼저 맡게 되었고 마리아는 차선책으로 향유가 든 옥합을 갖고 와서 주님께 부어 드리게 됐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릴 때 약삭빠른 제자가 그 일을 허비하는 일이라며 챙기고 나서는데 이를 보면 딱하다 못해 비정함을 느끼게 됩니다.
모든 판단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두고 도리어 좋은 일을 했다며 칭찬하셨고 장사를 미리 준비하는 일이라며 온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해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어찌해 그 값진 향유를 서슴없이 주님께 부어드렸고 주님은 왜 그 일을 칭찬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 대답은 한가지,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이란 말을 자기들의 전유물인양 즐겨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고린도전서 13장이나 들먹이고 그 실천 여부를 물으면 자기와는 상관없는 듯 얼굴을 가리기 일쑤입니다. 그럼 진실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첫째, 사랑은 아까워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리면서 추호의 아까운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아까워하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입증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누구든지 사랑 여부를 알기 원한다면 그것에 대해 아까워하는 마음이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면 됩니다.
둘째, 사랑은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릴 때 무슨 칭찬을 바랐거나 어떤 상급이나 보수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동이 이토록 순수했고 아무런 조건을 바라지 않은 것이었기에 기쁘게 받으셨고 칭찬과 함께 기념토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대속 제물 되심도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저 주신 은혜였음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와 주님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 참사랑이 아닌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셋째, 사랑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입니다. 당시 여인이 남자들 앞에서 머리를 푼다는 것은 창기나 하는 지극히 부끄러운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님과 제자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른 채 머리를 풀어 주님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젖먹이 어린아이를 가진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젖을 먹입니다. 사랑이 부끄러움을 덮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위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온갖 수치를 당하셨으니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복음전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롬1:16)
이와 같이 베다니 마을의 연약한 여인 마리아가 가르쳐 주는 사랑의 교훈이 참으로 귀합니다. 그가 그렇게 했다는 것은 우리도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이제 말이나 이론만이 아닌 참사랑을 마리아처럼 내놓음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시다.
진실한 사랑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첫째, 진실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고전13:5)
어느 마을에 어린 두 형제가 동네 친구아이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동네 아이가 실족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변명할 여지도 없이 두 형제는 살인 누명을 쓰고 관가에 끌려가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두 형제는 서로 자기가 그랬다고 말하므로 흑백을 가려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그 어머니를 불러 누가 그런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두 아이의 어머니는 대답하기를, "작은 아이가 그런 것 같다." 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관장은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모친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이, "큰 아이는 전실의 아들이온대 장손이므로 죽으면 절손이 되겠고, 작은 아이는 내가 낳은 자식이온대 만약에 죄를 받아 죽게 된다면 또 낳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 관장은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살인할만한 사람이 나올 까닭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무죄를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진실한 사랑은 불우한 이웃을 돌보고 사랑합니다.
인형을 좋아하는 제인이라는 소녀의 집에 아저씨 한 분이 놀러 오셨습니다. 소녀는 여러 가지 인형들을 내보이며 아저씨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갑자기 아저씨가 묻기를 "제인아! 너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라고 묻자 소녀는 깊은 침묵을 삼켰습니다. 잠시 후 소녀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아저씨, 제가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드리겠어요. 그러나 그 인형을 보여드릴 때 절대로 웃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여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약속하자, 소녀는 방안에 들어가더니 코는 주저앉고 팔 다리는 떨어져 나가고 옷은 다 헤어진 낡은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아저씨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알겠다. 그러나 한 가지 물어도 괜찮을까? 왜 무엇 때문에 제인은 그 인형을 좋아하지?" 제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 소녀 제인의 대답이야말로 아가페적 사랑의 심장을 보여줍니다. 여리고 길에 쓰러진 사람을 향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을 목마르게 요구하는 소위 사랑 받을 자격조차 없는 여리고 길의 쓰러진 이웃들, 그들이 예수님의 친구 그리고 우리들의 친구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14:31)
셋째, 진실한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아8:6)
전쟁 중 우리나라에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한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만 그 집을 다 가지 못하고 길에서 진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아기를 분만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는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습니다. 해산 직후 추위에 어머니는 그만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어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휘발유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부대로 연락을 취해 놓고 차에서 내려 그 부근을 거닐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아기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란 그 군인은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 군인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얼어죽어 있었고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갓난아기가 몹시 울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함인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군인은 그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잘 키웠습니다. 그 아들은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라 성인이 되었습니다. 늘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하던 그 아들은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무덤을 찾아 한국에까지 나왔습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서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넷째, 진실한 사랑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스승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때문에 제자들은 하염없이 슬펐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프란체스코가 물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슬퍼하느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섭섭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너는 내가 얼마를 더 살았으면 좋겠느냐?” 그러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사신 것만큼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욕심이다.” 프란체스코가 다른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내가 얼마나 더 살았으면 좋겠느냐?” “일 년만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프란체스코가 다시 옆에 있는 제자에게 똑같이 물었습니다. “너는?” “하루만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끝으로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내가 얼마나 더 살았으면 좋겠느나?” “한 시간만 더 사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프란체스코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 한 시간에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그 시간이 허락된다면 선생님과 함께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한번 더 경건하게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빌2:2)
다섯째, 진실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큰 소리로 떠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해 주신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서, 더구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또에프스끼의 작품인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 있는 것인데, 한 귀부인이 교회의 장로님에게로 와서 이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장로님, 나는 전 세계의 문둥병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서 한 사람 한사람의 상처에 입맞출 정도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밤중 내가 잠자려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계속 울어대는 갓난아이가 있으면 나는 그 갓난아이를 목잘라 죽이고만 싶습니다. 나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 (요일4:20)
여섯째, 진실한 사랑은 허물을 가리워 줍니다.
아라비아의 한 나그네가 사막에서 맑은 샘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 맑고 향기로운 물을 임금님께 바치려고 가죽주머니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궁전에 도착했을 때는 물이 썩어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임금님은 나그네의 정성을 생각해 썩은 물을 혀끝에 대며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맛보고 있는 것은 물이 아니라 너의 사랑과 충성이다. 네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 「사랑」이란 겉으로 나타나는 형태가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이란 동기가 순수한 사랑을 뜻합니다.「조작된 의도」가 첨가된 사랑은 향기를 잃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10:12)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
일곱째, 진실한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자가 군대에 가게 되었고, 급기야,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위험한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곧 사랑하는 여자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싸우던 남자는 부상을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폭탄의 파편을 맞아, 양팔을 절단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그녀를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전사했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행여나 여자의 눈에 뛸까 숨어살았습니다. 얼마 후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녀가 행복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몇 년이 흐른 뒤 남자는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려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담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니 그녀는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던 남자를 생각하며 월남전에서 양팔과 양다리를 잃은 남자를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여덟째, 진실한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영국의 성자로 알려진 죠셉 스크라이브는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해변에서 만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처녀는 병에 걸려서 몸이 허약한 나머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일로 말미암아 사랑한 사람을 잃었다는 마음의 상처를 달랠 길이 없어서 스크라이브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그의 아픔을 잊을 수가 없었고 가슴의 상처는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행하던 어느 날 스크라이브는 교회 앞에서 다 헤어진 옷을 입고 몸에 상처가 난 체로 구걸을 하고 있는 거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 거지는 상처를 입었을 뿐만이 아니라 기진한 상태로 자기를 향해서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손을 들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크라이브는 자기 가슴에 있는 첫 사랑을 잃은 아픔 때문에 그 거지의 호소를 그만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그 마음 속에 주님의 음성이 그의 마음속에 들려 왔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피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었느냐? 네가 그처럼 한 여인에게 주고 싶었던 그 사랑, 그 여인 한 사람에게 주고 싶었던 그 사랑을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어떻겠느냐?"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스크라이브는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집 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는 병들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그 마음 속에 떠오르는 시상을 기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 고통...병든 어머니의 가여운 모습.... 나의 생애 동안 만나는 근심 걱정 모두를 주님게 맡겨 버리라는 격려가 그로 하여금 주옥같은 찬송가를 탄생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487장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아홉째, 진실한 사랑은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눅6:35)
1960년대에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수직을 받게 된 짐 엘리옷은, 어느 날 남미의 에콰도르의 아우카 족이 너무나 흉포하여 아무도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해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글을 접하고 큰 감동이 왔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아우카 족에게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들어간 후 몇 달간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마침내 그를 찾기 위한 수색대가 편성되었고, 그들이 그곳을 수색한 결과 그는 참혹하게 찢겨져 죽어있었으며, 그의 유품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루크라는 잡지에 보도되어 온 세계를 경악케 했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짐 엘리옷의 젊은 아내가 곧 바로 간호사 훈련을 받고 1년 후 아우카 족에게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목숨 걸고 전도하다가 순교한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우카 족은 남자는 죽이지만, 여자는 연약하므로 여자를 죽이는 자는 비겁한 자로 낙인찍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사실도 모르고 죽을 각오를 하고 그곳에 들어가 5년 동안 살면서 그들에게 정성을 다해 사랑을 베풀고 간호사로 헌신했습니다. 그녀가 안식년이 되어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작별을 고했을 때, 추장이 온 부족들을 모아놓고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늘 앞장서서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사실은 5년 전에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다가 죽임을 당한 그 사람이 바로 나의 남편입니다. 나와 내 남편이 섬기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저도 살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 받은 아우카 족은 그 자리에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다고 합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들을 돌보았던 한 여인의 헌신으로 인해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열 번째, 진실한 사랑은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요일3:16)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인이 다섯 살과 세 살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기 때문에 안고, 업고, 공장으로 출근하여 공장 안에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부인은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두 아이들이 엄마 몰래 철길로 나왔습니다. 철길에서 조약돌 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고 있을 때 기차가 달려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애들이 없다는 소리에 엄마가 뛰어나가 보니 철길에서 놀고 있고 있었습니다. 쏜살같이 달려가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 낸 순간 기차가 뛰어들어 엄마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두 형제는 고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어른이 된 후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라고.
그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몇 백 원을 받으며 일했던 그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던 그것이 아닙니다. 그 기찻길에서 놀고 있던 두 아이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찬송 작사자 하버겔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라고 읊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요15:13)
이밖에 진실하고 참된 사랑은 ① 오래 참습니다.(고전13:4) ② 온유하고 죄를 덮어줍니다.(벧전4:8) ③ 성내지 않습니다. ④ 교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아니합니다.(고전13:4) ⑤ 거짓이 없습니다(롬12:9) ⑥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합니다.(고전13:5) ⑦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13:6) ⑧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딥니다.(고전13:7) ⑨ 덕을 세워주고(고전8:1), 수고합니다.(살전1:3) ⑩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요일4:18)
하나님을 모르는 현대인들은 이기적이고 조건적이고, 변하기 쉽고, 편애하고, 감정적인 거짓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그것만이 진실한 사랑인 줄 알고 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 줄을 바로 알고 하나님과 자신, 가족과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므로 사랑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항상 주는 우리를 사랑하시건만 그 사랑을 멀리하고 오해하고 불신하고 배반하면서 나 자신도 괴로움을 당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산 이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참 사랑의 의미를 알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며 창조적인 사랑을 할 수 있고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은혜와 능력을 더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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