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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올바르고 확고한 인생관 /롬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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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르고 확고한 인생관
본문: 로마서 14:8

관광지에 위치한 호텔은 같은 평수의 방이라도 전망에 따라 가격차가 상당히 납니다. 똑같은 설계에 똑같은 재질을 사용하고, 똑같은 평수에 똑같은 인테리어를 해도 어느 쪽에 방을 만드느냐, 객실에서 창 밖을 내다볼 때 바다가 잘 보이느냐, 산이 잘 보이느냐에 따라 가격차가 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지오웰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으나 부정적인 인생관 때문에 생긴 우울증과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너 루스벨트는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나 미국의 역대 대통령 부인들 가운데 가장 호감이 가는 여성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벌은 물을 마셔서 꿀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셔서 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인생관을 갖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의 창을 열면 어떤 곳이 보이나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한번 주어진 이 엄숙한 인생, 이 존귀한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을 바로 가르쳐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요 수학자요 종교가였던 피타고라스가 말했습니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20년 정도 있으면 사람이 보통으로 150년은 살게 되리라고 과학자들이 장담합니다. 300년을 살아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보람 있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의 한번밖에 살 수 없는 이 고귀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르고 확고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르고 확고한 인생관을 가질 때 나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살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르고 확고한 가치관을 가질 때 올바로 생활할 수가 있습니다. 올바르고 확고한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을 때 올바로 살아가기가 어렵고 힘차게 실천하기가 힘이 듭니다. 이런 사람은 유혹 앞에 타락하기 쉽고, 시련 앞에 좌절하기 쉽고, 고난 앞에 낙망하기 쉽습니다.
초지일관 한 행동, 시종여일한 생활, 백절불굴의 태도, 칠전팔기의 의지는 모두 올바르고 확고한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잠언에 보면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상이 없는 민족은 역사의 시련과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것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새 정신으로 새 생활을 힘쓰는 새 민족이 되어 새 나라를 건설하고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합니다. 만물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새 사람은 무엇이고 낡은 사람은 무엇입니까? 새사람은 생각이 새로운 사람이요, 낡은 사람이란 생각이 낡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낡았다 해롭다 하는 것의 기준은 그 사람의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생각이 새로워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변화하려면 그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가끔 외국에 가보면 문명한 세계에 살면서도 20년 30년전 가졌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사는 분들을 만나는데 문명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는 것을 봅니다. 외국에서 난 사람을 우리는 흔히 2세라고 하는데 말은 외국어를 하면서도 생각은 1세들과 다른 것 없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생각, 의식, 사상이 달라져야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사람이 바뀝니다. 사람이 바뀌면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왔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난 것부터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을 한없이 아끼고 존중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 우리의 생명이 그 지위가 높건 낮건, 재산이 많건 적건, 교육을 많이 받았건 적게 받았건, 남자 건 여자 건, 권력이 있건 없건, 하나님이 주신 감사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세상에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 귀중한 생명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생명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자기의 생명과 남의 생명을 천시하고 학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정적이고 허무적이고 저주적 생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은 의무도 가치도 없는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 목적도 사명도 없이 내던져진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허망한 꿈이요 무의미한 장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성실하게 살고 진지하게 살만한 것이 못된다고 합니다. 도박을 하는 것처럼 되는 대로 살고 아무렇게나 살아갈 뿐이라고 합니다.

헬라의 비극시인 소포클레스는 "안간에게 있어서 최선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차선은 하루 바삐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생명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으로 허무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업신여기고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되는 대로 살고 스스로를 타락과 저주와 불행의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명관을 가져야 합니다. 내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감사 속에 받아들이고, 나의 지혜와 정성과 능력을 다해서 성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꿈이 아닙니다.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는 "생명은 존엄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생명에 관한 엄숙한 진리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 이런 마음과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중히 여기고 자기를 아끼고 경거망동하지 않고 스스로 조심하여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 천하를 얻더라도 네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온 천하를 손에 쥔다고 해도 내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생명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 천하의 가치보다도 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더 높이 귀중히 보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무한한 잠재력과 놀라운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능과 소질,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최대한도로 키우고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처럼 장사해서 남겨야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처럼 땅에 묻어두면 안됩니다. 구슬도 닦아야 빛이 납니다. 산 속의 금맥도 캐내야만 그 빛과 값을 나타냅니다. 산 속에 아무리 많은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다고 해도 캐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안에 빛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빛과 힘을 최고도로 발휘하고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요 목표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빛과 힘을 마음껏 발휘한 사람들입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이 아름답게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려면 부지런히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 주면서 정성껏 돌보고 가꾸어야 합니다. 저절로 풍성한 열매가 맺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비범한 재주도 내버려두면 녹이 쓸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소질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은사의 개발입니다. "천재는 99퍼센트의 땀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구성된다"고 말한 발명왕 에디슨의 말은 너무 옳습니다. 이것은 에디슨이 사색에 의해서 얻은 결론이 아니라 그의 생활을 통해 얻은 진리입니다. 인류역사에는 위대한 천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천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천재는 요행의 결과가 아닙니다. 천재는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사안일 속에 허송세월을 하거나 편안한 잠에 취했을 때 천재들은 밤이 새도록 피땀의 수련과 노력을 쌓았습니다. 백련천마(百鍊天麻)란 말이 있습니다. 백 번 연습하고 천 번 갈고 닦는다는 말입니다. 남이 한번 하면 나는 열 번하고, 남이 열 번하면 나는 백 번하는 끈덕진 노력 속에서 천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걷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꾸준히 노력하는 자만이 향상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사도바울을 훌륭하게 생각합니까? 그는 푯대를 향해 달음질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인생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논하고 있지만 정말 인생을 멋있게 살았다고 자신 있게 고백한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분명한 목적과 보람 있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못한다면 그저 헛된 삶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황해도에 사는 어떤 부자가 하루는 이른 아침에 종에게 일렀습니다. "자네 조반 먹고 벽난도에 다녀와야겠네." 그런데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심부름을 보내려고 종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종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온 식구가 걱정을 하였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 늦게 종이 지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부자는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가 이제야 나타났느냐고 호통을 치자 종은 "예, 벽난도에 다녀오라고 하셔서 지금 막 다녀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에 부자는 "한심한 사람아, 내가 벽난도에 다녀오라고 한 것은 시킬 일이 있어서이지 그냥 갔다 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탄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한평생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으나 헛된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열심히 산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번 주어진 일생을 허비하게 되면 다시는 회복할 길이 없습니다. 되돌아올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생의 많은 풍랑을 보며 염려하라고 만든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조각가로 태어났는지도 모릅니다. 주어진 시간에 무엇인가 조각해야 합니다. "인생은 석재다. 거기에 하나님의 모습을 조각하든지 아니면 악마의 모습을 조각하든지 그것은 자유이다."라고 한 스펜서의 말처럼 말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의 비결을 말했습니다. 부를 축적하는 방법과 훌륭한 정치가나 군인이 되는 길을 여러 가지 수식어를 달아서 요란스럽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복잡하지 않고 너무나 쉬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분께 굴복하고 인생을 맡겼습니다. 자신의 과거가 정말 헛된 삶이었다고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시민권과 최고의 지성을 겸비한 바울은 자신이 가졌던 과거의 모든 것은 배설물과 같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아직도 인생을 모르면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께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쉽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가장 쉽고 일반적인 동시에 가장 어렵고 심오한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도 없고 반면에 인생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이면서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문제를 해결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14:8). 이 말은 사도바울의 인생관이며 그의 생활 철학이며 삶의 지침입니다. 그는 주를 위해서 사는 올바르고 확고한 인생관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로 모르는 되는 대로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 있게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생의 해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게 해답을 주시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해답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발견했기 때문에 인생의 해답을 얻었고 인생의 해답을 얻었기 때문에 확고한 인생관이 생겼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인생관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목표가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주를 위하여 사는 인생의 목표가 설립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출세 성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인생을 살아갑니다. 혹자는 이러한 사도바울의 인생관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욕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는 인생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그의 인생목표는 주를 위한 삶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삶의 목표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인생을 투자할 수 있는 삶의 목표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행복합니다.

둘째는 생사를 초월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이것은 생사를 초월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살고 죽는 문제를 뛰어넘고 살고 있습니다. 인생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생사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삶의 문제가 해결된 자만이 죽음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자는 생사를 초월할 수 있고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 사도바울은 적어도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예수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5)

셋째는 주님께 속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자기 삶의 전부, 자기 인생의 전부가 주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올 때 너무 원통함을 느낍니다. 인생은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바로 아는 자는 평안을 얻고 자유함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주의 것이란 주의 소유란 의미인데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이 귀한 진리를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알면 주님의 뜻에 순응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넷째는 예수님을 주로 삼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가치로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그 분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을 만큼 큰 가치로 인정하고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의 해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움을 비추는 빛이요 절망을 내쫓는 인류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바로 인생의 해답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인생을 살아가는데는 부정적인 자세와 긍정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을 자기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내가 나를 마이너스의 측면에서 봅니다. 나는 지방출신이다. 나는 일류학교를 못 나왔다. 나는 머리가 신통치 않다. 나는 특별한 재능도 없다. 우리 집안도 별 볼 일 없다. 나는 무능력자다. 나는 인생의 패배자다. 나 같은 것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다. 나는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자세는 자기를 과소평가하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어두운 심정이 됩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위축되고 좌절감에 사로 잡혀 삽니다. 인생에서 자신감과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는 섦의 의욕을 잃고 전지의 기력을 상실하고 말아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될 일도 안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리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내가 나를 플러스의 측면에서 봅니다. 나는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소중한 사람이다. 주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에게는 절망이나 불가능은 없다. 이와 같은 삶의 긍정적인 자세는 자기를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소망과 용기로 심신이 부풀어오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낙심이나 위축 좌절감 같은 것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희망과 확신, 그리고 용기를 갖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의욕이 솟구치고, 미래에 대해서 낙관하고,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은 절대로 내게 손해 되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어떤 환경이나 처지에서도 늠름하게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소망의 등불이 있고, 확신과 용기가 있으면 우리는 어떤 어려운 역경도 돌파하고, 커다란 고난도 극복하고, 무서운 시련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소망은 강한 용기요, 새로운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강한 용기와 새로운 의지를 가지고 고난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우리에게서 모든 공포를 쫓아내 버립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요, 소망은 생명에 이르는 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생관을 갖느냐 하는데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가 달라집니다. 가령 여기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보람도 없고 사는 의미도 없는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성실하게 살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는 되는 대로 살고 아무렇게나 행동합니다. 삶의 의욕도 없고 무슨 일을 해도 성의와 열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하고 약속을 해도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무계획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상주의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높은 이상을 세우고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분투 노력하는데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생애를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실한 자세로 신의와 책임을 지키면서 높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행동에는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생활에는 확고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가치를 창조하려고 힘씁니다. 그러니까 허무주의자의 삶의 자세와 이상주의자의 삶의 자세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관이 우리 삶의 방향과 태도를 결정합니다. 우리의 인생관은 우리 삶의 나침반이요, 생의 길잡이입니다. 성공한 사람,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모두가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산 사람들입니다. 한민족, 한 나라의 흥망성쇠도 그 국민의 인생관과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번영과 부강의 상징이 되고, 세계를 지도하는 위치에 서게된 것이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미국국민에게는 청교도적 개척자의 인생관이 있습니다. 남아메리카의 빈곤과 쇠퇴는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향락주의적 인생관에서 유래하는 바가 큽니다. 그들은 인생의 목적이 주색잡기에 있다고 보고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추기를 즐기는 타락적, 퇴폐적 인생관이 그들의 사회를 가난하고, 뒤떨어진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한 민족이 번영하려면 그 민족의 인생관을 옳게 건설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행복하려면 그 사람의 인생관이 옳아야 합니다. 인생관은 한민족이나 한 사람의 정신적 지주요 마음의 대들보요, 생활의 뿌리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그 나무는 힘차게 자라납니다. 사람이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의 인생관이 건전하고 착실해야 그 민족은 부강과 번영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스웨덴의 석학 구너뮈르담(Gunner myra)은 "국빈론"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아시아의 빈곤은 자원이나 자본부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이 지역 주임의 불합리한 생활태도와 인습적인 사회제도에 기인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귀담아들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가 가난하게 될 결정적인 요인은 주민들의 의식구조와 정신자세와 인생관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능률, 비활동, 비합리의 악을 없애고 능률과 활동과 합리의 생활기풍, 사회윤리를 일으켜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국민의 인생관을 개조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관이 무엇입니까? 인생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냐? 성경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부정적이고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올바르고 확고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민족과 국가에 공헌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 의미 있고 보람되고 축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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