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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미타티오 데살로니안! (살전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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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미타티오 데살로니안!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1-10
2004.1.11. 주일예배

오늘은 멋진교회 창립 세 돌 기념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멋진교회를 세우신 까닭이 있습니다. 교회 생일을 맞아 그 의미를 다시 되 새겨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슬로건 가운데 “이미타티오 멋지니안”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2001 년 1 월에 교회를 창립하고 두 주일 지난 1 월 28일 주일 저녁예배 때 설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때 설교 제목이 “본받고 다시 본이 되는”이였습니다. ‘이미타티오 멋지니안’이란 말은 만든 말입니다. 영어도 아니고 라틴어입니다.

그래서 교회 처음 나오신 분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누가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멋진교회의 창립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이미타티오 멋지니안’이 무슨 말인지 다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교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모범이 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데살로니가교회를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본받을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는 데살로니가를 칭찬하는 내용이 가득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들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책은 어떤 책일까요?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신약에 있는 바울의 글들은 모두 편지입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쉬지 않고 다녔습니다. 또 복음을 전한 곳은 끊임없이 돌봐야만 했습니다. 재방문을 해도 대부분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또 어떤 곳은 아예 들르지 못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미처 발길이 닿지 못하는 곳을 돌보기 위해 편지를 이용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그런 이유로 쓰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7-18에서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살전 2:17-18>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가기 위해 여러 번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가지 못했습니다.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는 수 없이 대신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가 최초의 신약 성경이 될 줄은 바울도 몰랐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바울의 격려의 글이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못하게 훼방하는 세력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굳굳하게 견뎠습니다. 지도자를 만나지 못해도 이들은 오히려 강건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처음 바울을 만나 복음을 받을 때부터 핍박이 심했습니다. 본문 6 절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할 때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 구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행17: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행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17: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행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행17: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행17: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행17: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행17: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행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고 바울이 찾은 곳은 데살로니가라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세 주일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3 주면 짧은 기간입니다. 더 있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자의 괴악한 자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돈을 주고 산 깡패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에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끌어냈습니다. 떼를 지어 다니면서 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밤중에 몸을 피해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바울은 베뢰아로 몸을 피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은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베뢰아에 있다는 소문을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들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행17:13-14>

바울은 다시 베뢰아에서도 쫓겨야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적대자들은 이토록 지독하게 훼방을 했습니다. 자기 성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말보다 주먹을 앞세웠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반대하는 자들이라고 고발했습니다. 다른 임금 예수라 하는 자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떠난 뒤로도 데살로니가교회는 이들에게 시달렸습니다. 정말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 지도자도 없이 예수를 믿어야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을 배운 기간은 3 주일 뿐입니다. 참으로 아쉬운 기간입니다. 바울은 온전히 3 주를 채우지도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전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9 말씀을 보면 그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살전 2:9>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선교 후원자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선교 현지에서 비용을 해결하는 자비량 선교를 했습니다. 더구나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과 낮으로 일했습니다. 말씀은 틈틈이 전했습니다.

아마 깡패에게 몰려서 3 주 밖에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시간을 냈을 것입니다. 바울은 충분히 복음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복음의 맛보기만 보였을 뿐입니다.

또 데살로니가교회는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더 어려운 교회를 위해서 연보를 내는 일에 본을 보였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8:1-2>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마게도냐 지방에 있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을 겪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풍성한 연보로 다른 교회에 본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데살로니가교회는 핍박을 받고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교회입니다. 지도자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단지 3 주 동안 복음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교회는 신약의 어떤 교회보다도 멋진 믿음 생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 절에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가득한 모습이 소개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살전 1:3>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가득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소문은 각처에 퍼졌습니다. 8 절부터 마지막 10 절까지 어떤 소문이 났는지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소문입니다.

본문 8 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살전 1:8>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믿음이 좋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어떤 믿음이냐면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입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있듯이,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을 향하고 삽니다. 주만 바라보고 삽니다.

둘째는 섬김의 소문입니다.

본문 9 절입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전 1:9>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제일 먼저 우상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service라고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시간입니다.

셋째는 종말에 대한 신앙이 소문이 났습니다.

본문 10 절입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살전 1:10>

주님이 다시 오심을 믿고 기다리는 신앙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은 짧은 시간을 값지게 씁니다. 죄 지을 여유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장래 노하심”이란 심판을 뜻합니다. 죄 지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믿음으로 살면 예수님이 그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매력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모든 조건이 열악했습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닙니다. 찬양을 많이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영성훈련을 한 것도 아닙니다. 부흥회를 체험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교회를 이룰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이 본문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복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받은 것입니다.

본문 5 절입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5>

바울은 성령의 사도였습니다. 말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전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기회가 너무 짧았습니다. 3 주는 교회를 세우기에 충분한 기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 기간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가 바로 본받는 자세입니다.

본문 6 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6>

데살로니가교회가 본받은 모델은 두 가지입니다. 바울과 주님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을 때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할 때 모델을 세웠습니다. 바울을 그대로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예수님을 본받았습니다.

본을 받는 것이 비결입니다. 말씀에 능력은 전하는 자의 몫입니다. 그리고 본받는 것은 말씀을 받는 자의 몫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이제까지 세 가지 방법을 발전해 왔습니다.

하나는 수도원 영성입니다. 이 영성을 배우려면 평생을 수도원에서 수도를 해야 합니다. 선배 수도사들이 터득한 방법들을 배워서 영적으로 깊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묵상과 기도를 하면서 지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너무 어렵습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따라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순례자의 영성입니다. 이 방법도 수도원 영성과 마찬가지입니다. 천성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 여행입니다. 자아를 향한 내적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일상생활에서의 분리를 요구합니다.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도 어렵습니다.

세 번째가 본받음의 영성입니다. 본받음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하고 묵상합니다. 그러면서 내 뜻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릅니다. 이 본받음의 영성을 배우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그것을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복음서만 읽어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선한 분이신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섬기러 오셨습니다. 자기를 희생해 십자가를 지기까지 세상을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받으며 사는 것은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손해를 봐야 합니다. 그러나 내 생명을 남에게 주면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영성의 비밀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은 이 본받음의 영성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믿음의 삶이 그 일대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본문 7 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살전 1:7>

데살로니가교회는 본받는 교회에서 이제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본받음을 라틴어로 이미타티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을 이미타티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라고 합니다.

바울도 평생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바울의 목회 비법은 예수를 본받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으면 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을 자기 삶을 통해 전했습니다.
바울은 유능한 설교가입니다. 그러나 말로 설교하는 것보다 삶으로 설교한 설교가입니다.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본받고 바울을 본받았습니다. 바울을 본받는 것을 이미타티오 바울로(Imitatio Paulo)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역시 바울을 본받았습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믿음의 삶의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변의 교회들이 데살로니가교회를 본받기 시작했습니다. 보잘것없던 연약한 교회가 어느새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본이 되었습니다. ‘이미타티오 데살로니안’(Imitatio Thesslonians)입니다.

본이 되는 교회. 모든 교회의 모델이 되는 교회! 멋진교회를 창립하면서 제 마음 속에 이 슬로건이 불타올랐습니다. 침체기에 빠진 한국교회에 모범이 되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보자. 그래서 교회 이름도 멋진교회입니다. 멋지게 예수 믿어보자는 뜻입니다.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멋지면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를 멋지게 믿어봅시다.

그래서 우리 멋진교회가 소문이 나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의 모든 교회가 본을 삼을 수 있는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표어가 “예수닮기”입니다.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미타티오 바울로. 우리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본받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멋진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이미타티오 데살로니안. 우리 멋진교회가 이렇게 본받는 일을 잘하면 우리도 본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멋진교회를 본받자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미타티오 멋지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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