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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군마상(軍馬像)의 갈보리 (욥 39:19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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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상(軍馬像)의 갈보리 
욥기 39 : 19 - 25

믿음의 사람 욥은 그가 겪는 말할 수 없는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만은 거침없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조와 말과 매와 독수리를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함께, 그 동물들의 특성을 열거 하시면서 그 동물들의 생태적 신비에 대해서 욥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 기록된 말은 군마를 가리킵니다.

특히 본문에 나타나는 군마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누가 군마에게 그런 힘과 권능과 용기를 주셨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군마를 하나님의 백성, 즉 오늘 우리 갈보리 교회와 비유해서 설교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아가서 1장 9절에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준마에 비하였구나』라고 함으로 바로의 준마를 술람미 여인 즉 성도에 비유했기 때문입니다.

Ⅰ. 군마(軍馬)의 상징은 힘에 있습니다.

본문 39장 18절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힘』(게부라, )은 매우 강력한 힘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 말의 힘은 힘 있는 군마의 용맹성과 겁 없는 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흩날리는 말의 갈기는 참으로 멋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군마의 힘은

1) 메뚜기처럼 뛰는 데서 나타납니다.
본문 39장 20절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그 덩치 큰 짐승이 마치 메뚜기가 뛰는 것처럼 날렵한 모습으로 달리는 것은 군마가 가진 힘 때문입니다.

2) 위엄스러운 콧소리에서 나타납니다.
본문 39장 20절에 『…그 속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위엄(호드, ) 은 말이 울부짖을 때 울림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말의 콧소리는 굉장히 우렁찬 것이 사실입니다. 그 누구라도 말 옆에 있다가 갑자기 말이 콧소리를 내면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말의 콧소리는 여타 짐승과 다르게 특이 합니다.
예레미야 8장 18절에 『그 말의 울부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의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의 콧소리는 곧 그 말의 힘으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Ⅱ. 군마(軍馬)의 상징은 싸움에 능한 것입니다.

1) 군마(軍馬)는 힘을 과시하여 상대방을 압도합니다.
본문 39장 21절에 『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허위고』(하파르, )라는 말은 '탐색하다', '앞발로 긁다'라는 뜻인데 『골짜기에서 허위고』( )라고 함으로 말의 발이 맹렬하게(fiercely) 땅을 긁어대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허위고』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로 되어있기 때문에 말 탄 사람이 정탐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군마 자신이 상대방에게 위엄을 보일려고 땅을 힘있게 긁어 대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2) 군마(軍馬)는 자신의 힘에 대하여 자신감으로 충만합니다.
본문 39장 21절에 『힘 있음을 기뻐하며…』라고 했습니다.
이는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힘으로 인해서 자신만만하게 기뻐하는 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군마(軍馬)의 전진은 능동적입니다.
본문 39장 21절에 『…나아가서 군사를 맞되』라고 했습니다.
군마는 공격적으로 싸움을 하기 좋아합니다.

4) 군마(軍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본문 39장 22절에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비웃고』(사하크, ) 라는 말은 우습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전쟁터에서 군마는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5) 군마(軍馬)는 후퇴를 하지 아니합니다.
본문 39장 21절에 『…칼을 당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적들의 위험한 무기들이 전진을 가로 막을지라도 후퇴하지 아니하고 부상을 당할지라도 전진을 멈추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6) 군마(軍馬)는 전쟁의 강도에 따라 용감성이 그에 비례합니다.
본문 39장 23-24절에 『그 위에서 전동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전동』(아쉬파, )은 화살을 넣는 통을 말합니다. 여기 작은 창은 던져서 적을 맞추는 치명적인 표창종류입니다. 큰 창은 휴대용 주무기를 말합니다.
이러한 철재 무기가 서로 부딪칠 때 빛이 난다는 말입니다.
여기 『쟁쟁하며』(라나, ) 라는 말은 화살통이 말등에 부딪히고 창과 칼들이 부딪치는 모습을 실감 있게 묘사한 것입니다. 전쟁이 치열할수록 군마는 더욱 맹렬하여 마치 땅을 삼킬듯이 성내며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심해지고 치열해지면 군마는 자신의 힘에 맞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함께 군마의 힘과 용맹성도 그에 비례해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군마는 전쟁의 상황에 따라 그의 천부적 힘이 솟아납니다. 성도들도 하늘에서 힘을 공급받아야 전쟁을 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은 기도로서 가능합니다.

7) 군마(軍馬)는 전쟁터에서 엄격한 규율에 의해 싸웁니다.
본문 39장 24-25절에 『나팔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 울며...』라고 했습니다.
『나팔소리를 들으면』 이라는 말과 『나팔소리 나는 대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팔 소리 나는 대로'라는 말은 '나팔소리가 날 때마다' 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군마는 이렇게도 장군의 나팔소리에 엄격히 통제받으며 싸우고 있습니다.
『소소히 울며』(아하, ) 라는 말은 주로 기쁨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감탄사입니다.
군마가 목숨을 담보로 하여 싸우는 일이 재미있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나머지 기쁨으로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전쟁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

Ⅲ. 군마(軍馬)의 상징은 장관에 대한 충성에 있습니다.

1) 전쟁 냄새를 잘 맡는데 있습니다.
본문 39장 25절에 『…멀리서 싸움냄새를 맡고…』라고 했습니다.
싸움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싸움에 대한 관심과 집중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싸움냄새가 군마에게는 익숙합니다. 충성된 군마는 싸움냄새가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2) 장관의 호령을 듣는데 있습니다.
본문 39장 25절에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고 했습니다.
떠드는 소리는 전쟁으로 인한 요란한 소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마에게는 떠드는 소리와 장관의 호령을 혼돈됨이 없이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떠드는 소리 때문에 장관의 호령이 들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관에 대한 군마의 충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라고 한 찬송가 543장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영접한 그 시간부터 숨 막히는 영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날마다 영적 전쟁에서 전투하는 존재입니다. 군마의 상징은 힘이듯이 싸움하는 성도에게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육간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힘, 전도의 힘, 봉사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 있는 고상한 달란트는 곧 그가 가진 힘입니다.

경제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결속하는 인화협동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성도 그가 가진 힘입니다. 그 힘을 하늘에서 공급받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라고 했습니다.
힘이 있어야 활동할 수 있습니다. 힘이 있어야 위엄이 있습니다. 군마의 상징이 싸움에 능한데 있듯이 성도에게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일에 언제나 공격적이고 능동적이어야만 합니다. 군마는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아니 합니다. 싸움이 맹렬하면 할수록 군마의 용감성은 싸움의 강도와 비례합니다.
군마는 싸움터에서 엄격한 규율에 의해 싸웁니다. 군마의 상징이 장관에 대한 충성에 있듯이 우리 성도들은 주님 앞에 충성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싸움을 명령하고 지휘하는 군대 장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장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호령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받은 신구약 성경 66권입니다. 성경이 전진하라고 하면 전진해야 합니다. 성경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요란해도 성경은 귀에 들리고 눈에 보여야 하고 그 성경 앞에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생각이 움직여야 합니다.
싸움터에서 군마의 절정은 장관의 호령을 듣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말이 힘이 있어 용맹스럽고 충성스럽다고 해도 장관의 호령을 들을 줄 모르면 군마는 존재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계시종교의 특색입니다.

듣고자 하면 모여야 합니다.
모이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모여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의 존재의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장차 받을 것에 대한 vision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보은 행위입니다. 예배하는 가운데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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