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찬송할 이유 / 시 103:1-6

  • 잡초 잡초
  • 457
  • 0

첨부 1



      찬송할 이유

본문: 시편 103편1- 6

찬송과 기도는 영적 생명의 호흡입니다. 찬송과 기도가 활발한 교회는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잘 자랍니다. 찬송은 개인의 혼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혼의 노래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그리고 공동체적인 영혼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찬송은 감사와 기쁨의 넘침입니다. 찬송은 믿는 사람들의 중요한 표징입니다. 호화스러운 집에서 저주와 분노와 체념 속에 사는 것보다 초라한 집에서 찬송을 부르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찬송은 오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찬미합니다. 찬송은 영혼의 깊고도 맑은 울림일 뿐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입니다. 따라서 찬송은 고정된 것일 수 없고 남이 대신 불러 줄 수도 없고 남의 것일 수도 없습니다. 참된 찬송은 자신의 환경과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혼으로 부르는 노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체험한 은혜를 노래로 만든 것들입니다. 모든 찬송이 하나님 사랑의 감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부르면 은혜롭지 않은 찬송이 없습니다. 믿음이 살아 있고 영혼이 살아 있다면 늘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고 은혜의 체험이 새로운 찬송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앙 시(詩)와 노래가 부족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과 영혼이 얕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생겨난 우리의 찬송을 부를 때 우리는 우리 사회와 역사를 새롭게 이끌어 갈 활력을 얻습니다.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 정치, 종교, 문화적으로 독특하게 형성된 영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신명이 있고 곡조가 있고 가락이 있습니다. 우리의 비옥한 마음 밭에 믿음의 씨앗이 싹을 트고 뿌리를 깊이 내려, 은혜로운 찬송이 꽃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이렇게 시를 읊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리고 은혜를 잊지 말라 또한 그가 파멸에서 건져주신 주님의 돌보심을 송축하고 지금도 나의 피로를 충족하시는 여호와를 송축하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축하하느냐 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문제도 아닌 옛날 지난 문제를 가지고 애굽에서 건져주시고 홍해를 갈라주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 드리고 송축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다윗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송축하며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를 크게 3가지로 집약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택정해 주신 일로 송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택해주셨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택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만 하나님은 항상 현재뿐입니다. 왜 그러냐하면은 그는 수만 년 전서부터 수 만년 후까지 한 눈으로 보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 앞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그 분 앞에는 현재뿐이기 때문에 만세 전에 나를 다 아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서 죽을 때까지의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 분의 눈에 비쳤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아셨기에 나를 쓰시려고 택하셨다 그래서 택하신 그 분은 쓰시기 위해서 성령도 주셨고, 믿음도 주셨고, 예수의 존귀한 이름도 주셨고,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가 찬송해야 할 첫째 이유는 그 하나님이 나를 택해 주신 일, 나를 아셔서 나를 쓰시겠다고 택하셔서 일할 수 있는 것을 주어 오늘까지 써 주신다는 일 때문에 택정해 주신 하나님께 송축해야 합니다.
둘째, 파멸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는 벌써 죄 값으로 멸망 받아야 하고, 흙으로 만들었기에 깨져야 하고, 마귀가 던져주는 수많은 유혹으로 벌써 지옥 갈 영혼을 건져 주셨고, 타락할 우리를 바로 잡아주셨고, 병들은 우리를 고쳐 주셨고, 어그러진 길로 가는 우리를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파멸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셋째, 지금도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은 떠나지 않고 동행해 주시는 일로 인하여 송축해야 합니다. 말 굿간 같이 더러운 내 마음속에 하늘 영광 버리시고 말구유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에 올라가셔서 자기 대신 성령님을 말 굿간보다 더 더러운 내 마음 속에 와 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세상 끝날 까지 고아와 같이 날 버리지 않는 동행해 주심에 우리는 찬송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와 동역 하시는 일에서는 성령님이 우리의 속에 와서 떠나지 않고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고, 실오라기 같은 믿음을 주셔서 수많은 유혹이 나를 손짓하지만 오늘도 주님 앞에 나오게 하신 일에 송축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거룩한 이름을 주신 일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렇게 찬송을 하면은 어떤 일이 생기는가. 첫째, 사울이 악신이 들렸는데 다윗이 거문고를 튕기며 찬양을 불렀더니 악신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더럽고 냄새나는 못 된 귀신도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속에서는 못 견디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송축하면 귀신은, 악신은 떠납니다. 그럴 때에 병도 낫습니다. 오늘 우리도 열정적으로 찬양하면 귀신 떠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과 실라가 기도했더니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깨지고, 쇠고랑이 깨지고, 간수가 회개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바울과 실라는 놓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찬양이 하니라 우리는 산 찬양으로 하나님을 송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찬양하면 환경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예배 속에서 성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심으로(시135:3)
1887년 어느 겨울 날, 히윗 여사는 전도하려던 불량 소년에게 크게 맞아 부상당하여 오랜 병원생활을 하던 중 굳건했던 신앙도 짜증으로 변할 즈음이었습니다. 이때, 한 흑인 여자가 병실 청소를 하면서 즐겁게 흥얼거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히윗 여사는 그만 짜증을 내었습니다. "청소부 주제에 무엇이 그렇게 좋지?" 흑인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형편과 사정이 찬송으로 변할 수 있는 힘을 주었으니 즐거울 수 밖에요." 이에 그녀는 자신의 초라한 믿음이 부끄러웠습니다. 곧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고 참회의 시를 썼습니다. 그것이 455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입니다. 우리가 주의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심을 느낄 때 우리는 주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2. 주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찬송해야 합니다.(출15:11)
영국의 유명한 찰스 웨슬리는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라는 찬송을 지었습니다. 그 찬송을 짓게 된 동기는, 어느 날 서재의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쉬고 있으려니까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매에 쫓겨 살길을 찾아 그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새는 공포에 싸여 방안을 몇 바퀴 돌더니 푸드득거리며,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옷자락 속에 깃들였습니다. 찰스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새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할딱거리던 새는 잠시 후 평안해진 듯 보였습니다. 그는 어린 새를 쓰다듬어 창 밖으로 놓아보내고 일어나 불현듯 그 마음에 떠오르는 노래를 읊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곧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라는 찬송입니다. 그가 이 노래를 짓게 된 동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아메리카에 가서 전도하려고 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귀국하는 도중 풍랑을 만나서 처참한 곤경을 넘긴 일이 있는데, 그때 위기 중에서 전심을 주께 맡기고 고난을 돌파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황야 같은 세상을 사는 인생들이 참 생명의 주를 신뢰하도록 하는 데 큰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풍랑을 만날 때는 절대자이신 주님께 나아갈 때입니다. 질병, 고통, 전쟁, 가정적 풍파, 개인적 풍파, 교회와 사회와 국가적 풍파는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는 채찍입니다.
3. 성실과 진실로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한 음악가가 길을 걷다가 대성당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오르간 연주를 들었습니다. 그는 오르간을 연주하는 노인에게 다가가 부탁했습니다. "제가 한번 연주를 해볼 수는 없을까요" 노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누구인 줄도 모르는데 이 소중한 오르간을 연주하게 한단 말이오" 음악가는 한번만 연주를 하게 해달라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마지못해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음악가는 오르간 앞에 앉더니 장엄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대성당은 환희와 감동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것은 마치 천사의 노래와 같았습니다. 노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연주가가 말했습니다. "나는 멘델스존입니다." 노인은 그의 손을 잡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제가 대음악가를 몰라보았군요" 이 음악가가 바로 찬송가 126장 '천사찬송하기를'을 작곡한 대음악가였습니다.
마음속에서 성령이 연주를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찹니다. 단지 사람들이 마음의 오르간을 대연주자에게 맡기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25:1)
4. 우리에게 가장 큰 보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102장은 G.B. Shea라는 분이 작곡한 것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예수를 믿었습니다. 교회학교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을 벌면서 점점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카고방송국의 연출가였고, 인기 절정의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은 많이 벌면서도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출세를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불안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어릴 때 믿던 예수님에 관한 추억과 향수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낭비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느 성회에 참석하게 되고, 거기서 예수님께 대한 헌신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다시 전속계약을 하면 지금까지보다 몇 갑절의 출연료를 주겠다는 내용의 전화였습니다. G.B. Shea는 "나는 이제부터 내 모든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쓰기로 작정했습니다."라고 하며 방송국의 계약 청원을 거절했습니다. 그때부터 G.B. Shea의 마음속에서 멜러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녀의 친구인 밀러 여사에게서 가져왔던 시에 작곡을 했습니다.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소유해야만 하는 보물이 있습니다. 그 보물이 예수님이십니다.
5.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출15:2), 기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찬송에는 힘이 있고 가락에 신명이 담겨야 합니다. 찬송은 악한 귀신을 몰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행과 저주와 어둠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능력입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고 어두운 세력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옥에 갇혀서 찬송을 불러 이겼습니다. 부정적인 생각, 어두운 생각, 파괴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고 불안과 걱정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본질, 바탕 근원은 기쁨입니다. 삶의 껍데기, 표피적인 데서 이런 저런 근심걱정으로 지겹고 따분하고 답답하게 지내지만 생명의 본 바탕에 이르면, 죄를 벗고 하나님 앞에 맨 몸으로, 맨 영혼으로 서면 기쁨이 솟구칩니다. 오히려 세상적 기쁨의 이유나 근거가 없을 때, 순수한 생명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독하고 답답한 상황, 절망적이고 두려운 상황이고 시들어 말라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놀라운 것은 속에서 자꾸 기쁨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다 뺏기고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는 상황에서 배짱이 생기고 기대와 욕망을 버린 상태에서 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하늘도 맑은 샘물도 푸른 강물도 하나님을 노래하고, 푸른 나뭇잎과 붉은 꽃도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생명의 기쁨이 피조 세계 안에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세상을 창조하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감옥에서의 기쁨, 기쁠 것 없는 상황에서 직접 인생의 바탕과 접할 수 있고 기쁨에 이를 수 있습니다. 기쁨이나 찬송은 죽음에 대한 생의 승리입니다. 죽음의 골짜기, 시련의 골짜기에서 기쁨의 찬송이 터질 때 지옥의 권세는 무너집니다. 믿음으로 탄식과 한숨과 저주가 기도로 찬송으로 바뀝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희망을 갖고 줄기차게 삽니다.
6. 새 노래를 우리 입에 두심으로(시40:3)
모든 동물 중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인간과 새들뿐입니다. 새들은 몸집이 작고 약할수록 고운 노래를 부릅니다. 독일 힐츠 산맥은 카나리아를 사육하는 조류공원이 있습니다. 카나리아의 합창은 방문객들의 탄성을 자아냅니다. 그런데 공원의 주인은 새를 팔 때 합창을 리드하는 솔리스트는 절대로 내놓지 않습니다. 카나리아 합창단 속에는 노래를 주도하는 몇 마리의 솔리스트가 있습니다. 이 카나리아가 다른 새들을 자극해 아름다운 화음을 엮어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찬양의 종교입니다. 신앙은 곧 찬양입니다. 신자들 중에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주도하는 '솔리스트 카나리아'가 있는가 하면 아무런 의미 없이 입만 움직이는 '수동적인 카나리아'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그 분도 '솔리스트 신자'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7. 영영히 우리의 하나님이심이기 때문입니다.(시48:14)
독일의 파울 게르하르트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불어닥친 30년 전쟁 때문에 고아가 됐습니다. 열두 살 때 아버지를, 열네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게르하르트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했으나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입학한지 14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그는 마흔네 살에 한 시골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페스트가 지역을 강타했습니다. 페스트는 게하르트 목사의 가정에 융단폭격을 퍼부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명의 자녀 중 넷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게르하르트의 삶은 온통 '고통'과 '슬픔'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의 순간마다 신앙시를 쓰면서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나를 하나님의 곁으로 인도한다. 시련을 통해 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확인한다."
게르하르트 목사는 고통의 순간에 무려 1백23편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18장 "내 영혼아 곧 깨어"도 그의 작품입니다. 슬픔과 고난 중에도 주님은 영원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8. 주님은 우리를 돕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초기 선교사로 활동하던 스코트 목사가 새로운 선교 지역을 찾아 나섰다가 호전적인 원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스코트 목사를 붙잡아 그의 심장에 긴 창을 겨누었습니다. 그때 그는 가지고 다니던 바이올린을 꺼내 연주하며 원주민 언어로 찬양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스코트 목사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3절을 부를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눈을 떠서 그들을 보니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그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스코트 선교사는 여러 해 동안 그들과 살면서 많은 원주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일이 닥칠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은 반드시 증거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경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며 모든 무릎이 그분 앞에 꿇을 것이며 모든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선포할 것입니다.(빌2:10-11) 그러므로 분명한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붙잡고 모든 피조물에게 주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시54:4)
9.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물은 흘러가야 썩지 않습니다. 고여 있으면 썩습니다. 썩은 물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머물러 있게만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통해 쉬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야 회복과 살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끊임없이 찬송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만물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어떤 은혜이든지 은혜를 받으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합니다. 피조물들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은혜의 특성입니다. 피조물들의 본래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감사의 표현이 바로 찬송입니다. 은혜 받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언제나 찬송이 넘칩니다. 찬송이란 하나님의 덕을 기리는 것입니다. 찬송이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에 감사하고 널리 전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찬송을 어느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시와 노래 그리고 예물이 되기도 합니다. 찬송할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늘보다 높고 넓으며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하늘에 가득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이란 변함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하나님께 찬송하여야 할 이유는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고 언제나 더 유익한 것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무도 크고 넓기 때문입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63:3)
10.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요. 산성이요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시71:3)
한때 음악가가 되려는 희망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베르디가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친 것은 오페라 <나부꼬>부터였습니다. 베르디는 첫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로 호평을 받고, 다음 작품 <왕국의 하루>를 작곡할 무렵 부인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을 겪었습니다. 낙담한 베르디는 두문불출하고 있었습니다. 라 스칼라 극장의 주인 메렐리는 재능 있는 작곡가의 좌절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작곡의 의욕이 솟을 만한 대본을 구했습니다. 메렐리는 <나부코>의 대본을 마련하여 베르디의 책상 위에 슬그머니 두고 왔습니다. 어느 날 베르디는 낯선 대본을 펼쳐 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전체 내용은 구약성경 열왕기하편에 나오는 것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간 유대인들이 핍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속에서 조국을 그리며 자유를 구가하는 가사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멜로디를 붙여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달고 비탈과 언덕에서 날개를 접어라 그곳은 부드럽고 온화한 공기 조국의 공기가 향긋한 곳 맞이하라 요르단 강둑과 무너진 탑 오, 내 조국, 빼앗긴 내 조국…”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된 <나부코>는 때마침 오스트리아의 압정 하에 있었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포로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같은 처지로 여기고 ‘노예들의 합창’을 국가처럼 불렀던 것입니다. 그 노래는 절망과 우수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 주었습니다. 독립과 통일을 바란 국민들은 베르디를 애국적인 우상으로 삼고, 작품이 나올 때마다 열광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1. 성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엡1:14)
벤자민 쉬몰크, 그는 헝가리의 신교도 목사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오니 교회당에 누군가가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어린 자녀들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조용히 하나님을 향해 찬송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시고 살든지 죽든지 주 뜻만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타플리드라고 마흔두 살에 죽은 청년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몸에 무수한 질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를 보며 사람들이 움직이는 종합 병원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 속에 죽으면서도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살아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고 내가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송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찬송을 갖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본 자는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12. 성도의 존재 목적임으로(엡1:12)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다운 보석들로 꾸미는 것도 아름답고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게 하는 일이 더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기 위해서는 찬송으로 먼저 채워야 합니다. 찬송으로 채워지지 않는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찬송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아멘
* 기도: 예배와 찬양 가운데 만나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부르심에 기뻐하며 구원의 감격과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산 제사로 주의 전에 나아가 찬양하며 무릎 꿇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은 저희의 입술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저희로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ce.ro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