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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총과 간구의 심령을 부어 주소서 (슥 1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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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과 간구의 심령을 부어 주소서 (슥 12:7-14)

모든 사람에게 신관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복을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조상신이 복을 준다고 믿었기에 구정에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항해를 하려면 바다 신인 水神에게 잘 보여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항해전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옛날 여인네들은 아들을 낳기 위해 삼신에게 빌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각자의 신관에 따라 복을 받기 위해 신에게 잘해주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 구정에 드리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이보다 더 크신 신이 어디 있습니다.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심령 깊은 곳의 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창조만 하시고 구만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계시는데 본문 7절부터는 3가지 사역을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7절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창조자 하나님은 구원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구원하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원자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를 구원하실까요?
7절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합니다.

포로 후 이스라엘은 3종류의 층이 있었습니다.
다윗 왕의 후손들입니다. 다윗의 가문이라는 자부심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나 요셉도 다윗의 후손인입니다. 다윗 가문이지요..

또 다른 부류는 예루살렘 성안에 사는 지도층입니다. 주로 제사장들과 귀족층입니다.
그리고 성 밖에 흩어져 사는 유다인들, 일반 서민으로 분류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 사는 사람들과 밖에서 사는 사람들은 오늘날 서울에 사는 사감과 시골에 사는 사람의 차이 정도가 아닙니다. 당시 성밖에 산다는 것은 늘 불안합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버틸 수 있으나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공격을 당합니다. 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을 때 먼저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서민들입니다. 부유층은 경제적 어려움이 와도 별 타격이 없습니다. 은행에 잔고가 몇 억씩 있는 사람들, 홀 임대료만 월 몇천씩 받는 사람들이 수출이 안된다고, 실업자가 는다고 무슨 타격을 받겠습니까? 서민들은 조금만 경제가 흔들려도 당장 카드빚을 막을 돈이 부족합니다. 당장 신용불량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밖에 사는 사람들의 아픔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난한 소외 계층을 먼저 구원하십니다.

예루살렘 안에는 다윗의 후손들과 제사장을 비롯한 귀족층이 살고 있었고 성 밖에는 일반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때 먼저 유다인들에게 임합니다.

주님은 먼저 유다의 장막을 구원하십니다. 왕통의 가문을 가진 사람들보다 먼저, 귀족층보다 먼저 소외 계층인 가난한 서민층들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특권층이 모여 사는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변두리 지역인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가난한 어부들을 제자로 삼아, 죄인들과 세리들과 병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펼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훌륭한 가문을 가진 사람들과 귀족층을 먼저 구원하셨다면 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잘난 사람이고, 우리는 비교적 죄를 적게 짓고 구원받음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자기 자랑입니다. 금식을 몇 번씩하고 십일조를 하고, 감사 예물을 드리고, 이렇게 자랑할 때, 세리는 머리를 들지도 못하며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지 않습니다.

귀족층은 구원에 대해 전혀 감사가 없고 자기 의와 공로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기에 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죄인들과 같은 레벨에 놓고 취급받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특별 취급을 해 주지 않는다는 불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의 후손도, 특권층도, 서민층도 다 죄인입니다. 피장파장이고 50보 100보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드러난 죄인들이고 바리새인과 특권층은 드러나지 않는 죄인들입니다. 은밀히 마음으로 다 죄를 지으면서 드러난 죄인들을 손가락질하는 것입니다.

마치 정치인들의 비리가 드러나면 자기는 깨끗한척 손가락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보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다 죄인입니다. 드러난 죄던, 숨겨진 죄던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드러난 죄인은 인정을 하고 숨겨진 죄인은 인정을 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복음은 드러난 죄인들에게 더 적용이 되는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차별이 없습니다. 다윗가문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특권층에게나 서민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차별이 없습니다.
롬3:2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공로로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 앞에 걸레 조각과 같습니다. 구원의 은총에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인종 차별, 남녀 차별, 신분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복음입니다. 사람들이 보면 유대인들은 좀 의롭고, 사마리아인은 의롭지 못한 것 같아도 예수님은 니고데모나 수가성 여인이나 동일한 죄인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철저한 은혜입니다.

2. 구원의 하나님은 보호의 하나님이십니다.
8절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믿는 자는 차별 없이 구원하신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교회를 보호합니다. 신자들의 믿음을 보호합니다. 아무리 약한 자라도 보호합니다. 골리앗 앞에 다윗처럼 교회는 약해 보여도 주님이 보호하십니다.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약한 자는 다윗 같습니다. 골리앗의 공경이 있을 때 장수들도 겁을 먹고 물러섰지만 약한 다윗은 당당하게 나아가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강하거나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보호함을 받습니다. 스가랴4:6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령의 사람이 되면 약하게 보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당당해집니다. 성령은 다윗보다 더 강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기에 하나님 같이 되고 하나님의 사자와 같습니다.

신자들이 시험에도 많이 들고 사탄의 공격을 늘 받는 것 같지만 성령의 사람이 되면 다윗와 같고 다윗보다 강하여 하나님의 사자와 같기에 넘어지지 않고 궁극적으로 믿음이 보호함을 받습니다.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영광을 보기에 시험은 받고 박해는 받으나 넘어지지 않고 믿음이 보호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치려고 오는 자들을 멸하심으로 교회를 보호함을 보여주십니다.

3. 교회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십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줍니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눈이 녹아 내리는 것처럼 조금씩 주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간구하는 심령이 넘치게 합니다. 이때 심령의 회복이 일어나 변화되고 이때에 부흥을 열망하며 이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은총과 간구하는 영이 부어지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봅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그 찌른바 나를 바라볼 것이요. 그런데 학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찌르나 해서 그라고 한 것은 사실은 그 짜른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은총과 간구의 영이 부어지면 내가 찌른 예수님이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나의 허물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리시고 찔리신 것을 보게 되어 통곡을 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마치 독자를 위해 애통하며, 장자를 잃고 애통하는 듯한 통곡의 회개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애통하는 것은 11절 큰 애통인데,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등불인 요시아 왕이 므깃도에서 애굽 왕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요시아 이 후 의로운 왕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바벨론에 포로됩니다. 마지막 민족의 등불이 요시아 왕이 전사했을 때 온 민족이 애통한 것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통 애통해하는 회개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구원의 역사 새롭게 되는 역사, 부흥의 역사가 있습니다.

12-14절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멸망을 보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못 박을 때 빌라도 죄가 없다고 놓아 주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와 우리 후손이 그 죄를 지겠다고 합니다. 그후 70년에 완전히 유대가 멸망당합니다. 그때의 모습입니다.
12절 온 땅의 족속이 따로 애통하고, 다윗 족속, 그 아내들, 다윗의 후손이 나난 족속과 그 아내들, 13절 레위 족속과 그 아내들, 레위의 후손이 시므인 족속과 그 아내들, 모든 남은 족속과 그 아내들이 애통합니다.

남자들끼리 모여, 아내들끼리 모여 애통하는데 다윗과 레위 족속을 부각시킵니다. 이제는 다윗의 왕직도 레위의 제사장직도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이 더 큰 애통입니다. 이제 다윗의 후손이나 제사장 지파는 이런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제 구원의 길은 하나입니다. 그 찔린바 예수님 앞에 나아와 은총과 용서를 구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영을 허락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은총과 간구하는 영이 부어지면 십자가가 보입니다. 회개의 영이 임할 때 죄로 인해 애통해하며 바닥을 치고, 뒹굴며 회개합니다. 나도 구원 받을 수 있을까 하며 죄를 보고 비통해 합니다. 그때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고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빈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의 애통하는 회개의 영이 임해 새롭게 되고 변화를 받고 부흥을 갈망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큰 부흥의 역사에 서 있는 복 받는 교회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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