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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체휼하신 예수님 (히 4:15, 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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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체휼하신 예수님
본문: 히4:15, 2:14-18

이번 주부터는 ‘예수를 앎’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 등으로 주로 알고 있으나 오늘부터 전할 말씀에는 이러한 보편적인 내용이 아닌 인성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들을 주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예수님의 신성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내용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세주이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우리가 그분을 닮아 가야 함을 보이고자 하는데 이 말씀의 목적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체휼하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여기서 ‘체휼’이라는 말은 ‘동정’하다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직접 체험함으로 동정함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4장 15절 말씀과 같이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히2장 18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시험은 유혹이 아니라 시련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기까지 받으신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고난의 시기를 거쳐서 이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는데, 예수님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첫째, 마귀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입니다.(14절)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아담의 범죄 이후 모두 죽게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구원계획을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때가 차매 보내셔서 죽지 않고 영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구원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자신이 죽으셔야 했고, 또한 본인이 직접 죽음을 맛봄으로 모든 사람의 죽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10절에서는 이 고난으로 예수님이 온전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이 절대자라고 해서 이러한 고난을 체험하지 않고 간단히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온전치 못하다는 의미인데, 이는 그 만큼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이 직접 고난에 참여하시고 그 부분까지 이해하심으로 온전한 구원자의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으로만 구원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인성을 가지고 오셔서 직접 고난을 받으심으로 신성과 인성에 의해 구원을 이루어 가신 것이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으로 인하여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즉 마귀를 없이 하시려 했다고 했는데, 이는 구약에서 제물로 쓰이는 양에게 죄를 전가하여 그것을 죽임으로 죄가 사하여 지는 원리와 같은 것으로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이 죽음을 주관하고 있는 사망의 세력인 마귀를 이기시게 된 것을 말합니다.
마귀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권세는 인류를 꼬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게 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창 2:17; 3:19; 롬 5:12) 한편 마귀를 '없이 하시며'의 헬라어 '카타르게세'는 '무효화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가 끼치는 영향력을 제해버리셨음을 시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마귀의 권세를 무효화시키신 방법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과 같이 반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속의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심으로 결국 이것으로 고통당하고 괴로움당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마귀를 없이 하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15절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잘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에 노예가 되어 평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은 평생을 살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는 인간을 지배하여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게 됩니다. 14절에서도 나왔듯이 이것이 바로 사망의 세력, 즉 마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바로 마귀가 가져다주는 생각이고 또한 이러한 생각은 인간을 절망적이고 낙심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불쌍히 보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공포의 노예가 되어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천국의 영생을 소유한 자임을 깨닫고 자유인이 되어 이 세상의 남은 생애를 주님의 뜻을 좇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점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즉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맛보셨으므로 우리는 또한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입니다.(17절)
여기서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이유를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범사라는 말은 모든 일이라는 말로서 모든 일에는 희노애락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고 이러한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등을 모두 느끼셨습니다. 예수님도 배고픔을 느끼셨고 육체의 한계로 인한 잠을 주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예로 요11장 33절에 나사로의 죽음으로 그 누이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은 ‘마음의 분노를 느끼셨다’는 말로 이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쥐고 있는 사단과 악의 세력에 대한 분노를 느끼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매우 측은히 여기셨다’는 말로 동정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35절에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심히 슬퍼하셨기 때문에 보이신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분노와 동정과 슬픔 등 인간의 심성을 모두 가지신 인간이셨음을 우리는 이 구절들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가나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예수님, 성전의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심성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신 이유가 바로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앞에 나오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구약의 대제사장은 그냥 하나님께서 제정해 놓으신 율법에 의해서만 모든 제사를 드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율법이 아닌 은혜에 의한 사랑으로 우리의 인류의 죄를 구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자비는 긍휼, 사랑을 의미하는데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을 의미하고, 충성했다는 것은 고난을 받더라도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6절에서는 이러한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셋째,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18절)
마지막으로 이러한 인간과 같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 받는 여러 가지 환란과 시험과 고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즉 우리의 중보자 되시고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께서 능히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시고 함께 도우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근거는 물론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시험과 고난을 경험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난에 대해서 몸소 아시고 이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으시고, 또한 이 시험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주신다는 것을 볼 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능히 도우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우리 옆에 예수님이 함께 계셔서 도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주님을 의지하여 극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 고난을 허락하시고 극복하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지라도 우리의 옆에서 우리를 능히 돕고 계시는 주님이 있음을 알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는 믿음이 성경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5장 3-4절에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오히려 우리에게 소망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고난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과 고난이 닥쳐올 때 이를 능히 도우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오히려 감사하며 이를 잘 극복하여 저 천국의 소망을 이루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첫 시간으로 ‘체휼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동정(체휼)하시고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유가 마귀를 없이 하시고,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우리가 시험받을 때 능히 도우시기 위함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평하지 마시고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또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항상 깨닫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 살아갈 동안 주님을 잘 섬기시고 주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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