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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어버이와 그 자녀 (고전 4: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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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버이와 그 자녀
고린도전서 4:14-17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4:15-16)

윌리암 F.  오그번(Willian F. Ogburn)이라고 하는 교수는 가정이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하면서  가정의 기능을 네 가지로 말합니다. 먼저는 경제적 기능입니다.  다 같이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또 하나는 교육적 기능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지 않습니까.  또 종교적 기능입니다.  종교를 통하여 가치관을 배우고, 믿음을 배우고, 경건한 생활을 배웁니다.  또 하나는 오락적 기능입니다.  가정에서 우리 오락을 얻어야 합니다,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즐거움을 찾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기능이 상실되었거나 상실되어가고 있다고 아주 면밀하게 비판 분석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경제적 기능을 공장과 사무실로 빼앗겼습니다.
이 경제적 기능이라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생산, 그 과정 속에 가정이라고 하는 유대가 점점 깊어지면서 하나 되어 가는데 이걸 그만 공장과 사무실로 빼앗겨버렸습니다. 
이제 가정은 완전히 소비 기관일 뿐 입니다.  생산기능은 없고 오로지 소비입니다.  '어떻게 쓸까?  어떻게 하면 더 쓸까?  남편의 것을 얼마나 빼앗아 쓸 수 있을까?  아내가 감추어 놓은 것을 내가 어떻게 빼앗을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떻게 용돈을 더 받을까?' 

이렇듯 가정의 생산적 기능은 공장에게 빼앗기고  오로지 가정은 소비기관으로 되어버렸습니다.
경제적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또 교육적 기능을 학교로 학원으로 빼앗겼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음식 만드는 것이나 농사하는 것이나 모든 것을 가정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학교에서 배웁니다.  교육은 학교나 학원에 위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종교적 기능도 상실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것은 완전히 가정에서 배워야 할 것인데 이것도 교회에다 맡겨버렸어요.  “교회에 가라" 그리고 끝입니다.  가정의 의미, 가정의 소중함은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오락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가정에서 즐겁고 행복한 모든 행복의 프로그램이 있어야 되요.  가정이 가장 행복한 오락기능을 발휘해야 되는데 이것도 극장과 운동장과 텔레비전과 컴퓨터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되고 보니까 가정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일찍 들어와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재미는 다 밖에서 보고 사니까요.  자, 이것이 가정을 파괴했고  인간을 파괴했고 또 인간성을 파괴해서 이 세상은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이 학자의 이론,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키워집니다.  또한 가정에서 배우고 가정에서 성숙합니다.  가정에서 인간이 되는 것이고 가정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마지막 남는 보람도 가정에 있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가끔 읽어봅니다.  읽어보면 맨 마지막 말에 참 가슴 뜨거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게 이런 자녀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맨 끝에 기도문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나 아버지는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그는 장군으로 나라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큰일을 많이 했지만은 생각하고 보니 별 일이 아니에요.  마지막 남는 보람은 가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이 훌륭하게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때 그리하여 내가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하게 하옵소서.' 
육체적으로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납니다.  정신적으로 부모로부터 배웁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아버지의 말씀과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라고 또한 인간이 됩니다. 

오늘 성경에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지만 아비는 많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 안에서 내가 너를 낳았음이니라. 
여기에 낳았다 '에겟네싸'라고 하는 이 헬라어의 원 뜻은‘Get now'라는 말에서 나옵니다. 
즉 ‘출생'이라는 말입니다.  이 출생이라는 말은 재미있는 말입니다.  우리말은 어머니가 낳는 것도 낳는 거요, 아버지가 낳는 것도 낳는 겁니다.  영어로는 구별이 됩니다.
어머니가 낳는 것은 ‘born'입니다.  아버지가 낳는 것은 ‘beget'입니다. 
오늘 말씀은 beget입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 어머니가 낳는 것 같은 그런 출생이 아니고, 생산적 의미, 생명적 기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나를 본받으라.”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되라.  그 부모의 그 자녀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본받을 만한 부모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학자인 데이비드 스튜어드라고 하는 분이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가르침으로써가 아니라 부모는 자신을 끊임없이 父母 化함으로써 자녀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가르치려고 하는 별도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만 제대로 되라는 것입니다.  부모만 되면 자녀는 되는 거예요. 그 부모 그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요새 아이들 가운데는 아버지를 향해서 이렇게 대드는 아이들도 있데요.  “난 아버지 때문에 창피해 못살겠어요, 당신의 아들 되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당신 때문에 나는 연애도 못하겠어요.  누구 아들이라고 그러면 난 장가도 못 간다니까요.” 

어떻습니까? 이게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그런 고로 생각해야 합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은 논리성은 있지만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는 것.  믿음과 존경으로 본을 따라서 배우게 됩니다. (제가 21년을 한결같이 눈이오나 비가 오나 새벽제단을 지켰는데 요즘 새벽기도에 잘나오지 못합니다. 대심방하고 나면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면 목에서 이상이 있습니다. 찬바람을 쓰지 않아야 낮에 심방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부교역자들에게 본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쓰러져도 나와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현대인은 부모는 텍스트가 아니고 참고서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득불 부모는 교본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교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를 복음으로 낳았으니,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부에 처할 줄도 알고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 많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 행복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사명에 만족했습니다.  이대로 관제와 같이 죽을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라.  하고 있는 일을 위하여 전심전력하고 그것을 즐겼습니다. 
믿음과 행복과 사랑과 소망에 본을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믿었습니다. 
이제 말합니다.  “나는 너를 믿노라, 내가 너를 낳았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해산의 수고를 거쳐서 지금은 본으로 교육을 합니다.  나를 본받는 자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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