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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데반을 닮고싶다(행 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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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을 닮고 싶다
사도행전 6장 8절 - 15절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으면서 “아! 나도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링컨을 읽으면서, 세종대왕을 읽으면서 그런 위인들을 닮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닮고 싶다고 해서 다 닮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위인전을 읽고 그 사람에 대해 연구하고 닮으려고 노력한다 해도 살다보면 전혀 그 사람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절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하시는 목사님들의 설교 테이프도 듣고 책도 읽으면서 이 분들은 어떻게 설교를 하시는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설교를 잘 할 수 있는지 연구합니다. 특별히 저는 옥한흠 목사님 설교를 좋아했는데요나도 그런 스타일로 설교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그게 잘 되지를 않습니다. 옥목사님 설교 스타일은 좀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주일 설교한 테이프를 구해서 들어봤더니 왠걸요...왜 그렇게 말은 빨리하는지....

여러분, 닮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닮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정말로 닮기 싫은 사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난 절대로 저 사람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데반을 닮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스데반이라는 인물을 살펴보면서 나도 과연 스데반처럼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분명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보면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모습이 우리와 다릅니까? 다른 것보다도 스데반의 죽을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이전에 살았던 삶도 분명히 본받을만한 신앙인의 모습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보통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행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스데반이 했던 이야기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죠. 누가복음 23장 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어떤 경우 우리는 일부러 흉내를 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개인기라는 것이 굉장히 유행하고 있습니다. 누구 한사람쯤은 흉내내야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연예인들도 보세요. 다른 사람 흉내 잘내는 사람들은 실력있다고 인정 받고 인기도 끕니다. 그렇습니다. 일부러 흉내 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까지 다른 사람을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이 예수님의 죽음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으로 죽어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는 열망으로 예수님의 삶을 흉내내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삶 자체가 더 이상 꾸밀 필요도 없이 예수님을 닮은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데반처럼 살고 싶다”는 얘기는 즉 예수님 처럼 살고 싶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라는 얘기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얘기입니까? 여러분들, 우리도 이런 얘기를 자신있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여러분께 “나를 본받아 사세요.”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면...그래서 나를 본받아 살게 되면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이 시간 우리는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 처럼 살았었는지...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3절)
사도행전 6장 3절 말씀을 보면 사도들이 자신들과 사역을 나누어 할 수 있는 집사들을 뽑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집사를 뽑는 기준이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이 바로 그 기준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 보면 참 칭찬할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일까요. 그런데 사실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조차도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칭찬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시리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가면 분명히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스데반도 보십시오. 스데반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을 미워해서 돌을 들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칭찬 받는 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읽은 개역 성경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라고 번역된 이 말씀이 표준 새번역에는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공동번역에는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다 것이 아니라 신망이 두텁다...즉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는 집사가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신망이 있는 사람일 것, 둘째는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사람일 것...이 얘기는 삶의 균형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이야기입니다. 가끔씩 우리는 삶에서 균형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신망이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들이 지탄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치 교회가 사기꾼의 집단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돈만 알고 교회 건물 키우는 데만 혈안이고 이기적이고.....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성도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이지 성도의 잘못된 삶 때문이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언행일치라는 말이 있죠. 그분의 삶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진 삶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눈은 언제나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었습니다. 영혼에 대한 문제도 얘기하셨지만 더불어 인간의 육신에 대해서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먹을 것을 주시고, 병든 사람을 고치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려내십니다. 얼마나 세상적이고 얼마나 육적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만 보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교회 안에서만 올바릅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칭찬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삶의 균형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균형잡힌 삶을 산 사람....성령과 은혜가 충만하며 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칭찬 받을만한 사람 바로 스데반의 모습이며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2. 얼굴이 천사와 같은 사람(15절)
사람에게 얼굴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분명히 잘생기고 못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은 외모가지고 먹고사는 사람이 많다보니까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진 듯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 성도들에게도 얼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스데반의 얼굴을 표현하여 말하기를 “천사와 같더라”고 합니다.

저는 가끔씩 예수님의 초상화나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분이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저 말고도 많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때 유행했던 그림이 있었죠. 왜 그 눈 밭에서 찍었다는 예수님 얼굴 사진요....그 그림에 대한 여러 재미있는 일들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도대체 왜 그 사진이 예수님의 얼굴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거 내가 예수님을 잘 못 믿는 것은 아닌다 심각한 고민에 빠졌더랍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쳐다보고 기도하고 쳐다보고....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답니다. 혹시 구원 못 받는 것은 아닌가...그런데 어쩌다가 보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얼굴로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 때 그분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답니다.  또 예수님을 덮었던 천이라는 것이 발견되어서 거기에 찍힌 얼굴 모양이 예수님의 얼굴이라는 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다보니까 스데반의 얼굴도 참 궁금합니다.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길래 천사와 같았다고 얘기할까...과연 그는 잘생겼었을까? 하긴 어떤 이는 스데반이 여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그렇다면 그녀는 얼마나 예뻤을까...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러한 천사와 같은 얼굴이라는 것이 외모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들도 분명히 아실 겁니다. 만약 정말로 천사와 같은 얼굴을 가진 이만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면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은...글쎄요 가능성이 있을까요?

여러분, 얼굴은 그 사람의 삶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얼굴을 그 사람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얼굴도 신경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어떤 얼굴이 천사와 같은 얼굴일까요? 항상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품고 있는 사람? 그렇지는 않겠죠. 우리 예수님도 울기도 하셨다지 않습니까. 슬플 때 진정으로 슬퍼할 줄 알고 기쁠 때 진정으로 기뻐해주는 사람...여러분, 그 표정이 얼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스데반이 설교하는 이유가 뭡니까? 설교를 듣는 이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는 사람(54절-59절)
마지막으로 삶이 아무리 좋았다 할지라도 죽을 때 잘 죽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았다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 추해진다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데반은 정말 잘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칭찬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앞에서도 성령 충만한 지혜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항상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살았으며 그래서 그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의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힘이 날 것 같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 가운데 이런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까? 난 내가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더라구요. 특별히 저는 집에만 가면 얼마나 구박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부모님께는 아직도 철없는 아들이고 아내나 아들들에게는 무심한 남편이요 아버지일 뿐입니다. 어디를 가나 스데반 처럼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가 않더라구요...

그런데 그처럼 잘 살아왔던 스데반이 눈앞에 돌을 들고 서 있는 군중들을 두고 있습니다. 한번 상상해 봅시다. 내 앞에 나를 죽이려는 무리들이 삥둘러 서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집니다. 갖은 욕을 해대면서 돌을 던집니다. 돌 하나 하나에 맞을 때마다 아프기는 얼마나 아팠을 것이며 두렵기는 얼마나 두렸웠을까....
이제 고통 중에 서서히 눈 앞이 흐려져갑니다. 흘러 들어온 피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고 이제 붉은 핏빛으로 보여지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봅니다. 피투성이된 얼굴로 죽어가면서 그들을 바라봅니다. 그때 과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옛날 전설에 고향에 보면 꼭 귀신은 입 옆으로 피를 흘리고 심하면 칼을 물고 나타납니다. 그 눈빛은 너무도 서늘하여 보는 사람을 두렵게 합니다. 여러분,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스데반의 모습을 보십시오. 마치 예수님의 죽음을 보는듯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처럼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죽어가는 겁니다. 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모습입니까?

나도 정말 스데반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좀채로 자신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스데반처럼 예수님 닮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자신있으십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스데반도 자기 힘만으로 할려고 했다면 못했을 겁니다. 스데반은 어디서 힘을 얻었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 를 이 한구절의 말씀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

우리 모두 스데반을 닮읍시다. 스데반처럼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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