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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본 받아 양육합시다 / 엡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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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 받아 양육합시다 / 엡 5:29

인간의 신체는 여러 가지 지체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머리의 활동으로써 모든 지체의 움직임을 통제하며 각 지체의 역할을 통해서 일을 이루어 나갑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지체를 소중히 여기며 지체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머리와 지체들로 비유하며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고 보호 한다고 합니다.

성도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간들이 자신의 육체를 소중히 여기고 보양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육하여 보호하기를'(에크트레페이 카이 달페이)이란 말은 '성숙하기까지 따뜻하게 감싼다'라는 의미로서(Wood)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몸을 정성을 다하여 가꾸며 보호하며 돌보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행하신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깊은 영적 차원으로의 성숙하여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성도들을 자신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육체를 강건하게 보전하며 보다 안락한 상태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속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도들을 자신의 지체처럼 여기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십니다. 인간이 손끝 발끝에 가해진 미미한 고통에 온 몸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성도들 개개인의 세미한 아픔에도 민감한 관심을 베푸시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여기시고 성도들을 각 지체의 부분으로 여기신다는 말씀 속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고통을 달게 받으셨던 구속의 사건은 주님이 자신의 육체보다도 인간들을 더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3). 그리고 몸소 실천을 통하여 이처럼 크고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심장이 파열하는 고통을 기꺼이 참으시고 모든 죄악 된 인간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 사랑이 자신의 몸보다도 인간들을 더 소중히 여기신 것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실로 주님은 자신께 속한 자들을 자신의 몸처럼 여기시고 자신의 몸보다도 더 사랑하시고 양육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양육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고 합니다.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비록 흠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을지라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무조건적인 사랑,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조건을 따집니다. 한 몸인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아내를 슬프게 하는 남편이 있다 합니다.

"여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하고 물으면 "나 바빠, 그런 것은 한가 할 때나 얘기해"하며 결혼기념일도 모르고 출근하는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부인이 "여보 돈이 없어요"라고 했을 때 "돈 갖다 준지가 엊그제인데 벌써 다 썼어? 쓸데없는데 돈 쓰지 말라고 했잖아!"하고 큰소리치는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회사에서 야단맞고 집에 와서 화풀이하는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인데도 "누구냐?" "어떤 관계냐?" 라고 꼬치꼬치 캐묻는 수사관 같은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온 종일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아이 보느라 파김치가 되어 누워 있으면 "여자가 하는 일이 뭐가 힘들다고 야단이야"하고 내 뱉는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어쩌다가 친정에 한번 다녀오면 "시집에는 일년 내내 가지 않는 여자가 친정에는 쥐뿔 나게 다닌다"고 톡 쏘는 말을 하는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무슨 말을 했다하면 "여자가 뭘 안다고 그래, 아무데나 나서지마"라며 깔보는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마땅한 외출복이 없어 옷 얘기를 하면 눈을 부라리며 벗고 사느냐, 내가 재벌 2세냐고 말하는 속 좁은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휴일이면 집안일을 거들어 주기는커녕 낮잠만 자거나 혼자서 나가버리며 뒷모습을 보이는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없는 돈에 정성껏 시장을 봐서 저녁상을 차려 놓았더니 밤늦게 들어와서 "저녁 먹었어"하는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툭하면 "내가 아니면 이런 노처녀를 누가 구제했겠어"라고 진담인지 농담인지 아리송하게 말하는 남편 아내를 슬프게 합니다.

  남편을 슬프게 하는 아내도 있다 합니다.

출근할 때마다 교통비와 식비를 합쳐 8천원을 선심 쓰듯 주면서 "제발 돈 아껴 써요"라고 말하는 아내 남편을 슬프게 합니다. 식탁에는 좀처럼 올라오지 않던 계란을 어느 날 자신의 얼굴 맛사지 용으로 올리는 아내 남편을 슬프게 합니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멋진 집이나 멋진 탈랜트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다가 힐끗 남편의 얼굴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내 남편을 슬프게 합니다. 시집식구 생일은 전혀 모르면서 친정 식구들 생일을 챙기지 못한다고 눈물을 글썽이는 아내 남편을 슬프게 합니다. 어느 날 드디어 승진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집에 달려와 "여보, 나 승진 했어" 하니까 "월급 얼마나 올랐어"라고 말하는 아내 남편을 슬프게 합니다. 밤늦게 일하고 들어 왔을 때 수고한다는 말은커녕 "쥐꼬리만큼 월급 주는 회사가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 하고 비웃는 듯 말하는 아내 남편을 슬프게 합니다. 함께 외출할 때 고급 옷가게의 진열장을 보면서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아내 남편을 슬프게 합니다. 부부 싸움할 때마다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어"라고 퍼붓는 아내 남편을 슬프게 합니다. 김치찌개 사먹지 않고, 라면으로 때우면서 근근이 모은 돈을 발견하고 이상한 눈빛으로 아래위를 흝어 보며 그 돈을 압수하는 아내 남편을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길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천사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이었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첫째 고민이었습니다. 둘째는 신분의 격차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합니다. 신분의 격차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배우고 못 배우고, 가난하고 부하고가 문제 안 됩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는데..... 그리고 세째로, 잘되고 못되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든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네째로, 어떻게 하면 그녀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것을 고민했습니다. 물론 연구도 했습니다. 주변의 의견도 구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을 하나 세 얻고 목수가 됩니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풍습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박한 생활 속에 엄청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과 부지런히 사귀었습니다. 마침내는 그 여인하고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 왔다라고 고백합니다. 비로소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습니다.(인터넷정보클럽)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 10:12) 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양육하십니다.


희생적인 사랑으로 양육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 5:2)고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주님이 희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해 주시니 교회가 거룩해 졌습니다. 교회가 영광스러워졌습니다. 흠이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희생적인 사랑의 결과요, 열매입니다. 그러기에 희생의 모습은 언제나 감동과 감화를 줍니다.

조류중 모성애가 가장 뜨거운 것은 펠리컨이라고 합니다. 펠리컨은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으면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 먹인다 합니다. 병에 걸려 죽어 가는 새끼에게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준다 합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인간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대신 피 흘린 펠리컨 같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모두 책임지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인간의 탐욕 교만 불신 증오 거짓을 모두 혼자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한 분입니다.

인간 삶에도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인이 다섯 살과 세 살 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기 때문에 안고, 업고, 공장으로 출근하여 공장 안에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부인은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두 아이들이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습니다. 철길에서 조약돌 치기도 하고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고 있을 때 기차가 달려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애들이 없다는 소리에 엄마가 뛰어나가 보니 철길에서 놀고 있고 있었습니다. 쏜살같이 달려가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 낸 순간 기차가 뛰어들어 엄마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두 형제는 고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어른이 된 후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우고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라고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몇 백원을 받으며 일했던 그것 보다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던 그것 보다 그 기찻길에서 놀고 있던 두 아이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찬송 작사자 하버갈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 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함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셨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양육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절정-예화뱅크)


불변적인 사랑으로 양육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

진정한 사랑은 변함없이 꾸준한 사랑입니다.

40여년전, 미국의 한 시립병원에 생후 6개월 된 한 아기가 버려졌습니다. 아기는 시각장애와 심한 뇌성마비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때 52세된 간호사 메이 렘케가 아기를 데려다 키웠습니다. “평생 동안 이 아기를 잘 보살피겠어요” 메이는 아기의 이름을 레슬레라고 지었습니다. 아기는 우유를 주어도 그것을 빨아먹을 힘이 없었습니다. 메이는 매일 아기의 볼에 입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단 한번도 미소를 지을 줄 몰랐습니다. 메이는 레슬레를 위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성경의 기적을 믿습니다. 기적을 베풀어 주소서” 레슬레는 ‘기도’와 ‘사랑’을 먹고 조금씩 변화됐습니다. 어느 날 밤, 메이는 은은한 피아노 반주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것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곡의 연주자는 놀랍게도 스물 한 살의 레슬레였습니다.

한 여인의 변치 않는 꾸준한 사랑과 기도가 잠든 영혼을 깨운 것입니다. (인터넷 정보클럽)

엘리자베스 여왕 때 쿠퍼(Dr. Thomas Cooper)라는 사람이 30,000 단어짜리 사전을 만들기 위해 8년 동안 수집해 놓은 자료와 노트를 그의 아내가 몽땅 불태워 버렸습니다. 쿠퍼는 밖에서 들어와 아내의 경솔한 짓을 알고는 화내지도 않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디나, 디나. 세상에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다니……” 하고는 다시 8년을 수고하여 자료를 수집해 사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때리거나 이혼하자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쿠퍼의 사랑은 변치 아니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렘 31:3).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양육하는 달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양육 하십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희생적인 사랑으로 불변적인 사랑으로 함께 하시며 양육하시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 양육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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