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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 32: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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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 32:13-32)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목회를 하면서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들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고난과 역경의 자리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교인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기도의 제단을 쌓고, 봉사하는 일에 항상 앞장서는 교인이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난에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볼 때면, 목회자로서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무거울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들을 위해 당연히 시간을 내어 기도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론 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저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 저 때문에, 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저분에게 고난을 주시고, 제게 저 분의 고난을 보게 하셨다면,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분의 고통과 고난을 거두어 주옵소서.” 이처럼 때론 저 자신이 회개의 기도를 드릴 때가 있을 만큼, 교인들의 고난을 보는 것은 제게 참으로 힘겹고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그 같은 어려움과 고통의 문제를 신앙의 힘으로 넉넉히 이기어 나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서 “한강에 서너 번 갔다가 왔다”고 고백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주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눈물과 한숨이 넘치는 고난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어디 이 분 뿐이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도 어찌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를 만났지만,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시고, 하나님만 의지하시고 묵묵히 신앙의 힘으로 믿음을 지키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을 보는 것이 목회자들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요, 감사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해서 모든 분들이 다 고난의 문제를 이처럼 잘 극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때론 원망하고 불평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고난의 문제 때문에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너무나 잘하고, 봉사를 너무나 열심히 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장애가 되어 힘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신앙이 약해지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모릅니다.

대개 이런 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원망과 불평이 섞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하고, 예수 잘 믿고, 봉사 열심히 하고, 기도 생활 잘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올바르게 살았고, 그렇게 노력하는 데 왜 복은커녕 이 같은 고난과 어려운 일이 생기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느냐?”하는 질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도 이 같은 질문을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해 보셨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같은 의문과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기”입니다. 욥기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느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정당한가?” 이 같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그는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욥1:1) 그가 이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하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증언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이처럼 흠과 티가 없고 순전한 욥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하나씩 찾아옵니다. 첫 번째로 직면한 고난은 그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과 모든 소유물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주체하기 힘든 고난의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1:21)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고난이 그를 찾아옵니다. 온 몸에 심한 피부병이 생기게 됩니다. 그 것을 본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하고 그를 떠나 버리고 맙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건강과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

욥은 바보처럼 그가 당면한 모든 고난에 대해 입술로 범죄 치 아니했습니다.(2:10)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 범죄 치 아니한 깨끗한 사람이요,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욥에게 그의 세 친구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세 친구들은 전통적인 신학의 입장에 따라서 욥의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첫째 인간의 죄에는 하나님의 징벌이 따른다. 둘째, 욥은 죄를 범했다. 그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셋째, 그러므로 욥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욥의 고난에 대한 세 친구들의 논리적인 설명이었습니다.

이 같은 친구들의 설명과 해석에 대해 욥은 아주 강하게 반발합니다.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지은 죄가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의 고난을 죄와 결부시켜 해석하는 친구들을 “돌팔이 의사들”이라고 비난하며, 그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그런 후 마침 내 그는, 폭풍우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욥의 고난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을 해 주시는 대신, 끊임없이 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는 물음으로 시작한 하나님의 질문은 욥기41장까지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질문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하나 열거해 나가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피조물 인간의 제한성과 무능함을 대비시켜 나가십니다.

폭풍우 속에서 이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욥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여러분, 그 같은 고백을 한 후, 욥이 처음으로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회개였습니다. 그의 죄를 인정하고 죄의 용서를 비는 회개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6) 친구들의 해석에 대해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지은 죄가 없다고 그렇게 강력하게 그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 사람이 지금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죄인임을, 그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통회자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처음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지금은 태도를 바꾸어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이처럼 그의 태도를 바꾸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해답의 실마리는 42:5절에 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이 고백에 의하면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그의 신앙은 “주께 대하여 귀로 듣는 단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그는 그의 신앙이 “눈으로 주를 보는 단계”로 자랐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고난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그의 신앙이 자라고, 믿음이 성장하고 진보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신앙이 진보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면서 욥은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이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였습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죄를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 후 그는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그 자신의 추악함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욥이 그처럼 그의 결백을 주장하는 데서 태도를 바꾸어 그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를 한 데는 그가 더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전에 비해 더 추악한 삶을 살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과 믿음의 진보를 통해 그 자신의 죄를 더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들음으로 이전에 보지 못하던 자신의 추악함을 보고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욥의 이 같은 고백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처음 제기했던 질문인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라는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 가운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는 질문 대신에, “왜 고난이 오는가?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과 목적은 무엇인가?”로 질문되어져야 합니다.

여하튼 욥은 주께 대하여 귀로 듣는 신앙의 단계에서 눈으로 주를 보는 신앙의 단계로 진보하면서 그 동안 착각하고 있던 잘못된 의인의식을 버리고, “죄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올바른 이름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에 대해 귀로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주를 보는 체험적인 신앙에로 믿음이 진보 할수록, 신앙의 경륜이 쌓여갈수록, 진리를 알고 깨달을수록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유사한 예를 사울에서 바울로, 핍박자에서 복음의 선포자로 변한 바울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회심을 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뛰어 든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은 A.D. 59년 그는 고전15:9에서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중의 지극히 작은 자라.” 쉽게 말하면 “너희들만 사도냐 나도 사도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사방으로 뛰어다니던 성정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엿보게 합니다.

그러던 그가 5년이 지난 AD 64년경에는 이렇게 자신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처음 자기를 “사도”로 소개한 것보다 훨씬 겸손해지고 낮아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의 사역을 마무리하기 직전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AD65년)

바울은 세월이 지나갈수록, 사역을 더 왕성하게 할수록, 신앙의 연수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알아갈수록 그가 더 큰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그 만큼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선교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봉사와 섬김을 게을리 하고, 기도생활을 소흘히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죄를 더 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봉사와 섬김을 게을리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기도 생활과 말씀 생활을 멀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 높은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이 지나고 신앙의 연수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의 신앙생활은 더 성숙해져 갔습니다. 더 아름다워져 갔습니다. 더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어 갔습니다. 그 스스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선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누구보다 힘차게 달려갈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온갖 역경 가운데서, 수 없이 매를 맞고 무시당하고 조롱당하고 멸시를 받아도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의인”이라 인정하고 그렇게 이름을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그가 그런데, 사도에서 성도로, 다시금 “죄인 중에 나는 괴수”라고 울부짖으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더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죄를 더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죄를 더 깊이, 더 많이, 더 넓게 깨달아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는 자신에게서 더 많은 죄를 찾아내었던 것입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한 직후, 사도 중의 지극히 작은 자라고 외치고 다닐 때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죄가 시간이 지날수록 발견되고 깨달아졌던 것입니다. 마치 어두운 곳에서 보이지 않던 누추한 모습이,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 완전히 드러나듯이, 피조물이요 무지하고 무능한 인생인 바울은 창조주시오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더 가까이 갈수록 더욱 명백하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죄악과 누추함을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견딜 수가 없어서 하나님과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욥과 바울의 예를 통해서 명확히 밝혀지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신앙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진리를 알아갈수록,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찾아오는 당연한 결과는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흠과 티가 없는 의인의식을 가질수록, 그렇게 주장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으며, 신앙의 진보를 이루기는커녕 퇴보를 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팔십 평생을 하나님만 섬기시고, 새벽 제단을 쌓아 오신 할머니 권사님이 대표 기도하시면서 목이 메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시골에서 일평생 성자처럼 목회의 길을 걸어오신 연로하신 목사님이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말 들으사 죄인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눈물을 흘리시며 목소리 높여 부르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저는 거꾸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목회의 경륜이 늘어날수록 왜 바울처럼, 야곱처럼, 그 권사님과 목사님처럼 “저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꾸만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들을수록 저는 왜 자꾸만 “죄인”이 아니라 “심판관”의 자리에 서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왜 자꾸만 남의 눈에 있는 티끌만 보이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데만 실력이 늘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왜 자꾸만 잘난 체 하고, 거룩한 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목회를 할수록 죄인에서 성도로, 성도에서 다시금 사도로 돌아가서 얼굴 표정으로, 말로, 행실로, 혹 제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내어 알게 모르게 여러분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면, 혹 그것 때문에 시험이 들었다면 여러분, 부족한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욥과 같이, 바울 같이 고백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는 연수가 늘어날수록, 목회의 연수가 늘어나고 사역의 분량이 많아질수록,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말씀을 듣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더 큰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목회하고 싶습니다. 성자처럼 목회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눈물 흘리며 울부짖으셨던 그 목사님처럼 살아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메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며,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 하나님의 거룩한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이 땅에 이루어갈 수 있는 거룩한 이름, 축복된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에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씨름 중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32:28)

여러분,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씨름하여 이겼습니다. 무지하고 무능한 인생이 전지하고 전능한 분과 겨루어 이겼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길 수 있으며, 어떻게 무능하고 무지한 자가 전지하고 전능한 분을 이길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기는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이 이겼고, 하나님이 졌음을 인정하는 의미로 그에게 “승리자”라고 하는 새 이름,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그에게 허락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무능하고 무지하고 피조물인 야곱이 전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 만물을 창조주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씨름을 잘 했기 때문입니까? 힘이 세었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가 씨름할 때 전략을 잘 세웠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환도 뼈가 부러질 만큼 떼를 썼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었던 비밀은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한 그의 고백 속에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이 그의 이름을 “야곱”으로 하나님께 소개한 것에는 단순히 자연인으로서의 그의 이름 두자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전 생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과거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그가 야곱이란 이름으로 행한 모든 과오를 자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그는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장자 권을 형으로부터 뺏기 위해 형을 속였습니다.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의 속임으로 형의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동생을 죽이기 위해 수 백 명의 군사를 끌고 동생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게 할 만큼 형 에서의 마음에 절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같은 그의 속임과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공동체가 무너졌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하나님, 저는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형을 속였습니다.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하나님, 저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해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부모, 자식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형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우리 형제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 씨족 공동체에 생체기를 내었습니다.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그의 고백”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대답을 듣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야곱인 것을 모르셨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그가 자행한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도록 촉구하시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축복하시기 위해, 그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시기 위해 그 같이 질문하신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었습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 저는 야곱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고백했습니다. 이 한 마디 고백이 하나님을 이기게 했습니다. 그가 지나온 죄악의 모든 발자취를 담고 있는 “야곱”이라고 하는 이름 대신, 거룩한 새 이름, “이스라엘”을 허락받게 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일생동안 그를 괴롭게 하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었습니다. 형과 화해 할 수 있었으며, 깨어졌던 가정이 회복될 수 있었고, 무너졌던 공동체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붙일 수 있는 이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이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봉사를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진리를 알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수많은 사역을 행하고 심지어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성자”라고 말해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소개할 수 있는 이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누가 의인입니까? 누가 차세대 리더입니까? 누가 한국 교회를 이끌 지도자입니까? 누가 개혁자 입니까? 누가 증인입니까? 누가 거룩한 사람입니까? 누가 심판관입니까? 도대체 누가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습니까?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같은 이름을 스스로 붙일 수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 같은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로지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오래전 성함만 들어도 다 알 수 있는 어떤 교단의 목사님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으로 바꾸었다가 말썽이 생기자 다시 본래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전의 욥처럼 우리 스스로 “의인”이라 이름 붙이며 소개하며 살아갑니다. 목회의 경륜이 쌓여가고 교회가 점차 성장하면 의인이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늘어나고 성경을 많이 알고, 남들보다 기도를 많이 하고, 남들보다 봉사를 잘 하고, 옳은 생각을 하고 옳은 말을 할수록 자신이 마치 “의인”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지도 않고 우리는 너무 자주 바벨탑을 쌓았던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우리의 이름을 스스로 짓고 “우리의 이름을 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이 같은 잘못과 착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어느 자리에 있던, 어떤 위치에 있던, 어떤 일을 하던, 어떤 말을 하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할 수 있는 이름은 “죄인” 밖에는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스스로 “죄인”으로 고백하면, 놀라운 축복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죄인”이라고 하는 이름 대신, 하나님이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지어주시는 거룩한 새 이름을 갖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크나큰 기대와 소망과 꿈을 가지고 자녀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듯,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설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과 꿈을 담은 거룩한 이름을 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신약성경 눅5장에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명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고백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 그 자신을 "죄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에게 새로운 이름, 축복된 이름, “사람 낚는 어부”를 허락하셨습니다.

잘못된 “의인의식”에서 벗어나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했던 욥은 “이전보다 더 형통하게 된 사람이요 진정 의인”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고백했던 바울은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킨 “최고의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승리자”를 의미하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면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새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으로 고백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새 이름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지어 주시겠습니까? 이름값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로 하는 모든 힘과 능력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높은뜻 숭의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에게 질문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제는 제대로 예수 한번 믿어보겠다고 작심하고 적게는 일년, 많게는 수십 년 다니던 교회와 직분을 떠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워진 높은뜻 숭의교회라고 하는 이름 아래 모여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한국교회를 걱정하며 갱신과 개혁을 위해 기도하고 힘을 집중하고 있는 여러분들과 저에게,
하나님의 밥상을 준비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이 시간 찾아오셔서 질문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대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물으시는 이 질문을 항상 듣게 하시고,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추악하고 더러운 죄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 된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영광보좌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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