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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용서하심과 같이....!/ 엡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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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용서하심과 같이....!
엡 4:32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참 살기가 어려워 졌지요! 경제 위기를 맞이한 이후에 좀처럼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정들이 해체되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육원에서 자라야 하는 어린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서로가 원치 않게 반목질시하고, 불신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한을 품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독버섯처럼 이 사회를 정복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본래는 이 설교 할 계획이 아니었는데 성령님께서 강권하시는 것을 거절 할 수 없어 오늘의 본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 하나 있는데 사람은 반드시 실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날의 잘못된 삶을 용서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절대로 실수 없는 삶을 살 것이란 보장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수를 되풀이하면서 한 평생을 마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인생들의 숙명입니다. 우리 본문을 다시 한번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래서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덕목 중에 하나인 용서에 대한 교훈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그러면 도대체 용서가 뭡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용서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문제를 덮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다고 가정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많이 힘드냐고 묻습니다. 그때 "아무렇지도 않아요"라고 대답한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부담이 되고 짐이 되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앙금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에게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 문제 때문에 압박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경우에 자기가 부딪친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해 버리면 그것이 용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둘째는 잊어버리는 것이 용서한 것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잊어버리는 것도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에 대해 다룬 책에 보면 대부분 잊어버리는 것이 용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상처를 잊어버리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쉽게 잊혀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말이 단순히 잊어버린다는 말이 아니라 "기억을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43:25절에 보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 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런 구절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셋째는 용서 할 감정이 생겨야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용서할 감정이 없는 채 말로만 용서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그것은 위선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르면 진정한 용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용서할 감정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를 말하고, 선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선언이 감정보도 훨씬 더 중요하고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용서하는 감정도 생기지 않는데 사랑하고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라는 생각은 사단이 화해하지 못하도록 막는 훼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 "일어나고 싶다"는 느낌이 강해서 일어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대부분이 아침에 이불 속에서 빠져 나오면서 좀더  잤으면 하는 마음들을 갖고 있을 줄 압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새벽에 일어나기가 싫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저의 의지의 결단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위선이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은 느낌과 정반대 되는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느낌과 감정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옳다면 저는 세수도 목욕도 안하고 살지 모릅니다. 여기 남편들 아침밥 얻어먹고 나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주부들은 새벽마다 일어나서 아침 밥 짓고 싶은 감정이 있어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는 그 얼마나 귀찮은 일들이 많습니까?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고 싶은 느낌이 있어서 나갑니까? 그래도 나가지 않습니까? 우리의 느낌과 감정을 억누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의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마음으로부터 용납해 주고 싶은 감정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형제를 용서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순종이요, 의지의 결단입니다.

2. 그러면 우리 주님의 용서하심을 생각해 봅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들 몇 개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자하게(be kind)" 둘째는 "불쌍히 여기며(tender hearted)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아주 친절하게, 아주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뜻인데 상대방의 인간적인 연약성을 깊이 이해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별 수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실수를 했겠지"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을 정말 불쌍히 여기는 태도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그런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다시 말씀드리면 "잘 몰라서 그러니 용서해 달라"는 이해하여 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용서란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죄 많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용납하며, 그의 실수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더 나은 관계로, 회복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용서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이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용서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루셨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직도 이웃을 쉽게 용서하는 일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도 우리가 주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값비싼 용서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목사님! 용서도 한 두 번이지 계속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합니까?" 사실 이것은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마18:21-25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묻기를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하면 좋겠습니까? 한 일곱 번쯤 하면 됩니까" 이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하시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용서는 한계가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빚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무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에 처자식까지 팔아서 빚을 갚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인은 그 종이 불쌍해서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잠시 후에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그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친구를 만나 당장 빚을 갖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계산했는데 1만 달란트는 약 172억 원쯤 되고 1백 데나리온은 약 5,000,000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기 친구를 용서하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받은 용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생명을 바쳐 얻어 낸 것입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께 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해 치르신 값비싼 대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용서의 방법입니다.

저는 이제 말씀의 결론을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드리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눅15:11-32) 탕자는 예수님 당시 유대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한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나마 분배받은  재산을 먼 나라에 가서 다 탕진하고 돼지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치욕이지만 아버지의 명예까지도 더럽히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어떻게 용서하였습니까?

첫째로, 조건 없이 용서했습니다.
아버지는 조건 없이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돼지 치다 돌아온 아들을 비웃지도 않고 야단 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품안에 안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죄로 더럽혀져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 용서해 주십니다. 그분의 용납은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할 때, 용서의 조건을 달기 쉽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조건 없이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용서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입으로 알리고 행동으로도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상대방을 용서했을 때 그 용서를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했다는 사실을 어떤 모습으로 보여 주었습니까? 아버지는 집을 향해 오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 종으로라도 써 주시면 좋겠다"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면서 때로는 한숨을 쉬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걸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아버지는 아들을 발견하자마자 달려갔습니다.

스펄젼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들이 한 걸음을 뗄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달려왔다." 이것이 용서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달려오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들은 무엇을 확인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정말 자신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돼지를 치면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던 아들이니 그에게서 얼마나 악취가 났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그런 것이 상관없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피부로 실감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용서의 감동이 전해지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상대방을 용서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셋째로, 이전의 죄를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동안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라고 역정 내지 않았습니다. 분배받은 재산을 어디에 다 썼느냐고 고함 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4)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워 주고 새 옷과 새 신발을 주고 송아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들의 과거를 문제삼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용서하기로 했으면 지나간 일은 문제삼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넷째로 죄인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온전한 부자(父子)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새 신발을 신기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새 옷을 입히는 것은 모두 아들로서의 당당한 권위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아버지와 더 가까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새로운 내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온전한 삶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용서는 회복까지 가는 것입니다. 아마 탕자는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많이 힘들어 졌습니다. 경제적인 압박감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이로 인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마음들이 강퍅해지고 서로간의 반목, 불신, 미움들이 우리를 향하여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사단의 마지막 때의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한 전략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때에 우리 대선의 성도들은 우리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배워서 형제들간에 서로 사랑하시고 서로 친절하게 하시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며, 용서의 기쁨을 누리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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