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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 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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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본 문 에베소서 2:1~10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다른 독특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주역에 근거한 운명론입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소위 “팔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논할 때 가장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다 팔자 소관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 팔자타령을 합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어째 내 팔자는 이리도 드세노” 그리고 남들의 인생을 부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 팔자가 늘어졌구먼” “그 사람 팔자 한번 좋구먼” 심지어 마당에 낮잠 자는 개보고도 한 말 합니다. “저놈의 개 팔자가 상팔자랑께”

주역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연, 월, 일, 시를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네 기둥이라 해서 사주라고 부릅니다. 각 주마다 천간과 지지 한 자씩 합하여 두 글자가 되고, 사주를 다 모으면 여덟 자가 됩니다. 그래서 여덟 八을 써서 팔자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운명은 사주를 따라 타고 나는데, 그 타고난 운명은 이 팔자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운명을 이 팔자로 풀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팔자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팔자를 고친다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이 재가를 하게 될 때 “팔자 고친다”는 표현을 씁니다. 뜻하지 않게 떼돈을 벌게 됐을 때 “팔자가 폈다”, “팔자 고쳤다”라는 표현도 씁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형편이 나아질 때 “사람 팔자 시간문제다”라는 말도 씁니다. 그래서 소위 용하다는 점쟁이들은 그 사람의 팔자를 정확히 예견하고 그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을 자기가 안내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는 이런 인생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주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고, 팔자에 따라 운수가 정해져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민족이 하도  오랫동안 이런 잘못된 인생관에 사로잡혀 살다보니 팔자라는 말은 운명 또는 운수라는 말과 같은 뜻의 보통명사가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에 서점에 가서 책을 뒤지다 보니 재미있는 제목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 믿고 팔자 고친 사람들”이란 책입니다. “5학년 3반 청개구리들”이라는 동화로 일거에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오른 최승환이라는 작가가 쓴 책입니다.

이 책에는 자기와 주위 사람들의 간증을 바탕으로 7사람의 글을 담고 있습니다. 남편의 바람기로 고생한 주부가 예수 믿고 바람났던 남편이 돌아온 이야기, 점쟁이로부터 거지 팔자로 판명난 사람이 큰 기업 회장이 된 이야기, 몇 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를 믿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 등 모두가 세상 말로 팔자 고친 이야기들입니다. 전도용으로 권해 볼만한 책이긴 합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인생에 복이 찾아와서 세상 말로 팔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예수 믿고 나타난 외형적인 변화일 뿐입니다. 예수 믿고 나타난 본질적인 변화는 따로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팔자 고친 이야기는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디로 놀라운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심령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이제 예수 믿고 영적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고유의 신학적 표현으로 그 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1. 그때에

본문 1-3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과거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특별히 1절을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마디로 영적으로 죽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 

창 2:17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뒤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에 죽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 후에도 수백 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실언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는 날 죽었습니다. 바로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비록 육체는 수백 년을 더 살았지만 그의 영은 그 순간 죽은 것입니다.

창 3:8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의 모든 대화가 끊겼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 하나님과의 단절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과의 분리, 하나님과의 단절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영적인 죽음입니다.

눅 15:24를 보면 의미심장한 표현이 나옵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라고 했습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해 그 아버지가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탕자가 아버지 품을 떠나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동안 탕자는 적어도 아버지께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죽은 자인 것입니다.

결국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된 것을 말하고, 하나님께 대해 죽은 것을 말합니다.

2) 영적으로 죽은 상태

우리가 흔히 시각장애자들은 시력이 죽었다고 합니다. 또한 청각 장애자들은 청력이 죽었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떠듭니다. 그 영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영이 죽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세상 풍속을 좇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이 세상 풍속을 좇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이 세상 풍조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중국 감숙성 난주에 가 보면 도시 한 복판에 황하가 흘러갑니다. 황하의 상류 부분이기 때문에 물살이 여간 빠른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물이 탁한지 자판기 커피색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탁류 속에도 물고기가 살고 있고, 그 물고기 크기가 여간 큰 것이 아니고, 그 물고기 요리가 또 진미랍니다. 그러나 그 물고기가 죽으면 배를 드러내고 물 위로 떠올라 겉잡을 수 없이 탁류에 휩쓸려 하류로 하류로 떠내려갑니다.

바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물질주의 흐름에 휩쓸립니다. 쾌락주의의 물살에 휩쓸립니다. 이기주의 탁류에 휘말립니다.

둘째,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른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분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고 그에 종노릇한다는 것입니다.

동해 바다에 가 보면 해가 지고 바다가 어둠에 잠기고 나면 오징어잡이 배들이 나타납니다. 한결같이 이 배들에는 수백 개의 전구를 달고 있습니다. 전구들이 일제히 불을 밝히면 그 불을 보고 오징어들이 몰려옵니다. 미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그물을 쳐놓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몰려온 오징어들을 낚아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오징어들이 그 불의 유혹에 이끌려 죽는 줄도 모르고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지를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유혹에 끌려 다닙니다. 그러다 죽는 줄도 모르고 따라 다닙니다.

셋째, 세상 풍속을 좇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우리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욕망에 따라 살아갑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들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먹고 싶어야 먹습니다. 자기가 자고 싶어야 잡니다. 자기를 위해서 약도 주고 꼭 필요한 먹거리를 줘도 막무가내입니다. 제 멋대로 입니다.

바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제 멋대로 입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좋은 길을 열어줘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그 영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삽니다. 그래서 세상 풍조에 휩쓸립니다. 사탄의 유혹에 대책 없이 끌려갑니다.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결국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원래 우리가 그렇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2. 이제는

본문 4-10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오늘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한 마디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영적 죽었었으나 이제는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기서 결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구원 받게 된 것은 결코 우리 노력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공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동안 결코 자기 힘으로 중력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중력의 힘이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죄의 힘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선이 로켓의 힘을 빌리면 지구의 중력장을 벗어나 저 우주로 향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저 보혈의 능력을 힘입으면 죄의 능력을 물리치고, 사탄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7절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 구원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됩니다. 1:20 말씀을 보면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능력으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다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삶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구원 받아 다시 영적 생명을 얻게 되는 과정을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함께 살리셨고

5절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우리의 영이 다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이 다시 살게 됩니다. 우리의 영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살게 된 것입니다.

둘째, 함께 일으키사

6절을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사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제자들을 만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게 됩니다. 적극적으로 기도하며 찬송하며 전도하며 봉사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드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셋째,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6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로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 장차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재림 뒤에 주님과 함께 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시제가 부정과거로 이미 되어진 일로 묘사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장차 되어질 일이지만 이미 우리가 이 땅에서도 부분적이나마 이미 천국을 경험하며 살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그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지라도 우리의 심령은 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 재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희락을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 우리는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심령 속에 하나님을 몰아내고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죄의 노예가 되어 내 욕망대로 내 멋대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죽었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께 대해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과 다시 교제를 시작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됐고, 이 땅에서도 저 하나니 나라를 맛보며 살게 됐습니다.

그래서 먼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찬양을 뜨겁게 부르며 살아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밖으로 다시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복된 삶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 주신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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