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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히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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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히 11:6)

서로의 좋아하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사랑하는데 필수조건입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잘 알면 부모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연인이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잘 알면 더욱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대로만 사랑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식성을 잘 아는 것은 부부 관계에 있어서 필수조건입니다.

‘아내를 기쁘게 해주는 남편의 조건’이라는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1. 아내의 일에 11이 간섭하지 않으며
2. 해주는 음식에 22가 없어야 하며
3. 얼굴과 몸매가 33 해야 되고
4. 아내가 내리는 결정에 44건건 참견하지 않으며 - - - - 생략
10. 경제력은 00(빵빵)해야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잘 아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우리가 믿고 구원받는 순간 하나님을 기쁘시게 살아야 할 명령을 받았습니다.

(찬양나팔 268) 나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후 기뻐하셨으며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심히 좋아 하셨습니다. 왜, 그리 좋아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존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아들을 낳으면 기뻐했습니다. 좋아했습니다. 왜, 입니까? 자신이 죽으면 제사 지내 줄 사람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광스럽고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동안 계속 일어나는 고민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내가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을 기쁘게 할까’ 술, 많은 재산, 많은 아내들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 헛되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봉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훌륭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단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인생들도 있습니다.
살전 4:1 “종말로 형제들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 어느 누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학식, 명예, 재물, 권세가 많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떻게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인지에 대하여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시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된 복, 지혜와 평강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은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것입니까?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닮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거룩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은 것을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나쁜 버릇까지 닮으면 할말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 대해 많이 오해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농담도 안 하고, 별로 웃지도 않고, 길을 가다가 돌을 차도 “주여!”, 밥 먹다가 돌을 씹어도 “주여!”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전화를 하면 깔리는 목소리로 “할렐루야!” 하면서 받으면 다 거룩,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까? 경건, 거룩은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겉으로 드러나는 바깥 모양이 아닙디다.

옥스포드 원어성경대전에 보면 ‘경건함은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경홀히 가볍게 섬겨서는 안됨’을 강조 합니다.
경건은 삶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삶을 예배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을 찾는 자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란? 하나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 삼으신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예배란? 상향식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배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했습니다.

예배란? 단순히 정해진 시간 안에 순서에 따라 참여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안에서 즐기며 사는 것입니다.
운전할 때도 예배입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도 예배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일정한 장소와 시간을 정해 놓고 모든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하는 사람은 주일성수합니다. 모든 예배시간을 잘 지킵니다. 즐거이 예물을 준비하여 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려면 예배를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를 감금하는 시간이 아니라 즐기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 .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 . .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하나님의 자녀다운, 하나님의 식구 다운, 성숙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면 많은 성도들이 거부를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산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에 속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롬8:8-9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지라도 육신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육신의 욕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 힘으로 맘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두려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정하실까?를 생각하며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에녹은 300년동안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요셉도 다윗도. . .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없이 살았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불살라 버리신 말씀도 있습니다.(레10:1-10)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습니다. 본래 향단에 불을 피울 때는 번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 향단에 옮겨서 분향해야 하는데 나답과 아비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법도대로 분향하지 아니한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진노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 사람은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입니다.
경건의 삶입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겼습니다.
눈가림 식이 아니라 경외심을 갖고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했습니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성경은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중요한 기본 요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1-3)

인간은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전능자로 창조하지 않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도록 창조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이라는 선물도 주셨습니다. 6일동안 일하고 7일째 쉬도록 계획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참 강한 것 같으면서도 참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쉬어야 합니다.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사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연약한 갈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본질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미지의 사건에 대하여 한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인간이 어떤 절대자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운명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한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입니다. 본성적으로 항상 남을 의지하고 교제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여야 하고 이웃과 교제하여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면서 그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요즘, 외모산업이 활발합니다. 성형수술. . .얼굴, 몸을 뜯어고칩니다. 그리고 그 외모를 의지할려는 성향이 많습니다. 돈만 있으면 미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입니다.

미국에 월터(Judd Walter)라는 사람이 여드름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하는 과정에서 엑스레이를 너무 과다하게 사용하는 실수로 얼굴이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흉터가 생긴 것입니다.
월터는 심한 우울증과 함께 열등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청년의 마음속에 새로운 신앙과 의지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최선으로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국에 가서 의료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는데, 10번이나 당선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일생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다보니 놀라운 일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시37편 4절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까?를 고민하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
그 믿음은 아브라함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떠남’ 이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창12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전혀 미지의 땅으로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믿고 의지하던 구석을 떠나야 하나님을 의지하는 ‘참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을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
그렇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곳 바로 그 곳으로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요구하셨습니까?
믿음의 시작은 ‘떠남’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유혹에서 떠나는 믿음.
아브라함이 왜 위대합니까?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만 믿고 떠남을 실천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관념적으로 아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창6:14 이하에 보면 산위에 방주를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 방주를 만든 후에 자식들과 동물의 암수 한 쌍씩을 방주로 들이라는 것입니다.

제임스 케네디가 지은 ‘명쾌하게 풀리는 성경 속의 미스테리’ 라는 책에서 노아의 방주의
‘크기는 각각 240마리의 양을 실을 수 있는 화물열차 522량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다시 말하면 엄청난 크기의 방주라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크기의 방주를 600세의 노인이 산 위에 예비한 것입니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7:5)”
노아는 이런 엄청난 일들을 그대로 준행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며칠전 기독교 케이블 TV에서 노아의 방주 드라마를 현장에서 보듯이 방영하는 것을 보면서 노아의 믿음을 눈으로 마음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본 부분은 노아가 방주를 다 짓고 동물의 암수 한 쌍씩 들여놓는 과정이었습니다.
총 17,600쌍(포유류 3500종, 조류 8600종, 파충류 양서류 5500종)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동물들을 돌봅니다. 위에서는 쏟아지는 쏘나기 소리, 동물들의 울음소리 . . . 캄캄한 방주 속에 횃불을 든 노아는 동물들을 돌아보느라 왔다 갔다 합니다.
그 곳에는 분명히 습기도 차고 심란한 하루 하루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비록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식언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믿기에 그는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조금도 심난해 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노아의 믿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 같으면 심난해 하고 불안 해 했을 것 같았습니다.
과연, 언제나 이 비기 그칠 것인지. . . 노아의 행동은 오직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묵묵히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물이 150일을 창일했다(창7:24)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킬려고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생애 전부를 다 희생했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에는 보상이 따릅니다.
보통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신앙을 매고 고상한 신앙으로 생각합니다. 지성인 일수록 ‘복받기 위해서 교회오냐?’이렇게 생각합니다.
복받기만을 위해서 신앙을 갖는 것은 기복신앙이지만 신앙에는 분명히 보상이 따릅니다.
영생과 부활이 없고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죽어서 받는 상만 옳은 것입니까? 살아있는 동안에 주시는 상도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믿지 않고 바라지 않는 것은 고상한 불신앙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보면 반드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우상 숭배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계명을 안 지키면 삼사대까지 그 죄값을 갚아 주고 지키면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를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보상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11:19에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했습니다.

막10:29-30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물질과 가정을 희생하면 금세와 내세에 크게 갚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눅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고 했습니다.

말3:10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고 지금도 그 축복을 체험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셔서 주님이 주시는 복과 상급을 이 땅에서도, 내세에서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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