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마 5:8, 시 24:3-4)

  • 잡초 잡초
  • 392
  • 0

첨부 1



Subject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마 5:8, 시 24:3-4)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8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편 24장 3절-4절) 

1.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에도 가고, 부흥집회도 참석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작정하고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금식기도도 합니다.
모두 하나님을 한번 만나 보고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구(求)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아마 믿음의 대상은 아닐 것입니다.
대부분 하나님을 보게 해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를 보면, 자기식대로 보여 달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식이 아니라, 자기식대로 보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은 그분 스스로가 계시해 주는 범위 안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靈)이기 때문에 육신의 방법대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제가 청년 때, 부흥회를 할 때 들었던 얘기입니다.
한때 우리 나라에서 부흥 강사로 널리 이름을 떨쳤던 모 목사님이 신학을 졸업하고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인해야 할텐데, 그래서 산에 올라가 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마침 보름달이 훤히 밝은 밤이었는데, 이 목사님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당신의 종으로 앞으로 나가서 일하려면 당신이 살아 계신 것을 내가 친히 경험해야 할 터이니, 내 이름을 한번만 불러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믿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꼭 한번만 내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모세에게도 나타날 때 모세야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면서 계속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온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기를 계속했으나, 아무런 응답 없이 동이 터 오려는데 그만 갑자기 재남아!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얼핏 비몽사몽간에 들은 소리였기에 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하나님 아버지,한번만 더 내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기도하는데 이번에 또 재남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람결에 들린 소리라서 그래도 미심 적어서 "하나님 아버지, 한번만 더 불러 주십시오" 했더니 이번에 다시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인 즉 산아래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꽥∼! 하는 돼지 소리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그렇게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욕심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위적인 방법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마치 바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聖靈)을 헬라어로 <퓨뉴마> '바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바람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폭풍이 불면 해일과 가로수가 뽑혀 나가는 것을 보듯이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대단하게 신앙생활 속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을 때로는 기적이라고 말하고, 때로는 놀라운 신비로운 일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만 보여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눈이나, 귀로나, 코로나 우리의 5관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라고 다 볼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더렵혀진 마음, 탐욕으로 차 있는 마음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기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은 청결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청결한 마음에 하나님은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청결한 마음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청결' 이란 말은 원문으로 <카타로스>라는 말입니다.
이 <카타로스>란 말은 '세탁하다' '순금' '알곡' 등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즉 세탁한 마음이라야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쭉정이가 아니고 알곡처럼 잘 익은 마음이라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불순물이 완전히 제거된 24K와 같은 순수한 마음이라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청결이란 말에 반대말이 '외식'과 '간음'이란 말입니다.
외식하는 마음, 간음하는 마음의 공통성이 무엇입니까?
두 마음을 품고 있는 마음입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는 마음이란 순수하지 못한 더러운 마음이란 뜻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그처럼 책망한 이유가 바로 저들이 외식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를 동률로 보았습니다.
모두 두 마음으로 행동하는 자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마음을 품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의(義)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이(利)를 추구한다면,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은 두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도 외식하는 마음으로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목사들도, 우리 장로님들도,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물질과 권세를 더 크게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장에 하나님 보다 돈이 좋고 하늘 나라보다 세상의 권세와 향락이 더 즐겁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3. 그러면, 청결한 마음은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마음이 깨끗하게 될 수 있는 길은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더러웠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줍니다. 
요일 1: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
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피만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십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명상이나 수양으로 깨끗해 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어느 정도 정화될지는 몰라도 근본적인 죄의 뿌리를 뽑아 낼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구제불능의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내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를 찾기 전에는 쉼이 없었나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히브리서 9:14절에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느뇨"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을 제일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양심도 타락한 양심이 되면 더러워진 양심이 됩니다.
그런 양심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양심이 이렇게 되면 제일 불쌍한 양심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앞세우면서도 자기의 뜻을 앞세우면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양심을 일컬어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구리장색 알렉산더'와 '후매내오' 같은 사람이 있다고 디모데전서 1:20 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양심이 더러워지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낳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양심이 죄로 무디어지면 죽은 양심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죽은 양심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마음이라야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죽었던 양심에 예수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살인 강도들도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새 사람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됨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이제 더 이상 두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을 죄인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죽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죽을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복음서에 나타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끌려왔던 그 여자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살아남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꼼짝없이 죽을 죄인입니다' 라고 그렇게 체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당시의 그 어떤 사람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벌써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이 여자와 같이 자신이 마땅히 죽을 죄인임을 깨달으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집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마음에 늘 울어도 눈물로 그 사랑을 다 갚을 길이 없어계명이나 율법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고, 사랑으로 몸으로 봉사하게 됩니다.
그런 봉사하는 마음속에 하나님은 자연히 보여지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볼 수 있게 되고, 또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때마다 순간마다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보고 계십니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보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내가 죽을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죽을 죄인이라고 지금 그렇게 느끼고 깨달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보여지게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확신이 내게 강하면 강할수록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 힘은 내 의지력이 아닙니다.
그 힘은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감화의 힘입니다.
전혀 나의 의지와는 다른 힘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보면서 살아가는 참 믿음의 삶입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