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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는 기댈 사람이 필요하다. [눅 15: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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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기댈 사람이 필요하다.
누가복음 15:21-32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에서 나무꾼이 크게 두 가지를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훔친 그녀의 옷이 그렇게 비쌀 줄은 몰랐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녀가 산 옷값의 할부 용지가 나무꾼의 집으로 오게 되리라는 것을 더더욱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무꾼은 옆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자는 선녀 마누라를 보면서 애꿎은 옥황상제만 죽도록 원망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나무꾼이 폭포수에서 확인했어야 했다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선녀의 옷을 훔칠 때에 똑바로 봐뒀어야 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선녀의 몸 사이즈가 엑스라지인 줄 그 누가 알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비좁은 방, 그녀가 들어온 후엔 두레박만 봐도 웬지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은 조건을 찾습니다.  외모를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조건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모를 보면서 평가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외모가 어떠하든, 내게 그럴만한 조건이 있느냐 없느냐를 상관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가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맑은 영혼을 사모해야 합니다.  특별히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 기댈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디엔가 기대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지친 내 영혼을 기대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힘든 영혼을 기대고 받아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를 한없이 찾아 헤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방정식으로 삶의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 삶의 문제를 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 힘든 영혼을 어디에 기댈 것인가? 고민하고 방황하는 인생이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사람인 우리들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 그분께 내 힘든 영혼을 기대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주 앞에서 위로 받고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한 주간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세상은 천천히 변합니다.  나무도 계절도 다 천천히 변합니다.  변화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갑자기 변합니다.  우리가 조직을 변화시킨다, 나라를 변화시킨다, 기관을 변화시킨다, 제단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힘이 듭니다.  습관을 변화시키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서히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에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기만 하면 습관이 변합니다.  행동이 변합니다.  내 삶에서 그렇게 고치기 힘든 것도 쉽게 변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오늘 주 앞에서 이 변화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오늘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이 변합니까?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영원한 질문은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너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의 삶에서 변화가 없는 인생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의 변화된 삶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알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습니다.  오늘 주님이 묻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느냐?  무엇이 들리느냐?”
주님의 이 물음 앞에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 하나님이 예비하신 불과 구름기둥이 보입니다.”  곤고한 내 영혼에, 힘들고 지친 내 영혼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불과 구름기둥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지친 영혼이 기댈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을 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이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변화,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그렇지만 또한 얼마나 힘든 이야기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내 삶에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할까?  언제 가능할까?  누구하고 가능할까?  무엇으로 가능할까?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저 그렇고 그런 분이 아닙니다.  내가 인정해서 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변화라는 것이 일어나도 좋고 안 일어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과 좌절과 죽음이 하나님의 변화의 영으로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그 심령에 변화가 나타나고 그 생명에 희망이 가득찬 삶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변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라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간단합니다.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만 변하면 딱딱하고 거칠었던 행동이 변합니다.  남에게 상처만 주던 말들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말로 변합니다.  세상 것은 참으로 변하기 힘들지만 마음은 갑자기 변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예배를 드리다가 은혜를 받아 여러분의 심령에 오순절에 임하셨던 강하고 급한 바람과 같은 지진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에 그들이 기도하다가 심령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진동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감화와 감동과 떨림이 오더란 말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의 변화를 위해서 학교도 생겨지고, 그 변화를 위해서 수많은 기관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설교를 하고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를 하지만 사람은 사람을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30년, 40년 살아보잖습니까?  마지막 임종을 하는 그 순간까지도 변하지 않고 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 자식이 변합니까?  변화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변화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식이 확실히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진전되고 깊어지고 믿어지면 우리 모두는 그 분을 위해서 뭔가를 바꾸고 싶어하는 가느다란 욕망과 희망이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깊은 사랑과 신뢰와 관계가 진전되는 것입니다.  관계가 회복되고 깊어지면 거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상대를 갑자기 기쁘게 해주고 싶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고 즐겁게 해주고 싶은 그런 욕망의 불꽃, 그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오늘 여러분 속에 이 아름다운 불꽃이 타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불꽃이 점화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말씀을 듣다가 주의 성령이 그 심령에 들어가면 갑자기 그 분을 즐겁게 해주고 싶고, 그 분 앞에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믿음의 욕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시작이 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서 이런 변화의 욕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인간의 변화에 대한 하나님의 대단한 공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련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아들은 끝없는 율법으로 맞서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 앞에서 율법의 ‘율’자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변화의 불꽃처럼 끝없이 사랑의 불꽃만 점화시킵니다.  그렇습니다.  내 영혼 속에 타는 사랑의 불꽃이 있어야 합니다.  내 영혼 속에 어떤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을 단번에 무장 해제시켜 버리는 그런 아름다운 욕망의 불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모든 분노를 그치고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사모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특별히 여러분, 세상의 모든 비난으로부터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비난은 일시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시각은 앞으로도 보이고 옆으로도 보이고 뒤로도 보이는 겁니다.  답답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좋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힘들게 보일 때도 있지만 아름답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난은 바뀝니다.  비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와 같은 겁니다.  비난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억수 같은 비난 속에서도 활기찬 자신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억수 같은 비난 속에서도 내게 시간마다 때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이렇게 당당하게 나는 내 자신을 흩트리지 않고 간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당당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비난이라고 하는 것은 습관이나 버릇과 같은 것입니다.  계속 비난합니다.  그것이 습관입니다.  버릇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사소한 습관이나 결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은혜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습관과 결점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습관입니다.  그 사람의 올바르지 못한 버릇일 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모든 비난으로부터 강하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힘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부끄러운 것이고, 미련한 것이고, 답답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은 나에게는 하나님의 한없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경험 있습니까?  어느 때인가 자기 속에 나타난 관대함에 내 스스로가 소스라친 경험을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마음이 넓어졌나?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경험 있습니까?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 관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가장 중심 되는 사상은 관대함입니다.  막 나가는 아들 앞에도, 철없는 아들 앞에도, 어리석은 아들 앞에도 아버지는 언제나 관대합니다.

관대함이란 제일 좋은 인품입니다.  관대함이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관대함이란 기댈 ‘등’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관대함이란 안길 ‘품’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관대함이란 다시 거할 수 있는 ‘거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관대함의 인품을 소유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너의 관대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관대함, 언어의 관대함, 표현의 관대함이 나를 모든 아픔과 노여움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시련이나 결점을 하루종일 물고 늘어지는 어리석음에서 자유 하십시오.  상대의 결점을 딱하고 잡으면 그것을 하루종일 물고 늘어지고 싶어하는 단정적인 언어로부터 자유 하십시오.
간혹 보면, 사람은 딱 잘라 말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똑똑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당신이 하는 것이 늘 그렇지.”  “당신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당신이 하는 일은 아무 도움도 안돼.”  “당신이란 사람은 웃겨”  그러나 여러분, 이런 단정적인 언어로부터 은혜를 받아 헤어나려고 발버둥을 쳐야 합니다.  딱 잘라 말하는 사람에게는 관대함이 없습니다.  맛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단정적인 말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때로는 저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던졌다 해도 미안하지만 여러분, 그런 단정적인 언어를 던지면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됩니다.  모욕적으로 들리게 됩니다.  인격적인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부정적이 되고 결론을 그렇게 내렸기 때문에 그런 낙인을 받았다고 생각한 그 사람은 꼬리표를 달게 되고 맙니다.  싸늘해지고 맙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의 패턴입니다.  결국은 슬픔과 분노와 엉망의 감정으로 혼돈과 흑암과 깊음으로 발버둥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혼돈이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수많은 혼란과 혼돈 가운데 발버둥치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신령한 하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십시오.  사물을 다른 각도로 보려는 내적인 열망에 내 속에 불을 붙이십시오.  내가 고통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는 약간의 겸손함이 있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변화가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으시겠습니까?  상대방에게 변화가 생기기를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겠습니까?  귀중한 인생을 자신을 더 사랑해주기를 바라면서 평생을 불태움 속에서 그렇게 날려버리고 말 것입니까?  형제가 바라는 완벽한 행동을 해줄 사람을 기다리면서 인생을 마감하고 말 것입니까?  내 인생에 좌절의 원인이 꼭 그분 때문에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문에” 만을 외치다가 그런 어그러진 사고의 종으로 인생을 마감하려고 하십니까?  내 속에 있는 분노와 실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정을 써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식구들이나 부부를 화풀이의 도구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리고 한다는 이야기가 “내가 당신에게 안 하면 누구한테 합니까?” 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화풀이 대상을 붙여주지 왜 아내와 자식을 붙여줍니까?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축복입니다.  우리 가족들을 내 화풀이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결국은 잠시 잠깐 자기 우월감에 잡힌 것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기댈 사람이 필요합니다.  인정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기댈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입니까?  엄마가 서 있을 때 기대서 치맛자락을 붙잡고 기대어 있는 아이의 모습,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뿐입니까?  청년들이 사랑에 빠져서 등을 맞대고 밤이 새도록 별을 바라보면서 있는 모습,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 모두는 누구나 다 기댈 곳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기댈 곳을 주지 않으니까 다 넘어지는 겁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능력을 힘입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표현해보십시오.  내 것만 고집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사람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무너지고 있습니까?  자기 기분에 죽고 사는 기분파들 때문에 무너지고있는 것입니다.  전부 기분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과 원칙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의 종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스운 것은 인간의 기분이라는 것, 이것이 제일 웃기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기분이 좋아보십시오.  만족, 사랑, 배려, 인심, 간도 빼주고 속옷도 벗어 주고 싶고….  기분만 좋으면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성품과 똑같은 조건인데도 불구하고 기분만 나쁘면 인색해지고 욕이 나오고 속상해지고 화를 냅니다.  이 기분이 자신을 전혀 다른 삶의 모습으로 만들어 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은 기분의 지배를 많이 받습니다.  그렇게 잘 하던 남편도 기분이 떠나보십시오?  그렇게 잘 하던 아내도 기분이 떠나보십시오?  어떻게 되는지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교인들과의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게 기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산다면 이것은 헐리우드식 사랑입니다.  요즘 월드컵 축구에서 헐리우드 액션이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헐리우드식 인간의 기분,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그것은 헐리우드의 작품 안에서나 통하는 것이지 인간 전체를 보고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은 기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고 있습니다.

‘네르소’라고 하는 작품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중해에서 수영을 하다가 친구의 목을 졸라 죽였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왔습니다.  너 왜 죽였느냐?  자기는 죽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네가 죽이지 않았냐?  자기는 죽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기분이 죽였다는 겁니다.  기분이 이런 겁니다.  기분을 잘 관리하십시오.  그러나 답답한 것은 자기 기분을 다른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모름지기 자기 기분은 자기가 책임져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기분까지 어떻게 남이 책임져 줍니까?  내 기분을 남에게 전가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의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에 대한 눈을 뜨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해집니다.  평화로워집니다.  풍요로워집니다.  이 풍요와 행복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의 기분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믿음이 없는 자가 취하는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없이 기분에 따라 어느 때나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모순된 삶을 사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천지창조의 법칙 속에 나무가 갑자기 자라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만은 심령의 변화를 통해 갑자기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 변화가 확실히 일어난 다음에 어떻게 단계적으로 습관화하고 훈련화 하는 것은 여러분의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인간은 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고 내가 아는 것보다 더 훨씬 더 아름다운 세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탕자는 이 기분에 포로가 된 사람입니다.  기분의 종이 된 사람입니다.  현대판 탕자, 기분파 현대인, 인간의 기분과 자유를 구별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아들, 이것이 우리의 모습들입니다.  어리석은 자아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기분대로 사는 것보다 더 귀한 길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내 기분에 따라 기대는 것보다 내가 더 영원히 기대야할 품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분, 물고기가 물 속에 있어야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들짐승은 들판에 있어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새들은 공중에 있어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하나님의 품에, 등에 기대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품과 등에서 벗어난 기분파의 자유들, 자유에 대한 착각의 탕자들, 집밖의 자유를 찾다 집안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 오늘 눈을 다시 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하고, 그 아버지의 등에 영원히 기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용기 있는 아들만이 아버지 앞에 섭니다.  정말 위대한 용기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는 용기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용기입니다.  자기가 지금 잘못 살고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길보다 더 좋은 삶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내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은 힘들지만 내 마음은 당장 변하지는 않지만 이 눈을 뜨는 용기, 잃어버린 아버지의 기댈 품을 찾을 수 있는 용기를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나됨을 알고 주 앞에 나와 내 죄를 자각하는 용기,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왜 주저하십니까?  사랑과 인애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두 팔을 활짝 펴시고 우리를 안아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피곤하고 힘들 때 우리가 기댈 등을 제공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주님만이 나의 희망임을 저는 압니다.  나는 내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내 가정의 희망임을 압니다.  그 분 안에 참된 행복과 만족과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을 주님께 기대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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