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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란 무엇인가(27)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 요 20: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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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란 무엇인가(27)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20:24-31

행복한 사람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은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지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믿어지지도 않고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고 천국이 소망되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어지고 천국이 소망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송명희 시인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온 몸으로 믿어지고 예수님이 온 몸으로 사랑하고 싶어지고 천국이 간절하게 소망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내 마음을 다하여 모든 것 다하여 그 무엇보다 더 그 누구보다 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기까지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이 믿어지지도 않고 사람이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믿어지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부모나 자식이 믿어지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목회자가 믿어지지도 않고 사랑하고 싶어지지도 않는 신자는 불행한 신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도 믿지 않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사람들도 믿지 않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가는 물론 교수들도 의사들도 종교인들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치도 기준도 법도 나라도 교회도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일 신약에 나타난 죄 중에 가장 크고 무서운 죄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의 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자기가 바리새인과 같은 파렴치한 죄인임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설교를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찔림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27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신약에 나타난 또 하나의 크고 무서운 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하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믿음은 행복인데 불신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의 풍조는 신약 시대에도 편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의 세대를 가리켜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여” 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질병에 걸린 자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간질병자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고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니다”(마17:15,16). 그때 예수님은 그 아이를 고쳐주시면서 그 시대의 불신앙을 책망했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마17:17,20). 간질병자 아버지의 불신앙은 물론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했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도마의 불신앙을 중심으로 신약 시대의 불신앙의 모습을 펴보겠습니다. 

첫째 도마는 예수님 자신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마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은 믿어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믿어주지 않을 때 부모는 불행을 느낍니다. 부모는 물론 자식도 불행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믿어주지 않을 때 선생님은 불행을 느낍니다. 선생님은 물론 학생들도 불행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주지 않을 때 하나님은 불행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사람들도 불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들을 살려주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찾아서 세상에 오셨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네가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말하느냐” 라고 비난하며 배척했습니다. “네가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느냐” 라고 비난하며 배척했습니다. “네가 귀신의 왕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귀신을 좇아낼 수 있느냐” 라고 비난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라고 모욕하고 비난하며 배척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모든 사람들의 불신과 비난과 배척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행이었고 사람들의 불행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물론 심지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큰 파도가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무서워하면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

한 번은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에 계시는데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함께 유대 베다니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11:8).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자포자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용기 있는 믿음의 고백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좌절과 불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난관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했다. 그의 태도는 용감스러워보였으나 신앙은 아니었다.” 물론 도마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고 솔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도마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불신앙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세에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며칠 전 집사님 한 분이 제 방에 들어와서 속이 상해서 죽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믿지 않는 것이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지난 주일 장로님들과 함께 병원 심방을 다녀오면서 극동 방송에서 나오는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잠시 들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부흥사 요나단 에드워즈를 인용하면서 교회를 십년 다닌다고 다 믿는 사람도 아니고 다 구원을 얻은 사람도 아니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망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하게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의심과 불신앙의 구름이 드리울 때가 있습니다. 기질적으로 도마처럼 의심이 많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 그럴 수도 있고, 사탄과 귀신의 공격을 받을 때 그럴 수도 있고, 죄를 지을 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믿음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를 항상 힘쓰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회개를 항상 힘쓰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말씀을 항상 묵상하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온유와 겸손을 유지하도록 항상 힘써야 합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든지 교만하면 믿음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이렇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17:5). 

둘째 도마는 천국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다음 아버지의 집인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리리에서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신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 아버지의 집에 대한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품을 지녔던 도마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14:5). 도마가 불신앙의 사람이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품을 지녔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척 하는 것보다는 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시기도 했고, 거지 나사로가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으로 올라간 이야기도 하셨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이야기도 하셨고, 달란트의 비유도 말씀하셨고 양과 염소가 하늘 영광의 보좌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했지만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와 땅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신자들도 천국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가인처럼 이 땅에 좋은 집을 짓고 멋지고 편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는데 오늘의 신자들은 하늘을 믿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고 땅에 대한 관심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의 축복과 사업의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건물을 너무 웅장하게 짓고 선교의 왕국을 너무 거대하게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눈과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하늘을 사모했던 것처럼, 사도 요한이 계시록의 한 장 한 장을 쓸 때 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도마는 물론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좇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16:9-11). 눅24:11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사실 십자가와 부활은 믿기에는 모순되고 불합리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온 후에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기이하고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24:40-4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기도 했고 일부러 생선을 잡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 마지막까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심의 사람 도마였습니다. 열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주일 저녁 모임에 도마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서 친구들을 만나러 갔는지 친척의 결혼식에 갔는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 날 저녁 일요일 저녁 주일 저녁 열 제자들이 함계 모여서 기도하는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열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도마의 반응은 단호한 불신앙이었습니다.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였습니다. 얼마나 불행하고 무서운 고백이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라는 고백은 한 사람의 운명을 지옥을 떨어지게 하는 무서운 고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마의 불신앙의 고백 속에는 믿고 싶어하는 솔직한 의심과 회의가 깃들여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 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불행하고 무서운 고백을 하는 도마에게 일 주일 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자기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만지게 해 주시므로 주님의 부활을 믿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마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고백이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그 이후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하는 일에 한 평생을 다 바치다가 순교의 피를 흘리므로 자기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고백을 들으시고 만족해 하시면서 이 말씀을 첨부했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사실 믿음은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행복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고 불행은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지니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인생을 지탱해 주는 세 가지 다리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반대로 인생을 망하게 하는 세 가지 다리는 불신과 미움과 절망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 집은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으로 지으신 하늘 집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소망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리고 나를 위해서 무덤에서 살아나신 부활을 믿고 고백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그 누구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불신과 미움과 절망의 세상을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바꾸어가며 사시는 행복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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