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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찾아야 할 것들 /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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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다시 찾아야 할 것들
본문 / 계2:1-7

  지난주일 에베소 교회가 처음에 가졌던 아름다운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처음 믿음에 대하여 아낌없이 칭찬하였습니다. 주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참고 견디며  부지런하며 정통 교리에 뿌리내린 실천이 있는 믿음을 가졌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노라”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칭찬받았던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4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가 중요합니다.
  처음에 아무리 잘했어도 그것이 나중에 잘못되면 소용이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는 믿음이 좋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실천과 행함이 주님의 칭찬을 받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환경이나 어려움 속에서 변하지 않는 믿음이 빛이 나는 것입니다. 변질되면 책망을 받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의 믿음이 변질되어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것은 처음 사랑 즉 첫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버린 처음 사랑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그것이 무엇이라고 짚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의 처음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 사도가 제 2차 선교 여행이 마무리 되어갈 무렵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에베소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 후 동역자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를 그곳에 머물게 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3차 전도 여행 때는 다시 들려 약 2년 동안을 그곳에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목회했던 에베소 교회가 계시록에서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처음 행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에베소 교회는 말씀에 대한 수용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① 말씀에 대한 수용성

  말씀에 대한 수용성이란 말씀을 받는 태도를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말씀을 받는 태도가 처음과 같이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는 말씀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행19장에 보면 주후 53년경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러 말씀을 전할 때 그 때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행 19:9-10)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19:9절에 보면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 하였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어떤 사본에 보면 매일 오전 11시에서부터 오후 4시까지 설교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다.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초창기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열심히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영적인 식욕이 왕성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은 말씀에 대한 수용력이 강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스폰지에 물이 배어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옛날 우리 나라 초기의 교회들도 그랬습니다.
  아주 달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가장 맛있다는 표현을 뭐라고 합니까? “꿀 맛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송이 꿀과 같다”고 했습니다. (시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여러분 말씀에 대한 수용성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군것질을 많이 하는 아이들은 하루 세끼 밥을 잘 먹지 않습니다. 과자나 사탕 등 입에 달콤한 것에 맛을 들이다 보면 밥맛이 날 리가 없습니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언제나 입에 딱 들어맞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입맛을 망쳐놓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 적인 이야기들..노래, 취미 생활등, tv, 등
  그런 것들에 맛을 들이다 보니 진짜 먹어야할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은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 바울은 딤후 4:3절에서 이미 예언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렇습니다.
  현대인은 귀에 듣기에 즐겁고 귀를 긁어주는 이야기를 좇습니다. 바른 교훈 즉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입이 고장났고 듣는 귀가 고장난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태도를 고쳐야 첫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야 첫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살전 2:13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주의 종이 강단에서 외치는 말이 사람의 말로 들리면 처음 사랑 처음믿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처음 믿음으로 회복되어 들는 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니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도의 간절성입니다.
 
  ② 기도의 간절성

  에베소 교회는 초창기에 기도의 간절성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행20:17-38절에 보면 바울이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에베소에 들릴 시간이 없음을 알고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멜레도라는 항구 도시로 오게하여 마지막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때 에베소 교회의 모든 장로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함께 무릎을 꿇고 다 크게 울며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행 20:36-37)

  큰 소리로 울며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간절한 기도가 사라졌다면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도가 신앙 생활하면서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통성 기도를 자주합니다.
  어떤이들은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통성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교회에 왔던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임실의 어떤 교회를 다닌 자매입니다. 그 교회가 우리교단인 장로교 합동측 교단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봉사할 교회도 합동측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우리교회에서 통성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교회를 20여년 다녔지만 통성 기도하는 것 처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까지 통성 기도하는 것 처음 봤다고 말하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문제는 기도는 묵상 기도든 통성 기도든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때로는 기도의 간절성이 떨어졌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이면 오히려 더 큰소리로 부르짖습니다. 그렇게 힘쓰다 보면 마음이 열리고 마음에서 간절함이 생기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성경은 부르짖으라고 말합니다.
  렘 33:3절에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두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눅22: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기도에 대하여 성경은 들으심을 얻었다고 증거합니다.

  히 5:7절에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될 예수님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였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애절한 기도, 눈물 나는 기도 애통하는 기도를 회복하여야 하지 않을 까요? 기도의 간절성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중국에서 온 한 조선족 교포 성도가 한국의 여러 교회들을 돌아보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 수 만명의 운집한 집회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고급 기도” 를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잘 다듬어진 미사어구로 매끈하게 기도하지만 그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여러분 고급기도 하려고 힘쓰지 마십시오.
  고급기도는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을 담아서 간절함으로 기도합시다. 기도의 간절성을 회복하여야 첫 믿음을 찾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목자와의 관계성입니다.

  ③ 목자와의 관계성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면서 어떻게 교인들을 대하고 목회했는지 솔직한 심정을 행 20:19-2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그는 에베소교회를 목화하는 동안 "겸손과 눈물로 온갖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다 전하여 가르쳤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눈치 안보고 전할 말 전하고 가르칠 것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행20:31절에서는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의 말에 대하여 에베소 장로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행 20:36-37절을 읽겠습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헤어지는 마당에서 바울이 이같이 설교하고 함께 통성 기도하고 나서 모든 장로들이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 하였다고 했습니다. 
  가슴 뭉클한 정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날 목사와 성도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단지 목사와 교인의 관계입니까? 아니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이 땅에 목사와 교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목사와 교인이 목자와 양으로 만날 때 올바른 관계입니다.
  이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교인을 못 믿고 교인이 목사를 못 믿으면서 어떻게 영적인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목사의 가슴에 들어있는 교인이 양입니다. 서로 가슴 뭉클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정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
  에베소 교회는 수고와 인내와 정통교리에 입각하고 동기가 아주 순수한 행위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행위도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고 40년이 흘러갔을 때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주님께 계시를 받는 중에 그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으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수용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기도의 간절성을 잃어 버렷습니다.
  목자와의 관계를 잃어 버렷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책망합니다. 이것을 다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의 수용성을 놓쳐버리면 신앙생활 끝장나는 것입니다. 기도의 간절 성을 놓쳐버리면 감각도 없고 체험도 없는 신앙생활이 됩니다. 목자와의 관계가 깨져버리면 그 영혼의 고독 속에서 혼자 고독하게 됩니다.
  처음 믿음으로 돌아갑시다. 어디서 잃었는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잃어버린 처음 것들을 다시 찾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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