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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 (2) / 마 5:4, 약 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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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예수님의 행복론 : 팔복 (2)
< 본 문 > 마5:4, 약4:9~10

성경에 보면 역설적인 말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런 말을 흔히 ‘패러독스’라고 하죠. 얼른 보면 말도 안 되는 궤변 같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오묘한 진리가 듬뿍 담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죽고자 하면 살리라,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 높아지려 하면 낮아지리라, 낮아지려 하면 높아지리라, ... 등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의 말씀도 그런 부류의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마5:3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 이 말씀도 얼른 듣기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게 복이라니 ... 그런데 잘 살펴보니까 그 안에 귀한 진리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팔복의 말씀을 보면 하나하나가 다 그런 식입니다. 오늘 살펴보는 팔복 두 번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5:4 다시 읽어 보시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과 관련된 약4:9 봐도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웃고 즐거워하면 복이 있다고 말하면 쉽게 이해가 될 텐데, 애통하면 복이 있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립니다. 웃으면 복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반면에 자꾸 울고 짜면 복이 나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을 잘 묵상하면 그 안에 풍성한 영적 진리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진리를 발견할 때 진정 복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귀한 진리를 발견하시고 주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1] ‘애통’이란 말의 의미

애통이란 말은 헬라어로 ‘펜테오’(πενθεω)인데, 본래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애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헬라어 단어 중에서 가장 강한 뉘앙스를 가지는 말입니다. 마치 심장을 꿰뚫는 듯, 뼈를 깎는 듯, 살을 에는 듯 아픈 슬픈 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 말로는 아마 ‘단장’이란 말이 가장 근접한 의미를 가지지 않나 생각됩니다. 단장(斷腸 - 끊을 斷, 창자 腸)이란 말이 생긴 유래가 있죠. 옛날 중국의 진나라 ‘환온’이 촉을 정벌하러 가다가 한 지역을 지나가는데, 한 병사가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잡아옵니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가 슬피 울며 백여 리를 뒤따라옵니다. 마침내 배에 올라타자마자 그만 죽고 맙니다. 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까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끼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슬픔을 가리켜 ‘단장의 슬픔’이라 부릅니다. 애통이란 말은 이처럼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을 의미합니다.

[2] 세상이 말하는 애통 vs.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

그렇다면 과연 본문 말씀이 무조건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애통과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애통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애통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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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세상이 말하는 애통 : 이런 애통은 복된 게 아닙니다. 이런 애통은 피해야 됩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을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i) 육신의 조건의 결핍으로 인한 애통 : 재물, 권세, 지위, 명예 등 세상 것들이 없어서 혹은 있다가 상실해서 생기는 슬픔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갖고 살기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지만 성경은 이런 애통은 피할 것을 권면합니다. 마6:31~32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라면 몰라도 믿는 성도는 세상 것으로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염려한다고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백해무익입니다.

ii) 죄책감에 의한 애통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타락했지만 일말의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혼자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자신에게 고통만 가져다 줄 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해서 살인합니다. 자기가 원해서 저지른 범죄지만 범죄 후에는 죄책감 때문에 몹시 괴로워합니다. 창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후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목을 매고 자살하게 됩니다.(마27:3~5) 죄는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용서받기 전에는 이처럼 인간을 괴롭게 합니다.

iii) 종교적인 고행 : 진리가 아닌 종교들 중에는 인간에게 고행을 강요하는 게 많습니다.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불교에서 장좌불와(長座不臥)라는 게 있죠. 등을 기대지도 않고
드러눕지도 않는 겁니다. 그렇게 심지어 1년 이상을 지내는 승려도 있습니다. 또 용맹정진
(勇猛精進)이라는 게 있죠. 잠을 자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습
니다.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도 잘못하면 고행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외식하는
유대인들이 금식하며 슬픈 얼굴, 흉한 얼굴을 했습니다.(마6:16) 마음을 찌어야 하는데 옷
을 찢으며 경건을 가장합니다.(욜2:13) 이런 것들도 아무 소용이 없죠. 오히려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이런 내용의 애통은 전혀 백해무익합니다. 육신에까지 악영향을 끼칩니다. 잠17:22 “ ...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 ” 더 나아가 목숨까지 끊게 만듭니다. 고후7:10
(하) “ ...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그러니까 이런 애통은 잘못하면 건강도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목숨도 잃어버립니다. 인생이 정말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

② 예수님이 말씀하는 애통 :

이것은 영적인 애통입니다. 육신의 조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임 모습을 보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요 예수님의 피로 구속된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거룩함이 없는 모습, 의로움이 없는 모습, 오히려 죄악과 허물, 탐욕만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는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자신의 추악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애통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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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인간 조건이나 환경만 가지고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행복을 얻지 못하고 얕은데 머물며 금세 즐거워하다가 금세 슬퍼하기를 반복합니다.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성적에 따라, 건강 상태에 따라, ... 이런 식으로는 절대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육체를 갖고 사는 존재이므로 이런 것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준에 머물면 항상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말 온전한 행복을 위해서는 영적인 애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애통은 어떤 것일까요?

i) 자신의 죄악에 대한 애통 :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기 안에 거룩이 없기에, 자기 안에 있는 죄악만 가득하기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육신적으로 보면 왕입니다. 아쉬울 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내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죄가 머리털보다 더 많다고 고백합니다.(시40:12) 그렇다고 그가 신앙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나름대로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면 늘 부족한 것 투성이라는 겁니다.

시편 51편 참회시를 봐도 그의 애통함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는 그가 밧세바를 범하고 죄악을 은폐하고자 남편 우리아를 살해한 후에 회개하고 쓴 겁니다. 그가 잘 했다는 게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으로 볼 때 절대 군주인 그가 그 정도의 일 눈 딱 감고 지나가면 감히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춰볼 줄 아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그의 위대함입니다.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시51:2~3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Broken Heart)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통회하는 마음, 그것이 상한 마음, 깨어진 마음인 것입니다.

베드로도 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해 보십시오. 뭐가 다릅니까? 인간성이나 잘못한 것은 둘 다 비슷합니다. 다만 가룟 유다는 죄책감으로 후회하다가 자살한 데 반해, 베드로는 애통해 하며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마27: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여기서 말하는 애통이 일반적인 죄책감이나 후회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죄책감이나 후회는 혼자서 괴로워하고 마는 겁니다. 반면에 애통은 회개하는 것인데, 자신의 죄악이나 허물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에게 나아가 사죄의 은총을 구하게 됩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turning)을 가리킵니다. 결국 하나님께로 돌이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마른 눈으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눈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이다.” 그렇습니다. 회개의 눈물, 애통함이 잇는 사람이 죄 사함의 은총을 체험하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함으로 보시는 게 아니라, 불의함을 애통해 하는 눈물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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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서 애통의 눈물은 하나님이 가장 아름답게 보시는 거룩한 다이아몬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다이아몬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ii) 이웃과 사회, 국가 민족, 세계 인류에 대한 애통 :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안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웃과 세상을 향해 흘러나갑니다. 애통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모습만 보고 애통해 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이웃과 세상을 보면서 동일한 애통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그런 우를 범하지만, 가족이나 이웃, 세상에 대해서도 외적인 조건에 따라 평가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안타까운 게 아닙니다. 지위가 낮아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불쌍한 게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죄악 가운데 있어서 불쌍한 것입니다. 죄악 중에 있다가 멸망할까봐, 예수님 알지 못해서 참 만족과 기쁨, 평안을 맛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까 안쓰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아프리카 흑인들이 불쌍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못 먹고 못 입고 병들고 그래서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문제들도 해결해 주면 좋죠. 그러나 정말 그들 중에 불쌍한 것은 육신적으로도 그렇게 살다가 죄로 인해 내세에도 영원히 멸망 받게 된다면 얼마나 마치만 일입니까? 오히려 그들 중에도 예수님을 알고 천국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이 넘쳐 우리보다 더 행복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신앙을 배워야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애통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든 것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먹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애통하며 눈물을 흘린 것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세 번 눈물을 흘리셨는데 다 인간의 죄악과 그로 인한 비참한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우신 것(눅19:41)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것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로 기도하신 것도 인간의 죄와 비참한 운명을 보신 까닭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훌륭한 신앙인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시대를 바라보면서 울었습니다. 예레미야(애5:15~22), 바울(롬9:1~3), 아브라함(창18: 소돔성 위한 기도), 모세(출32:30~32), 다니엘(단9:3,21), 느헤미야(느1:2~4) ...

그리고 이런 애통은 중보기도, 복음 전도, 선교의 열정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 나라와 민족의 모습은? 애통해야 됩니다. 무엇을 보고? 국민소득이 2만불이 안돼서도 아니고, 정치 혼란 때문도 아니고, ... 그 이전에 죄악상, 부패상, 멸망으로 흘러가는 모습 ... 예수님을 몰라 멸망해 가는 모습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애통해 해야 됩니다.

[3]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세상은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위로밖에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1:3)이십니다. 우리를 오나전히 위로해 주십니다. 위로한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인데 ‘파라’(곁에)라는 말과 ‘칼레오’(부르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우리 곁으로 불러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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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와 계신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완전하게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주십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애통함을 진정한 회개를 가져옵니다. 고후7:10(상)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 ” 그래서 온전한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의 감격과 신령한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시51:12)

영적 기쁨과 평안을 얻으면 육신도 강건해지고 생활도 형통함을 얻게 됩니다.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 ” 요삼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또한 애통하는 기도는 승리의 역사를 체험하게 합니다. 6.25 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이 밀고 내려왔습니다. 파죽지세로 밀려서 낙동강 아래 꼬리 부분만 남았습니다. 풍전등화이입니다. 그때 부산에 내려갔던 성도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목회자와 장로님들이 초량교회당에 모여 자신과 민족의 죄를 통회하면서 눈물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유엔군이 참전했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전사를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천상륙작전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사실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이런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애통하는 자에게 천국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곳은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애통함이 없는 곳입니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우리 눈물을 닦아 주시고, 넓은 품 안에 안아주실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어서 와라! 죄악과 슬픔이 가득한 세상에서 수고 많이 했다. 이제는 눈물을 거두고 늘 기뻐하며 영생하거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행복론을 기억하십시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 마음 속에 새기시고 남은 생애 늘 하나님의 위로로 기뻐하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차 들어갈 눈물 없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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