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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하고 더하는 삶 [요 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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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요한복음 10장 7-10절
제  목 : “더하고 더하는 삶” 

어떤 사람이
꿈에 그리던
호화 여객선을 타고 세계일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비싼 경비를 대느냐고
막상 배에서 먹을 음식은 부실하게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은
돈이 많은지 
식사 때마다 뷔페음식을 먹곤 했습니다.

모든 여행을 마치고
항구에서 내리는데 선장이 배웅하면서 인사를 건넵니다.
「좋은 여행이 되셨는지요?」
「네 좋은 여행이긴 한데 돈이 부족해서 음식이 변변치 않아 배가 고팠습니다.」

이때 선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가 고프다니요?
뷔페식당에 음식이 많이 준비되었는데요!
배 삯에 음식 요금이 포함된 것을 몰랐군요!」

유감 되게
오늘날도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과
어리석은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요 7:37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렇다면 성도는 어때야 됩니까?
주님께서 「주시마」약속하신 삶을 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비결을 소개합니다.

1) 목자의 만남

인생은 처음부터 만남의 연속입니다.
우연적 만남도 있고 필연적 만남도 있습니다.
상대적 만남도 있고 절대적 만남도 있습니다.
좋은 만남도 있고 나쁜 만남도 있습니다.
과연 내게 있어서 어떤 만남이 있었느냐? 는 중요합니다.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고
빈곤과 풍성이 결정됩니다.

이 만남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 생선 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만지기만 하면 비린내가 나듯이
만나면 서로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만남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만남은 오래 갈수록 더욱 부패한 냄새를 풍깁니다.

☞ 꽃과 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꽃은 어떻습니까?
만나면 향기가 납니다만,
곧 시들 때면 향기도 그쳐집니다.
만나서 좋은 것 같지만,
만날수록 시큰둥해지는 만남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 손수건 만남이 있습니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힘들 때 땀을 닦아주는 등,
함께하는 만남을 가리킵니다.

부부의 만남
목자와 성도의 만남이 여기에 해당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만남은 아름다운 삶을 낳고
귀한 만남은 귀한 인생을 만드는데
인생 최대 최고의 만남은 주님과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풍성해지기 위해선 「생명」이 공급되어야 되고,
이 생명은 예수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작은 복음이라고 불렀던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목자로 만나는 일은

① 생명의 만남이 됩니다.
나인성의 과부 아들은 어머니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자 그 아들은 더 이상의 희망이 될 수 없기에 성밖에다 장례 치르고자 했습니다.
마친 성안으로 들어오시던 주님은 그 청년의 관에 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청년은 살아났고
과부는 잃어버린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또 죽어야 할 육체의 생명입니다.
주님이 주신고자 하셨던 생명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생입니다.

  요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우리에게는 이미 이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② 고통을 이기는 능력의 만남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질고를 아시고 체질을 아시기에
상한 갈대 같이 꺾어지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인생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③ 고독을 이기는 위로의 만남이 됩니다.

  시 68:5-6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④ 병든 몸, 벌레 먹은 삶이 치료되는 만남이 됩니다.

수가성의 여인을 기억합니까?
남편 5명이 있었지만,
실제 남편은 없었던 한 많은 여인입니다.
우물가에 물 길러 갔던 일조차 회피했던 여인이지만,
주님을 만난 이후로
새 힘과 새 환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만남은

◈ 인격적 만남이 되어야 되고,
◈ 사실적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즉, 내 아버지, 어머니의 만남이 내 만남이 될 수 없으며,
예수님을 만남 감격의 사건이 없었다면 아직은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예수님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 행복자가 되었습니다.
◈ 자족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 결국 죽음이 두렵지 않고 천국을 침노하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목자가 되심을 확실히 해주는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예언을 따라 오셨습니다.
즉 합법적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유대지파 출신,
베들레헴 탄생,
동정녀 탄생,

◉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예수님께서 목자가 되심은 창세기부터 시작되어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까지 증거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과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함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풍성치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 문으로 들어오며 나오며

①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지 못했던 이유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마침내 큰 물고기를 153마리나 잡을 수 있었습니다.

② 머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들어오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
생명에 있어서는 목자이지만,
삶에 있어서는 문 됩니다.
  양식의 문이요
  생수의 문이요
  행복의 문이요
  풍성함의 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일에 너무 매진합니다.
너무 안주하고 피곤하게 살고 있습니다.
너무 탐욕에 붙잡혀 살고 있습니다.
결국 바라는 것은 많고
  수고하는 것도 많지만,
  누리는 것은 없게 되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 조각가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동상에는 「지옥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답니다.
이는 단테의 신국 「지옥편」에 나오는 얘기를 조각화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상의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닌 지옥문 앞에서 생각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는 뜻입니다.

지옥문 앞에서는
오직 「후회」뿐입니다.

예수님 만나셨습니까?
이 만남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믿는 년수와 직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났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젠 그 안에 머물고 있어야 합니다.
단회적 만남은 곤란합니다.
주님은 1회용이 아닌 영구용이십니다.


3) 예배의 가치

만나고 머물 수 있는 방편이 있습니다.

① 예배입니다.
삶이 있고 인격이 있는 예배자가 되어 보십시오.
삶이란 공의와 정의와 인애를 말합니다.
인격이란 진실을 말합니다.
이 때 주님은 찾아 주십니다.

그리고

② 예배 지경을 넓히십시오.
이번 중국에서 느낀 것은 몇 개월보다 더 잘살고 나아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좋은 승용차
모피 코트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 좌석에 「전구통신」이라는 통신회사의 선전문구가 있었습니다.
성공적 선택, 신분적 상승이랍니다.
성공한 자로써
혹은 신분을 스스로 높이기 위해서 남자든 여자든 가꾸고 투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난 예배자로써
주님 안의 풍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꾸고 투자해야 할까요?
나 편하고
나 기뻐하는 일보다는
주님 기뻐하시는 예배자 되어
예배의 지경을 넓힐 때 풍성한 은혜가 됩니다.

야곱이 베델을 향해서 올라갈 때 하나님은 예배자인 야곱의 가문을 크게 하셔서 그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배자가 되어야 삽니다.
성도는 예배자로 살 때 풍성해 집니다.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함이라”

명심하십시오.
세상 사람과는 다른 목적과 원리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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