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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끗한 교회 ( 대하 34:14-21, 막 11:1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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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교회
( 대하 34:14-21, 막 11:15-18 )
 
브라질 단기 선교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멀고 힘든 길이지만 모두가 기도해 주시는 덕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의료 선교도, 이미용 선교도 효과적이었고 많은 열매가 있을 줄을 믿습니다. 주성염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하여 한인 목회를 하면서 원주민 선교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절한 선교정책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브라질의 공용어인 포르투갈어와 영어와 한국말을 다 잘해서 아주 효율적인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도 우리 연동교회의 교우들을 하나님이 보내시고 우리가 갔을 때에 반갑게 맞아 주시고 환대를 받았습니다. 특히 강성극집사님께서 이민자로서 성공적으로 생활하시고 계셨습니다. 김영철집사님도 아주 사업에 성공하여 잘 지내고 계십니다. 우리 일행을 그 집에까지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달라고 하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선교 일정을 마치고 이과수폭포에 가 보았습니다.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나이아가라폭포에 가 본적이 있습니다만 정말 그들이 말하는대로 불쌍한 나이아가라입니다. 우리가 간 날은 아주 더운 날이었지만 더운 것이 기억이 되지 않을만큼 그 광경이 머리에 꽉 차 있습니다. 이 폭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세 나라의 국경에 인접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여러번 지도가 바뀌다가 파라과이의 것이었지만 브라질과의 전쟁에 패하여 브라질의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이나 파라과이는 자기의 것이었다가 주인이 바뀌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볼 때는 누구의 것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로 말하면 주인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폭포의 주인이셨습니다. 세계인이 공유하고 함께 즐기고 관리할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도 사람이 수없이 지나가고,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인인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고 깨끗하심처럼 깨끗해야합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원망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갈등 없는 공동체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회학자 스캇펙은 갈등 없는 공동체는 ‘유사 공동체’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공동체란 갈등이 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해 나갑니다. 초대교회는 갈등 때문에 성장한 교회입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초보자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갈등은 교회의 성장의 요인이었습니다. 갈등을 해결하면 성장했습니다. 갈등은 해결하면 더 이상 갈등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봉헌 때문에, 구제 때문에, 할례 때문에, 지역 때문에 갈등이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성장의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화해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기만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신문사나 전화국은 소식을 받아 전해 주는 곳이지만 교회는 결코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단순히 그 말씀 때문에 몰려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의 갑남을녀가 모여 전혀 새로운 사회적 완전체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며 역사에 의미를 세우는 일입니다. 갈등이 있고, 불결하고, 문제가 있는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해야 할 일은 교회는 이런 문제를 깨끗케 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깨끗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공히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교회는 신비로우면서도 늘 혼란이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를 겸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실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는 공생애 초기에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으로 나와 있고, 그리고 복음서는 공생애 말기에 다시 깨끗케 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두번의 성전 숙정의 사건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이유를 보며 성경을 통하여 우리 교회도 깨끗케 됨을 배워 깨끗한 교회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우리 교회가 깨끗케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깨끗하게 하신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첫째, 상업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성전 내의 상업주의, 물질주의는 주님이 채찍을 드신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까지도 상업주의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장사꾼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성전에 드릴 제물이 성전에서 팔렸습니다. 제사장들이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았습니다. 이런 당시의 성전을 예수님은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최근에도 상업주의 논리가 교회를 지배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큰 건물과 화려한 장식과 교인의 수가 교회의 판단 기준이 되었습니다. 시장의 논리라고 말하는 자본주의의 법칙이 교회까지도 지배합니다. 자본주의는 다윈이즘을 기초로 하는 정글법칙입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적자생존의 법칙이 교회에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전을 가만히 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에 강도들이 득실거린다는 말입니다. 강도는 힘으로 돈과 목숨을 빼앗는 사람입니다. 힘으로 돈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빼앗는 곳이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내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덕을 보겠다고 교회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항상 내가 손해보고 교회가 덕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도 우리가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43에는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가지고 높은 자리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함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그 때에 사마리아의 시몬이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8:20에는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지금도 그런 죄, 죄인이 있습니다.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으로 교회를 꾸려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으로 은혜를 조작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때 미국의 텔레비전 선교를 이끌어가던 짐 베이커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PTL이라는 엄청난 그룹을 거느린 PTL 왕국의 총수였습니다. 수억불에 해당되는 재산을 가지고 크리스천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사기협의로 구속되어 45년형을 받고 복역중입니다. PTL이란 “Praise the Lord” 즉 “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리더십의 그림자”란 책에 보면 이 분은 리더십의 그림자인 어두운 부분을 극복하지 못한 예로 나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지는 어릴 때의 열등의식과 자신의 왜소함 등을 엉뚱한 방향으로 해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인 ‘나는 잘못 살았다’(I was Wrong)이란 책에서 자신이 번영의 신인 금송아지를 숭배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금송아지에게 우리를 인도하라고 하는 광야의 실패는 지금도 교회에 잔재하고 있는 교회의 실패 요인입니다. 면죄부도 상업주의의 한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로마 교회는 성베드로 성당이라는 엄청난 대작을 도모하였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을 지을만한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면죄부를 팔아서 성당 건축의 재원을 마련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에 앞장선 신부 테젤(Tezel)이 면죄부를 팔러 갔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면죄부를 사면 지난 죄를 다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테젤은 “하나를 더 사면 앞으로 지을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테젤이 면죄부를 팔고 로마로 돌아오다가 강도를 만나 돈을 다 털렸습니다. 테젤은 이 돈이 면죄부를 판 돈이라고 하였지만 강도는 그 손을 다 털어갔습니다. “면죄부를 판 돈을 훔쳐가면 지옥의 밑창에 들어간다”하고 테젤이 말하자 강도는 면죄부 두 장을 보이며 “앞으로 지을 죄도 면죄 맏는다고 그러지 않았소”하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런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의 산물이 성베드로 성당입니다. 이런 상업주의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분주함은 물질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도 교회도 분주함은 이제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분주함의 저변에는 물질이라는 맘몬의 신이 있습니다. 물질만능을 반영하는 돈버는 책이 홍수를 이룹니다. “돈버는 법을 한 수 가르쳐 주마”라고 사람들을 꼬입니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어제 뉴스에는 유럽에도 로또 열풍으로 사람들이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테레사수녀가 한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이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참으로 빈곤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물질주의와 상업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둘째, 교권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권리로 성전을 장사하는 자리로 빌려주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의 권리로 이용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타락하고 더러워지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마귀를 보세요. 천하 만국을 다 보이며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니 절하라”고 합니다. 천하 만국이 하나님의 것이며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에게 주인 아닌 마귀가 보이며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처럼 위장하고 이용하는 것은 마귀의 짓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교권주의에 빠지게 되면 마귀의 모습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당시 종교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제사장의 직은 세습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일하고 권력 행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성직자가 안일해지고 권력 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타락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직자의 안일과 권력 행사 그 자체가 타락입니다. 또 여기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 맛에서 헤어나기 힘들다고 합니다.

구약의 종교개혁이 요시야시대에 일어납니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성전을 깨끗케 하고 그 후로는 성전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요시야 왕의 성전숙정으로 성전에서 쓰레기 밑에 쳐박혀 있는 성경 두루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힐기야 대제사장이 무얼했단 말입니까? 힐기야는 안일한 권력형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대하여 아무 책임감이 없고 자신의 세속적 권리만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속적 권력에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교회의 힘을 세속적 힘과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의 힘은 거룩한 힘입니다. 거룩한 힘은 구별된 힘인 것입니다. 신령하고 거룩한 힘은 세상을 지배하고 야합하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힘입니다. 예수님도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29에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은 세상을 세속적으로 지배하려는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가지고 세속적 명예나 권력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힘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힘보다 훨씬 더 강해야 하고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가 힘의 상징이 되면 교회가 부패하였습니다.

중세의 교회는 정말 힘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였습니다. 교회의 힘이 가장 강할 때가 교황 이노센트 3세 때일 것입니다. 그는 1198년부터 1216년까지 교황으로 재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황제를 임명했습니다. 또 영국의 존 왕이 교황청이 임명한 켄터베리 대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4차 십자군을 선포하였습니다. 결국 존 왕이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전체가 교황청의 봉토가 되었고 매년 1천 마르크의 봉토세를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교회의 권력이 결국 종교개혁의 불을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가장 어두운 시대라고 합니다. 이 때는 성직자가 가장 부유한 계급이었습니다. 수도원이 가장 재산을 많이 거느린 기관이었습니다. 돈을 주고 성직을 사는 성직 매매가 성행하였습니다.

최근 한국 교회의 화두는 기독교 정당 창당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직자 가운데도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정치는 성직자의 몫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직자가 현실 정치에서 잘못되면 교회에 직접적 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당이란 어디까지나 정치적 차원에서 구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적 차원에서 정당이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와 같은 진흙탕에서는 성경적 원리와 신앙적 양심을 지켜가면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교회가 정당을 창당할 것이 아니라 기독 의원들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여 정치가 교회를 이롭게 하고 선교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가짜 박사학위 소동입니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이 문제가 고개를 드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정부의 부패방지위원회는 우리 나라의 가짜 박사학위를 뿌리뽑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당자 가운데는 목사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저도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걸 꼭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면 불편할 때가 많아요. 누가 뭘 물어보면 멋지게 대답해도 박사니까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하면서 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르면 “박사가 그것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사가 인정받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박사학위 없으면서 실력 있는 것이 더 훌륭한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들이 이런 욕심을 가지는데는 성도들의 잘못도 있다고 봅니다. 자기 교회의 목사가 가짜라도 박사학위 하나쯤은 있는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조리한 필요와 충족의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부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교권의 침해라고 봅니다. 이런 데서부터 우리는 자유로와야 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셋째, 혼합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예수님 당시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은 세 번 건축되었습니다. 첫째는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포로민이 귀환할 때에 스룹바벨이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헤롯 성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이 유대인에게 환심 사기 위하여 세워놓은 성전입니다. 제사장들이 그걸 미끼로 성전을 지어주는 것을 묵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를 세워준 것입니다. 이 성전을 완공하기 위하여 제사장들은 헤롯에게 결탁하고 온갖 아양을 다 떨었을 것입니다.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목적이 혼동되고 혼합된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을 기뻐하실리가 없습니다. 성전은 혼합되지 않고 깨끗해야 합니다. 신명기 22:9에는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고 합니다. 10절는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라고 합니다. 11절에는 또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왜요? 이렇게 혼합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신을 혼돈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배격하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집단 무의식과 정서가 상당히 혼합적입니다. 그래서 생활에서 보면 혼돈과 혼합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집단 무의식은 식사문화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밥을 먹을 때도 보면 비빔밥과 국밥이 주류입니다. 비벼먹고 말아먹는 것은 모두 혼합된 음식입니다. 섞어찌개라는 것도 있고 부대찌개라는 것도 있습니다. 아무 것이나 전부 집어 넣어 끓여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콜라와 사이다도 섞어서 마십니다. 그게 맛있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술을 마셔도 섞습니다. 말썽많은 폭탄주를 보니까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서 마십디다. 그래야 기분좋게 취한다나요. 섞으면 폭탄이 되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내 곤하게 잠이 드셨습니다. 그 때에 심한 바람이 불어 물결이 요동하고 물이 배에 들어와 배가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는 물 위에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불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바람은 언제나 붑니다. 문제는 물이 배 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물은 배 밖에 있어야 하고, 배 밑에 있어야 하는데 배 안에 들어왔기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에 존재합니다. 세상에는 항상 바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세상의 물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을 지배하고 초월하는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혼합되고 심지어 야합하게 되면 교회는 문제가 발생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리 채프먼은 그의 책 ‘하나님이 쓰시는 사랑의 언어’에서 “문화적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들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여깁니다. 겉은 기독교인이지만 속은 세속 문화가 혼란스럽게 혼재해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일반적으로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하지 못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기에 확실하지 못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적 불교 신자나 힌두교도, 유대인, 무슬림이나 다를바가 전혀 없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형편없는 사람들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더럽고 어지러운 교회도 깨끗하게 하십니다. 교회를 보면 비판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합니다. 깨끗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들은 나 때문에 더러워진 부분입니다. 교회가 고쳐야 할 부분은 알고 보면 내가 고쳐야 할 부분들입니다. 내가 고쳐지면 교회가 절로 깨끗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최근 어느 책에서 희망적 글을 읽었습니다. 윌리엄 헨드릭스의 ‘이탈자 인터뷰’에서 상처 받고 환멸을 느껴 교회를 떠났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영적 성장을 계속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힘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잘 명심해야 합니다.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고독자가 돼야 합니다. 의식 있는 소수가 돼야 합니다. 지배적 양심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교회는 아름다워지고, 깨끗하게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란 거름과 같습니다. 거름은 한 곳에 쌓아두면 이웃에게 악취를 풍깁니다. 그러나 땅에 골고루 뿌리면 세상을 비옥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때문에 세상이 더러워졌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없다면 이 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깨끗한 교회를 위하여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인 하나님의 집에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특정한 사람의 집이 아니라 만민의 집이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온갖 상인들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전도서 5:1에는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교회가 깨끗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산에서 신을 벗는 모세의 심정으로 우리의 세속적인 더러움을 벗고 교회를 들어옵시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나를 정결케 합시다. 깨끗한 하나님의 집에는 깨끗한 사람들이 들어올 자격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깨끗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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