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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강의 하나님 / 요 14: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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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평강의 하나님
본문 : 요 14장 25-29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진 깊은 욕구의 하나는 마음의 평강을 바라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마음의 평강을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마음의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이 매우 소수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염려, 걱정, 긴장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평화를 앗아가는 요인들이 무엇일까요?

1.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면 사람들은 쉽게 평안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사실 잘 살펴보면 우리 삶의 대부분의 일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렇잖아도 늦어서 급히 차를 몰고 길을 나섰는데 막히기 시작합니다. 급기야는 멈추어 서고 맙니다. 그런 순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화에는 다른 차 위로 날아가는 차도 있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시동을 켠 채로 멈추어 서 있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사소한 일 뿐만 아닙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도 우리 맘대로 안 됩니다. 아기를 갖고 싶어 하는 젊은 부부인데도 아기가 생기질 않습니다. 결혼을 하고 싶지만 그런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많은 일들이 우리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그런 일을 만나면 우리는 좌절하고 마음의 평강을 잃고 맙니다.

2. 또 우리는 주위 사람들이 변하지 않을 때 마음의 평강을 잃고 맙니다. 사실 사람들은 변하기 싫어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읍시다.’라고 하는 것은 옛날이야기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앉아 있는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약 70-80%의 사람들이 지난주에 앉았던 그 위치에 앉아 있을 겁니다.

자리 하나도 옮겨 앉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좀 바꿔 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그게 잘 되지를 않습니다. 생활 습관을 바꾸도록 충고를 해도 남편도 듣지 않고 자녀도 듣지 않습니다. 다 너를 위해서 라면서 다그쳐 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짜증만 낼 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강을 잃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바꿀려고 노력하라고 누군가는 말합니다.


3. 세 번째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삶이란 공평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행복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그 후로는 행복하더라.”하는 것은 현실 속에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들이 언제나 사필귀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더욱 우리를 난감하게 하는 것은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기대와 상반되는 일들이 일어날 때, 그리고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여러분은 좌절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질을 내게 되며 결국 마음의 평강을 잃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웃 여러분, 이것이 보통 우리들의 삶입니다. 이런 짜증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의 평강, 그것은 우리 삶에 꼭 필요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올 들어 하나님의 몇 가지 이름을 살폈습니다. “여호와 샬롬”샬롬이란 평강을 의미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로 “당신에게 은혜가 있기를”아니면 “당신에게 평강이 있기를”하는 말로서 서로 간에 인사를 나누곤  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주님은 세 차례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4장 27절에서도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

여기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라고 하는 것과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고 말씀하신 것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수고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받을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평화를 애걸할 이유도 없습니다. 평화를 호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 문제를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평강이란 결코 문제없는 삶에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다음에 평강을 얻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평강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문장을 딱 끊어서 말하면 첫 문장이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항상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마음의 평강은 결코 갈등에서부터 벗어난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갈등이 있는 것은 일상사입니다. 오늘 오실 때 ‘오늘은 무슨 옷을 입고 갈까?’하는 고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나저러나 큰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목사는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고 오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입고와도 큰 차이는 안 납니다. 그런 문제 말고도 중요한 일이 있죠. 결정에 따라서 굉장한 영향을 미치는 일도 있고. 이런 갈등은 삶에 단골손님입니다. 갈등과 환난이 있지만 거기서도 평강을 주시겠다고 주님은 약속합니다. 

평강이란 여러분이 내려야 하는 세 가지 결단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그럴때에 평강이 깃들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드리십시오.

바꿀 수 없는 것을 두고 염려하는 것은 분명히 평강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두고 화를 내거나 괴로워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두고 죄책감에 사로 잡혀서 밤을 새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바꿀 수 없는 것을 두고 안타까워해도 평강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평강을 가져다 줄 유일한 길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는 이러한 다윗의 태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밧세바는 본래 다윗의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그 남편은 아주 신실한 군인이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거기서 자식이 태어났습니다. 그런 자식이 복 받을 수 있을까요? 어쨋거나 병들었습니다. 다윗은 그 아이를 살려보려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금식하면서 울며 소리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7일째 되던 날 아이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 않으셨습니다.

아이의 죽은 소식을 접한 신하들은 겁을 먹었습니다. ‘야 이제 큰일 났구나. 아이 때문에 임금까지 죽게 생겼구나’하며 다윗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습니다. 눈치 빠른 다윗 왕이 “아이가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사실대로 아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신하들의 예상과는 달리 떨치고 일어나 목욕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근사한 식사를 하고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신하들은 놀라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뭐가 어찌되긴, 죽기 전에는 하나님이 혹시 불쌍히 여겨주시길 바랐고 지금 아이가 죽어서 하늘에 갔으니 그가 돌아올 리 만무하고 한 날 내가 거기 가서 만나 볼 일 말고 남은 게 뭔가? 남은 사람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뭔가”다윗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드린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이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정말 몸부림쳤습니다. 옆의 신하들이 걱정이 될 만큼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나 일단 아이의 숨이 끊어지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겁니다.

지난주일 말씀드린 바울도 마찬가지 태도를 가졌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네로에 의한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했습니다. 성경 가운데 가장 밝고 긍정적인 책, 기쁨의 책을 남겼습니다. 우린 그가 기록한 말을 몇 차례 살핀 적이 있습니다.

“내 처지가 어렵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 낼 줄도 알고 부유를 누릴 줄도 압니다. 배가 부르거나 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는 법을 몸에 익혔습니다. 내게 힘을 주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빌4:11-13, 현대어성경)

복습하십시다. 스스로 만족하는 것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학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타고난 지식이 아닙니다. 본능이 아닙니다. 힘든 기간을 통해서 습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체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긴장하게 하고 신경질 나게 하며 엄청 스트레스 받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여러분은 설명을 듣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특히 여러분에게 좋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더더욱 우리는 하나님께 설명을 듣고 싶어 합니다. “왜 하나님, 이런 일이 나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은 허용 하셨읍니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서 날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 연속적으로 이런 질문들을 우리는 쏟아냅니다.

질문을 계속하면 혼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설명을 해 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일일이 말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장해 보셨습니까? 수하에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최종 결정을 하는 것이고 그 이후에 대해서 직원들에게 일일이 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가장 노릇을 할 때도 때로는 그럴 때가 있더라고요. 여러분들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공의로우신 분이고 공평하신 하나님, 사랑하는 하나님.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하나님은 이해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다만 “당신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습니다”하고 고백하는 일 외에는 언제나 당신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설명을 해 주신다 해도 여러분들이나 제가 못 알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아니 좀 알아듣는다 해도 만족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세력들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악의 영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앉으셔서 차분히 설명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 이해가 되거나 수긍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아듣도록 집안 이야기 하나 드리지요. 저희 첫 째 아들이 어렸을 때 늘 쓰던 문자가 “왜냐하면”이었습니다. 말이 되던 안 되든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야 하던 아이였습니다. 이제 그 아이가 커서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요즈음 한 3주간 데리고 있었는데 눈만 뜨면 “왜?”라고 질문하는 바람에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아비는 묻는 대신 자기 나름의 이유를 밝히길 좋아했는데 딸은 하루 종일 “왜?”라고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묻어와서 시달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은 우리가 알아듣도록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다른 것은 설명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겨우 만 2년을 넘은 아이에게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습니까?

나이 차이만으로도 설명이 불가능 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생하고 어떻게 그렇게 척척 한마디로 다 알아 들을 수 있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 되었게요. 설명이 불가능하기도 하고 알아듣도록 해도 그 설명이 우리에게 평강을 가져다 주는게 아닙니다.

우리 삶에 평강을 허락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설명해도 손녀는 자기가 못 알아들으면 계속해서 “왜?”“왜?”를 연발합니다.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칭얼거립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충분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그 분의 관심과 위로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이젠 중단하십시오. 설명은 여러분 삶에 결코 만족을 안겨주지 않습니다.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잘 받아드린 좋은 예가 바로 욥의 경우입니다.

그는 인간이 겪는 고난의 마지막 결승전에 출전한 선수 같습니다. 한 때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에게 물으면 얄미운 사람 제 1호가 될 것 같아요. 왜냐면 그는 엄청난 부자인데다가 그의 신앙 또한 탁월했고 겸손했습니다. 자식도 많았고. 또한 하나님께 아주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 만에 모든 것을 날렸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부와 건강이 사라졌습니다. 짐승 떼와 곡식 이 모든 것이 하룻밤에 다 절단이 났습니다. 게다가 엄청 고통스런 피부병까지 덮쳤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바가지를 긁는 아내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아내가 욥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욕하고 콱 죽으소”그 말이 마지막 남은 아내가 남겨준 자비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욥의 입장에서 가장 고통스런 것은 아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서를 앞에서 읽어봐서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사단이 충동질 했고 하나님께서 허용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그 막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깐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것을 알기라도 했다면 그 고통이 덜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런 고난을 당할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워낙 잘못한 것 없다고 버티니깐 친구들이 와서 그렇게 말합니다. “욥, 옛날에는 너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너 진짜 독한 놈이네. 이 정도 얻어터지면 자백할 만한데 그래도 끝까지 버티네.” 친구들이 그럽니다.

여러분도 다급한 처지에서 하나님은 아무 말씀하지 않으시고 부르짖는데 응답은 없는, 그런 경험해 보셨습니까? 37장 까지 가도록 하나님은 한마디도 욥에게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야 합니까?”라고 절규하지만 하늘은 놋 하늘처럼 느껴지고 기도는 천정에서 되돌아오는 것 같은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좌절하며 마음의 평강을 상실합니다.

욥이야말로 생의 최대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의 마음의 평화와 인격의 전부가 흔들리는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우리 교회 성도 가운데서 이런 분이 있습니다. 남편이 워낙 핍박을 하고 죽이려고 하니깐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 품에서 죽을 수만 있다면 행복해요”하고 나오니깐 남편이 더 이상 칼질을 하지 않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는 있는 상황을 받아드리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본래 시험 칠 때는 선생님은 말씀을 하시지 않는 법입니다. 말씀해 주시질 않습니다. 시험시간에는 답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도 시험을 당할 때는 대답이 즉각 즉각 안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드릴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한 번에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한 번에 한 순간만 즐기게 하시고, 고난을 평강으로 인도하는 지름길로 삼게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건강문제로 고통당하는 분은 없습니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보시되 더 이상 길이 없다면 바꿀 수 없는 것을 그대로 받아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주인이십니다. 제가 목회 길에서 만난 한분, 40대. 외국에 가서 일하다가 돈 모아 왔어요. 자기 사업하려고 사무실 하나 차려놓고는 발병했습니다.

담도암 이었습니다. 이제는 고생 끝나고 자기 일 하려고 하는데 병이 찾아 왔습니다. 병문안했더니 아는 게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할말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병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그때까지는 자기의 심각성을 몰랐던가 봐요. 말을 많이 하길래 듣기만 하고 기도하고 왔습니다. 상당한 기간이 많이 지났는데 아직 안 돌아 가셨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나 보다 해서 집사람을 일주일에 두 번씩 보냈어요. 원투원을 하나씩 가르치게 했어요. 첫 과를 배우고 나서 성경을 읽어보니까 시편에“주는”할 때 “주”라는 말을 주목하더니 이 “주”가 “주인 주”자냐고 묻더랍니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이 사람이 마음의 평안을 얻었어요.

하나님이 내 주인이구나. 그 “주인 주”자 한 단어에 삶이 바뀐 것입니다. 바뀌지 않는 배우자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는 분이 없습니까? 그가 바뀌던 말든 그 사람을 받아들이십시오. 변치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사랑으로 돌보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잠26:3)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여호와는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 평안을 주신다.”(사26:3, 현대인성경) 아예 현대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항상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이들에게 주께서 언제나 평화를 주실 것이다. 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이들에게 주께서 항상 평화를 주실 것이다.”(사26:3, 현대어성경)

잠언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잠언3:5-6, 표준새번역 )

앞에도 말했듯이 문제가 없는 삶은 없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연속적인 문제를 가진 길을 일컬어 우리는 바로 인생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의 한 가운데서 평강을 갖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강을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네 삶은 문제의 연속일까요? 첫 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담 때문입니다. 그와 하와는 유혹에 넘어졌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모두 죄 값을 지불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완벽한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의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대적 사단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수가 있다니까요. 뉴스를 듣고 신문을 읽어보면 악이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임을 알게 됩니다. 그 악한 자는 여러분의 온갖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만 아니라 가정과 건강까지 망치려듭니다. 관계와 재정까지 파탄으로 몰아갑니다.

여러분 자신을 망가뜨리려고 발버둥칩니다. 특히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시작하면, 바른 삶을 살려고 결심하면 여러분은 사단의 공격목표가 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되는 대로 살면 사단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딱 결심하고 들은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겠다 하면 그때부터는 사단은 우리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결코 여러분에게 우호적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공격하는 실체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위에 여러분 자신이 실수하고 잘못을 범합니다. 모든 좋은 것을 여러분의 한 마디 말로, 한번의 행동으로 다 날려버립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우리 자신이 잘못 결정하고 행동한 대가입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면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그 값을 치루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 사단은 별로 우리에게 신경을 안 쓸지도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일을 잘 망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누구 때문이냐고요. 주님이 대답해 주시잖아요. 자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 때문도 아니다. 고통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회일 뿐이다.

지금 여러분이 겪는 삶의 고통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기회일 뿐이라고 주님은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이든지 없는 문제이든지, 설명이 되든지 안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타락한 세상이든지 악한 자 때문이든지, 우리 자신 때문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언제나 동일한 반응을 보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돌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나 설명이 안 되는 변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대부분 이런 잘못들을 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손 쓸 수 없는 자리에서도 엄청 뭔가를 해보려고 온갖 시간과 정력과 돈을 쏟아 붓습니다, 그런다고 해결이 됩니까?

안되는 일 앞에서 그렇게 하면 초조해 지기만 하고 옆에 있는 사람만 피곤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정반대로 행동합니다.“난 희생자야, 내 앞날에 별 볼일 없을거야.”자기 연민 가운데 빠져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절망 가운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맙니다. 이 두 가지 반응은 결코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제 3의 길을 택하셔야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제3의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세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통제에 내어맡기십시오.

평안을 얻으시려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에 여러분의 삶을 내어 맡기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번민하고 염려하고 긴장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과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 잘 하고 있다는 교만이 자리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할 수 없습니다.

매일 눈뜨고 일어나면 여러분은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 이 하루의 삶을 내 뜻대로 살 것인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 갈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인생에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하는 결정적인 기도를 우리가 드린 후에도 날마다 날마다 그 기도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삶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더 똑똑하다고 여기면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걷는 것입니다. 단 5분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는 인생이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면 혼란스러워 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인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노릇을 하려고 하면 참된 하나님과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지 성경은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그렇습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지만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냐 생명과 평안이냐를 두고 선택하셔야 합니다.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과 싸우는 것은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다투어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권투를 해도 그렇고 축구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론적인 논쟁을 해도  지는 편은 결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기에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 갖기를 원하신다면 삶의 열쇠를 그 분에게 양도해 드리십시오. 맡겨 드린 것, 어떻게 확인될 수 있습니까? 삶의 양도한 결과는 언제나 순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라고 하면 이해가 되던 말든 다른 사람이 하든 말든, 그 일이 가능하게 보이든 불가능하게 보이든,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하라고 하면 하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따른다면 결과가 무엇일까요? 언제나 불변하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평강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 우리가 부딪혀도 평강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당할 수 있는 어떤 일을 우리도 당하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차이를 만드는 것은 평강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길을 잘못 들어섰습니다.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에게도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의 현장에 우리도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게 있어요. 그 가운데서 우리는 평강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평강으로 우리 주위에 고난당하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대답을 가지도록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애를 쓰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아무 것도 그들을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시119:165, 현대인성경)

주의 법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평안이 깃들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기쁨이 찾아 올 것입니다. 지금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해 있는 것 같습니까? 결혼은 했는데 대책 없는 사람입니까? 설명이 안되는 처지에 빠져 있습니까? 어떤 처지에 있어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더불어서 평화하십시오. 평화의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평화의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전 삶을 예수님께 양도해 드리는 겁니다. 믿음으로 주권 이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믿음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갔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하나님과 더불어서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주님을 여러분의 삶에 영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싸움하기에 지치신 여러분, 복 주시려는 하나님을 거부하려고 그를 등지고 살아가려고 하면 그것보다 더 피곤한 삶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통치아래 있으면 걱정과 염려, 죄책감과 수치감, 두려움과 절망, 영적 침체와 우울증이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런 감정을 여러분은 체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 내어 맡기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두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 분께 내어 드리면 평강을 얻습니다. 기쁨을 얻습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힘이 생깁니다. 지혜와 목적을 발견합니다. 왜 사는지 의미와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을 주님께 내어드리지 않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불편한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불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과요?” 예, 그렇습니다.

왜 아직도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습니까? 제대로 되지 않은 결혼생활 때문입니까? 아니 하고 싶은 결혼이 성사되지 않아서 입니까?

자신의 삶이나 사랑하는 이의 삶에 일어난 장애 때문입니까? 아기가 생기질 않아서 입니까? 마땅히 일어나리라고 생각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입니까? 계획이 여러분의 뜻대로 전개되질 않아서 입니까? 사랑하던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일찍 세상을 떠나서 입니까?

여러분의 생각대로 안 된다고 해서 짜증을 내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 보다 더 똑똑합니다하는 사람입니다. 가끔 택시를 타보면 기사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짜증을 내는 경우를 봅니다. 이해가 안 되죠. 그렇게 자기 뜻대로 안된다고 불평할 거면 왜 택시기사가 되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대로 일이 안됩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가장 좋은 방법을, 시간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틀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만스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싫다는 겁니다.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아직도 하나님께 대해서 거부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는 마음은 우리 삶의 유일한 희망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단절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낫다는 생각은 치유와 도움의 원천에서부터 자신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손쓸 수 없던 단 하나의 사건도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그 어떤 나쁜 일도, 하나님이 막지 못해서 발생하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소리치고 싶습니까? 잘 모릅니다. 우리는 세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척척 잘되면 우리가 어쩌면 대책 없이 잘난 척 하겠지요. 여러분이 자녀에게 무엇이든지 다 해주니깐 그 자녀가 어떻게 되던가요? 제가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문병원 집사님.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목사님, 제가 첫 번 출마에서 당선했더라면 저는 완전히 교만해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문병원 집사님 뿐이겠습니까?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원하는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얻게 되면 우린 기도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여기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세상이기에 얼마만큼 언제 허락해야 될런지는 하늘 아버지가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계획 속에는 여러분의 성장을 위한 고통이 수반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을 당신 가까이로 이끌기 위한 아픔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그 길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면 하나님은 그 길을 선택하신다는 겁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따라서 여러분에게 주실 상급을 정해두셨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깊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길 원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목회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어떤 때는 아무런 할말도 찾을 수 없는 상황 속에 서야 합니다.

그래도 목사가 갔으니까 무언가 한마디 위로를 줘야 할 것인데 그 상황 속에서 위로가 될 말이 아무것도 없을 때도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는“사랑하는 형제님, 자매님. 아직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비행기를 조종사가 운행을 할 때에 날이 좋을 때는 보면서 비행기를 안착시킵니다, 그렇지만 캄캄할 때는 계기판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계기가 시키는 대로 따라 가야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순조로울 때에야 우리 육감에 따라서 살수 있겠죠. 그러나 사방이 캄캄해 질 때는 이 성경에 쓰여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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