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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문제는 마음의 자세(막 12: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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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마음의 자세(막 12:41-44)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중에 마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을 판단하고, 자기 마음 생긴 대로 행동도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들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들려지기도 하고 안 들려지기도 하고, 이렇게 듣기도 하고, 저렇게 듣기도 하고, 이렇게 깨닫기도 하고 정반대로 깨닫기도 합니다. "내 마음 생긴 대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16장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용사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이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윤리학에서는 생각과 마음이 함께 하지 않는 행위를 행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몸만 움직인 거니까. 문제는 언제나 마음의 자세입니다.

브라이언 카바로프라가 쓴 '마음의 정원'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마음은 마치 정원과 같은데, 그래서 거기에 잡초가 나기도 하고 좋은 곡식이 자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잡초는 심지 않아도 잘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는데 좋은 곡식은 좋은 종자를 심어도 잘 자라질 않습니다. 그리고 잡초와 곡식이 함께 있으면 어느 사이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그리고 곡식은 시들시들 말라서 그만 죽어버리기 때문에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그게 가꾼다는 얘기 아닙니까? 곡식을 가꾸고 김을 매주는 거예요. 부지런히 김을 매서 잡초를 제거해 주어야 그 땅에서 오는 좋은 기운을 받고 영양을 받아가지고 곡식이 잘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 마음의 정원, 알게 모르게 못된 생각은 그저 무성하게 자라고 별 노력 없이도 자라는데 그러나 좋은 생각과 착한 마음은 애써 보전하려고 해도 어느 사이에 그만 나도 모르게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무서운 생각이 들어올 때, ‘어찌 내 마음속에 이런 악한 마음이 있단 말인가?' 하고 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표시이며, 감사의 표시여야 하는데, 우리는 과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을 철저히, 그리고 충분히 드리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수없이 드려지는 예배들이 얼마나 우리의 헌신을 철저하게 담아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배 가운데 진행되어지는 순서와 절차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더욱이 예배 후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때 이러한 의문은 깊어만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수많은 예배를 일 년에도 수차례나 드리고 있지만, 좀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삶에 있어서는 진정으로 헌신된 자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드리고 있지를 못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들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의 자세를 살펴보고,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받음직한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짧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성전에 있는 헌금 궤 맞은편에 앉아서 그리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여러 부자들이 와서 많은 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많은 동전이 긴 나팔 모양의 헌금궤를 통해 떨어질 때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난한 과부 역시 와서 겨우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하는 것도 보셨습니다. 여기서 렙돈이란 것은, 헬라의 동전으로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를 가리키며, 고드란트는 로마의 동전으로 로마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를 가리킵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는데, 렙돈은 1/16 데나리온이었으니, 얼마나 작은 액수였는지, 언제 헌금궤에 떨어졌는지도 모를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리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신 후에, 예수님은 조용히 제자들을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겠다. 이 과부가 지금까지 이 헌금궤에 헌금한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헌금하였단다. 왜 그런지 아느냐? 부자들은 자신들의 풍족한 것들 중에 얼마를 헌금한 것이지만, 이 과부는 가난하고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소유 전부를 헌금한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이 헌금 이야기가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헌신의 문제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그리고, 마가는 왜 이 헌금 이야기를 예수님의 대적자들과의 논쟁 이야기 다음에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바로 전의 예수님의 교훈을 예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12:28-34절까지에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는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귀한 교훈의 말씀을 오늘 본문의 한 과부가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38-40절까지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외식과 거짓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에게는 도무지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했으며, 회당과 잔치 자리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착취하면서도 외식적으로 길게 기도하는 일에 익숙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과부의 모습은 그들과 아주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녀는 비록 두 렙돈, 한 고드란트라는 극히 작은 액수의 헌금을 드리고 있지만, 그녀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드린 그 헌금은 비록 적은 액수였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과부의 헌금의 이야기는 단지 헌금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온전한 헌신의 정신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행위이며, 자신을 또한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성도들이 물질의 신, 맘몬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섬긴다는 것을 증거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또한, 내가 물질에 매이지 않고 맘몬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임을 증거하는 행위이며, 헌신의 정신을 담은 믿음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이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온전한 헌신의 정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드리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우리의 온전한 헌신을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을 드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보고 계심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우선, 은밀히 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두 가지 동사를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앉다'라는 동사와 '보다'라는 동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있는 연보 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무리가 연보 궤에 돈 넣은 것을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지켜보고 계셨고 무리들이 헌금을 드리는 행동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심오한 것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헌금을 드리는 이유나 목적,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든 충동, 그들의 헌금을 드리는 마음의 자세 등등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많은 부자들이나 과부나 예수님께서 보고 계신 것을 알지 못했지만, 주님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들이 어떻게 헌금하는지를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의 자세, 동기, 이유와 목적들까지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자들이 기억해야 할 첫 번째 교훈입니다.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헌신을 하는지 앉아서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 앞에서는 헌신을 드리는 행위나 예배 의식이나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동기와 자세와 태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든, 봉사를 하든, 그 무엇을 하든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바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헌신을 드리는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살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사람들의 눈앞에서만 헌신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하기는, 우리의 앞에서 우리의 심장과 폐부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아가시는 영암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헌신은 양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한 헌신은 양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들과 과부를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 더 하나님께 많이 헌금을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41절 하반절에 보면, '여러 부자가 많이 넣었다'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2절에 보면, 과부는 '두 렙돈, 한 고드란트', 다시 말해, 극히 작은 액수의 동전만 넣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헌금에 대한 우리 주님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여러 부자가 많이 넣은 헌금보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넣은 것보다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이 더 많다고 주님께서 평가하십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의 수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여러 부자들의 많은 헌금을 합친 것보다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이 많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에게는 '얼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헌금의 액수를 보지만, 우리 주님은 헌금에 담긴 마음가짐을 보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보면, 헌금과 관련된 동사 '넣다'라는 단어가 모두 7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41절에 2번, 42절에 1번, 43절에 2번, 44절에 2번 모두 7번입니다. 그런데, 그 7번의 동사가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하나는 여러 부자들과 관련해서, 다른 하나는 한 가난한 과부와 관련해서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는 모두 다 '넣다'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 보면, 분명하게 두 가지 형태로 구별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NIV를 비롯한 여러 영어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우선, 여러 부자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어진 '넣다'라는 동사는 'threw in' 또는 'gave in' 그리고 'contributed out'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던지다, 기부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 가난한 과부와 관련되어 사용되어진 단어는 모두 'put in' 즉 '두다, 맡기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여러 부자들은 비록 많은 양의 헌금을 드렸을지라도 그 헌금을 드리는 자세는 마치 기부하며 적선하듯 헌금 통에 던져 버렸음에 반해, 한 가난한 과부는 비록 두 렙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액수의 헌금이지만, 소중하게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 부자들의 드린 많은 양의 헌금은 단지 기증에 불과했지만, 가난한 과부가 드린 극히 적은 양의 헌금은 그녀의 전부를 드린 참된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헌신자들이 기억해야 할 두 번째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헌신의 양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헌신의 자세, 마음의 자세를 더 귀중히 보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얼마나 많은 양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건축헌금과 선교헌금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많다고 자신하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수없이 드리는 공적인 예배와 수많은 교회 모임과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얼마나 여러분의 가진 재능과 은사로 섬김을 다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여러분이 드리는 많은 양의 헌금과 많은 시간들과 많은 재능과 은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 자세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많은 양의 헌금과 시간과 재능을 드린다고 해도, 그것이 마치 적선이나 기부하듯 그렇게 하나님께 던져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헌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처럼 극히 적은 양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가지고 드린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희생과 헌신이 될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부디 바라는 것은 우리 영암교회의 성도들 모두, 하나님께 드려지는 물질이나 시간이나 재능의 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 마음으로 드려지는 온전한 헌신을 드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헌신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헌신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4절에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왜 주님께서 여러 부자들이 드린 그 많은 헌금보다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보잘 것 없는 두 렙돈을 더 귀중히 보시는가에 대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풍족한 것들 중에 얼마를 드린 것에 불과하지만, 과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헌금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많고 또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전부를 담아 드리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헌금 액수가 적다고 해서 반드시 깊은 헌신의 표현이며, 헌금 액수가 많다고 해서 언제나 위선적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바로 '전부'에 대한 우리의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부분'이 아닌 '전부'를 받으시고, '전체'로 드리는 우리들의 삶을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결국, 과부의 두 렙돈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며,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신뢰해야 하며, 하나님을 어떻게 모든 소유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헌금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헌신을 온전한 헌신으로 기뻐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양보다는 우리가 남겨 가지고 있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여러 부자들은 비록 많은 양의 헌금을 드리긴 했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풍족함을 누릴 만한 양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부를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풍족함 중에서 단지 일부분만을 떼어 드린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한 과부는 비록 부자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히 적은 양의 헌금을 드렸지만, 그녀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를 다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이것으로 인해, 그녀의 두 렙돈을 여러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 더 많게, 더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의 전부를 드린 이 온전한 헌신을 통해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능력의 역사들이 다 이 온전한 헌신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 자신의 존재 전체를 드리는 것, 우리의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온전한 헌신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드리기 원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이나 시간이나 재능의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정말 그것이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 되고 있습니까? 아무리 많은 양의 헌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드린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 내 소유로 남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우리의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얼마를 드리든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드리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던 '가난한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가진 것 전부를 다 드림으로,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으로 인해, 온전히 가난하게 된 마음,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며 의지하며 신뢰하며 살아가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온전한 헌신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바라는 것은 우리 영암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부를 다 드리는 온전한 헌신을 하며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고 그 결과 천국을 소유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가난한 한 과부의 드린 헌금이 어떻게 여러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많을 수 있는가? 하는 하나님 나라의 수학공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헌금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을 드리는 헌신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헌신으로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앞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며 단순히 사람의 눈앞에서만 헌신하는 자들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드리는 많은 양의 헌금과 시간과 재능이 아니라, 그것을 드리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를 더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물질이나 시간이나 재능의 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 마음으로 드려지는 온전한 헌신을 드리며 살아갑시다. 또한 부분이 아니라 전부를, 우리의 존재 전체를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온전한 헌신을 통해, 가난한 자 되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며 살아가도록, 그리고, 자신의 전부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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