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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쓰레기더미 위에 핀 한송이 장미 [막 12: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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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쓰레기더미 위에 핀 한송이 장미
본문 : 마가복음 12:28-44


서울시 상암동이 전에는 쓰레기 매립지였습니다. 그곳을 난지도라고 불렀습니다. 쓰레기가 쌓여 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위에 흙을 붓고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공원을 월드컵축구경기장 곁에 있다고 해서 월드컵공원이라고 부릅니다. 모두 세 개의 큰 공원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쓰레기더미 산에 조성된 공원을 하늘공원이라고 부릅니다. 하늘과 제일 가깝다고 지은 이름입니다. 그 높이만큼 쓰레기로 가득한 곳입니다.

서울시에서는 그곳을 초지로 개발했습니다. 북쪽에는 억새를 심었고, 남쪽에는 해바라기를 심었습니다. 동서쪽에는 낮은 키의 풀들을 심었습니다. 또 나비 3 만 마리를 풀어서 식물들의 가루받이를 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계절마다의 꽃이 만발합니다. 과거의 쓰레기 산이 변하여 아름다운 공원이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쓰레기더미 위에 핀 한송이 장미’입니다. 본문에는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장미꽃 같은 한 여인이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38 절부터 나오는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악행을 지적하시면서 그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서기관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서기관을 공격하고 있지만, 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서기관들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한 편이 되어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행을 일삼는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그 앞에 있는 내용부터 전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의 위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의 이야기입니다.

11 장부터 보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이 들어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나라가 다시 찾아 왔다며 예수님을 왕처럼 맞이했습니다. 이 환호하는 모습은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 날 다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았습니다.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며 탄식하셨습니다. 이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멸할까 결심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11:18 말씀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다음날 세 번째로 예루살렘을 다시 들어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이 날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그들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냐고 따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올무를 놓았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바치라고 하면 로마 황제에 굴복하는 유대 지도자가 됩니다. 바치지 말라고 하면 정치적으로 금방 로마에 대항하는 지도자로 몰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동전에 그려진 가이사의 화상을 보이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답하셨습니다.

그 다음 그들은 사두개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는 않는 자들입니다. 형이 죽으면 형수는 동생의 아내가 되는 유대 풍습이 있습니다. 일곱 형제가 연이어 죽게 되어 형수가 일곱 형제의 아내로 살았다면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냐고 되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면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천사처럼 된다고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으로 서기관들은 더 이상 대들지 못합니다.

그 때 서기관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이런 답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처음 28 절에 등장하는 서기관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앞선 질문과 같이 예수님을 올무에 잡으려고 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께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답을 듣고는 참 진리의 말씀이라고 탄복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이 구약 율법의 모든 계명을 정확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이 서기관은 율법의 본래 정신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제물로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서기관을 칭찬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이제까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놓고 공격만 하던 서기관들에게 이 사건은 충격이 되었습니다. 자기들 가운데 변절자가 생긴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교훈에 넘어간 동료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로운 말씀에 달리 역공격을 할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서기관들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34 절 뒷부분에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의 일방적인 판정승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공격 차례입니다. 예수님은 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서기관들을 공격하셨습니다.

35 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을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지적하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했는데,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이 말에 대꾸를 못합니다. 꿀 먹은 벙어리입니다. 예수님의 기습적인 질문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재미있었습니다. 37 절 뒷부분에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그 다음 예수님은 꼬리를 내리고 있는 서기관들을 향해 독설을 퍼부으셨습니다. 이 서기관들의 악행을 꼬집어 내었습니다.

38 절부터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야단치십니다.

첫째,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닙니다. 서기관들의 옷은 외모부터 평민과 달랐습니다. 사실 유대인들 가운데 서기관들은 가장 존경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취급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성경을 만져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매일 하는 일이 성경을 보고 옮겨 적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적으면서 우월감에 빠졌습니다.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과 세속적인 일을 하는 사람은 차원이 달라야 했습니다. 그들은 옷 입는 것으로 그것을 구별하고 싶어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예배 인도할 때 왜 가운을 입지 않는지 아십니까?
예배 위원이 입는 가운은 인간의 허물을 가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겸손하게 인간적인 부분을 가리고 거룩한 모습으로 단에 올라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이 잘못하면 권위를 내세우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강단의 권위를 말씀으로 세우고 싶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 자체에서 권위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은 박사 학위 받을 때 입는 학위 가운을 강단에서 입습니다. 팔에 띠 세 개 그려진 것이 박사님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목사가 가운을 입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운이 겸손의 도구가 아닌 권위의 도구로 보일까 해서 입지 않는 것 뿐입니다.

제가 주보에다 ‘황금성 박사’라고 적으면 어떨까요? 그건 참 웃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 가운을 결혼예배와 장례예배를 집례 할 때만 입습니다. 결혼과 장례에는 예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서기관들은 시장에서 문안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가면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합니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다. 유명세를 탄다는 것에서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뭔가 뛰어나고 특출한 사람으로 대접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일부러 시장에 나가봅니다. 거기서 자기 인기를 체크합니다. 가끔 이런 확인을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은 교만하게 인사를 받는 일에 특권 의식을 가졌습니다.

셋째, 서기관들은 회당과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서열이 정해집니다. 물 한 컵이 있어도 마시는 순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잘난 것들을 총동원합니다. 뭔가로 상대방을 눌러야 합니다. 그래서 학력, 나이, 족보, 돈, 자식, 몸집 이런 것들을 내세웁니다. 명함에 그런 것들을 가득 써가지고 다닙니다. 요즘에는 얼짱, 몸짱 하면서 별거 다가지고 내세웁니다. 이 시대에 서열을 높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시대에 인품을 가지고 나서면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까?

서기관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서열 순위 1 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상석을 차지합니다. 사실 그들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눈에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높아져 알아서 상석을 차지했습니다. 교만하고 거만했습니다.

넷째,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켰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과부와 고아는 보호 대상입니다. 사회의 약자인 이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보호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서기관들은 오히려 과부를 등쳐먹는 파렴치한 악행을 범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과부의 가산을 빼앗았는지는 안 나와 있습니다. 그나마 과부의 남은 재산까지 빼앗았습니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아주 치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이런 가증스런 모습을 참지 못하시고 바로 퍼부으셨습니다.

다섯째, 서기관들은 겉으로 보이기 위해 기도를 길게 했습니다. 기도를 길게 한 자체를 나무라신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길게 하는 기도, 외식하는 모습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런 서기관들의 악행은 한 마디로 쓰레기 같은 것입니다. 뒤에서 예수님을 해코지 하려고 들고, 앞에서는 거룩한 척하는 위선자들. 정말 냄새나고 역겨운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한 과부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성전 연보궤 앞에 앉아 계셨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가며 돈을 넣었습니다. 부자 여럿이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렙돈은 그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입니다. 우리나라엔 쓰이진 않지만 1 원짜리 동전이 있습니다. 고드란트는 로마의 화폐단위입니다. 당시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 정도 되었습니다. 고드란트는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천원 조금 안 됩니다. 그러니까 렙돈은 500 원짜리 동전 정도 되었겠지요.

예수님은 과부의 이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과부는 구차한 중에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부는 좀 전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책하실 때 서기관들에게 당하고 사는 약자입니다. 과부들은 서기관들에게 가산을 약탈당했습니다. 이런 쓰레기더미 속에서 온갖 고초와 역경을 겪었습니다. 과부는 서기관들에게 돈을 빼앗겨서 돈이 없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막막합니다.

그런데 이 과부가 하나님께 나아와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너무 아름다운 헌신이었습니다. 가장 연약한 자의 눈물겨운 헌신에 감동받으신 주님!

여러분 이 여인은 한송이 향기 나는 장미입니다. 그것도 쓰레기 같은 자들에게 시달리면서도 그 모든 것을 이겨낸 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요?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너무나 향기로운 헌신.

이 과부가 드린 두 개의 동전이 흥미롭습니다. 앞서 부자가 헌금할 때는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당시 성전에 연보궤는 입구가 나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전을 넣기가 수월했습니다. 많은 동전을 넣으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그런데 달랑 동전 두 개를 넣을 때는 어떨까요?

동전 세 개를 넣는 것과 확연히 다릅니다. 한 개를 넣을 때와도 다릅니다. 쨍그랑 동전이 두 개가 떨어지면 그 옆에 있는 사람 누구나 들을 수 있습니다. 두 개구나.
이게 참 부끄러운 겁니다. 많이 넣을 때야 뭐가 부끄럽습니까? 그러나 달랑 두 개는 다른 사람들 보기에 창피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부자는 자랑스럽게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참 죄송한 마음으로 그러나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이 과부가 드린 헌금은 구제를 위해 쓰여 졌습니다. 자기가 오히려 구제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돈을 모아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돕자고 연보궤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도 쓰레기더미에 속한 자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무지 생활비 전부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긴 옷을 좋아하고,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 상석을 좋아하고, 외식하는 기도를 드리고, 혹여 누구를 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서기관의 긴 옷은 지금 나의 신분입니다. 서기관의 인사받기는 지금 나의 서열따지기입니다. 나는 얼마나 높은 자리를 만들기 위해 에너지를 쓰고 있습니까? 나는 얼마나 약자를 후리고 삽니까? 나의 영적 삶은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여러분!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사시렵니까? 먹고 먹히는 세상인데 악착같이, 짠돌이 같이 살겠습니까? 나중에 죽기 전에 헌신하기로 하고, 지금은 꽃을 피울 수 없습니까?
주님께서는 쓰레기더미 위에서 한송이 장미꽃을 찾아내시고 너무 기뻐하십니다. 바로 이 꽃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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