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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눅 7:36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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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누가복음 7:36 - 50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나아와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죄인이었고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신분상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나름대로 존경받는 고상한 율법주의자였고 이 여인은 사회로부터 멸시받는 죄 많은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비록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했으나 예수님의 신분이나 그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무지했고 반대로 이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을 향한 신뢰와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졌으며 회개할 줄 아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차이에 대해서
먼저 바리새인에게 ①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고 ② 입 맞추지 않았고 ③ 감람유로 붓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 많은 여인은 ① 눈물로 발을 적시며 그녀의 머리털로 씻었고 ② 발에 입 맞추었고 ③ 값비싼 향유를 부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대조적인 평가는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고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 많은 여인이 자신에게 하는 행위를 보고 있던 시몬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Ⅰ. 예수께서 자신이 선지자임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본문 7장 39절에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줄 알았으리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백안시(白眼視)하고 있었는데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이례적(異例的)으로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한 시몬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을 대접하고 싶어서 초청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무슨 음모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지도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충분히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따랐고 필요하다면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특별히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말하기를 우리 가운데 큰 선지자가 났다고 했습니다(눅 7:16).

시몬은 예수님의 이러한 기적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시몬은 단순하게 식사 초대를 할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하면 자기를 만지고 있는 이 여자가 누구며 이 여자의 죄를 알 것이니 이 여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하면 가증스럽고도 불결하게 자기 발 앞에 엎드려 있는 죄 많은 여인에게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체하는 시몬을 알고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고 있는 이 죄 많은 여인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상대해 주시는 참 선지자이십니다.
시몬에게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는 말씀은

Ⅱ.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장 41-42절에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빚에 대한 예화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를 탕감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나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 모두를 탕감해 준 것은 그 빚을 취소하고 무효화했다는 말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값없이 주어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인간의 어떤 선한 행위로 구원을 대신해 보겠다는 시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죄악입니다.
단지 성도의 선행은 값없이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롬 8:36-39).

예수님을 찾아와 발 앞에 엎드린 이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놓치지 않고 들에서, 산에서, 바닷가에서 행하시는 기적과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먼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받은 사랑에 대하여 반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1) 예수님의 행방을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7장 37절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감격적인 사랑은 주님의 행방을 놓치지 아니합니다.

2) 예수님께 왔습니다.
본문 7장 37절 하반절에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라고 했습니다.
감격적인 사랑은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올 수 없는 그녀였지만 주님은 죄인의 친구였기에 죄 많은 그녀도 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개의치 않고 이렇게 달려오는 것입니다.

3) 예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본문 7장 38절에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라고 했습니다.
그 발은 전도여행에 먼지 묻은 발이요, 피곤한 발이요,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릴 발입니다. 그녀는 그 발 곁에 서 있었습니다.

4) 예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본문 7장 38절에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라고 했습니다.
깊은 죄악의 수렁에 빠진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눈물이었습니다.

5) 예수님께 헌신했습니다.
본문 7장 38절에 『…자기 머리털로 씻고…』라고 했습니다.
『머리털』은 여자들의 품위의 상징입니다. 이 세상 여자들의 머리털은 허영과 교만으로, 쾌락에 악용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리털로 예수 그리스도의 먼지 묻은 발을 씻었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겸손과 헌신입니다.

6) 예수님께 사랑과 존경을 다했습니다.
본문 7장 38절에 『…그 발에 입 맞추고…』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했습니다(눅 7:45). 보통의 경우에 손이나 뺨에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입 맞춥니다.

7) 옥합을 깨뜨려 값진 것으로 감사했습니다.
본문 7장 38절에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가슴에 안고 왔던 옥합의 가느다란 목을 깨뜨렸습니다. 거기에서 쏟아지는 향기 그윽한 향유를 주께 부어 그 사랑에 감격하는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는 말씀은

Ⅲ.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본문 7장 48-50절에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죄 사함'과 '구원'을 병행선상에 놓으시고 믿음의 결과를 구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녀에 대한 죄 사함의 공식적인 선언은 곧 그녀를 향한 구원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도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5:20)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 21절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저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입니다. 그에게만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아니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선언하시므로 자신이 메시야임을 시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자의 고백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4장 25-26절에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로서 구약 성경에 이미 예언되었습니다(시 147:19-20; 사 2:3; 미 4: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시몬을 향하여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시몬의 마음속을 살피시는 그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 죄 많은 여인은 시몬이 지켜보는 앞에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눈물로 적셔진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것입니다. 사랑과 존경을 다하여 입 맞추었습니다. 그녀는 옥합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여인에게 이 옥합은 소중한 것으로, 재산상의 가치까지도 가지고 있는 물건입니다.
마침내 여인은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보물로, 그것은 장차 그녀가 결혼을 위하여 준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그녀가 간직하고 있던 옥합은 그를 지배하는 지배 능력이었습니다.
그녀는 지금 옥합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쏟았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입니다.

갈보리 성도 여러분!

나의 옥합, 교회의 옥합이 깨어지지 아니하고는 새로운 개혁이나 역사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옥합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랑, 자기 우상, 자기 욕심, 자기 울타리를 깨뜨리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나를 향한 지배능력이 있는 것은 모두 깨뜨려 버려야만 합니다.
영적 부흥이란 바로 나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여인의 옥합이 깨어지고 거기서부터 나오는 향기가 바리새인 시몬의 집을 진동시켰습니다.
교회라는 곳이 바로 이런 곳입니다. 우리가 가진 옥합을 깨뜨려야 하는 곳입니다. 자기 부인의 결단, 자기 성(城)의 파괴,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옛것의 깨어짐의 결단을 통하여 나오는 향기로 가득 찬 공동체,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만이 참다운 나의 변화와 함께 교회에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내가 깨어지지 아니하고는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는 세 종류의 교인이 있습니다.

① 호기심만을 갖는 교인(Curious Christian)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서 말씀을 듣고 앉아 있는 사람(listen and sits)으로 비행기를 탄 승객과 같은 성도입니다.

② 확신에 찬 교인(Convinced Christian)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서 듣고 이야기 하는 사람(listen and says)으로 여행할 때 안내원과 같은 성도입니다.

③ 헌신된 교인(Committed Christian) 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서 듣고 일하는 사람(listen and serve)으로 꿀벌과 같은 성도입니다. 헌신된 사람이란 자기 몫을 챙기고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골라 하지 않습니다. 들은 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헌신하자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실제로 헌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예배 중심이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뜨거운 예배, 다이나믹(dynamic)한 예배를 드려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써 모이는 교회(gathering church)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주일 출석수와 재적수가 같은 교회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새 신자 새 가족을 환영하고 극진히 영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바리새인의 스타일(style)이 아니라 죄 많은 여인의 모습이 되어야만 합니다.
새 교인이 교회에 들어 올 때 모든 교인들이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입 맞추고 향유를 붓는 감동과 사랑과 친절함으로 끌어안아야만 합니다.
많은 말을 생략하면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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