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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오직 새 부대에 (막 2: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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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오직 새 부대에> 막2:18-22


어느날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금식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하는 질문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그들 나름의 경건의 표현이었습니다. 금식은 기도와 구제와 함께 유대교 신앙을 훈련하는 주된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본래는 일년에 단 한 차례 즉 속죄일에만 24시간 금식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습니다. 속죄일이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년에 한 번 속죄할 것"(레16:34)을 명하신 날입니다. 금식의 의무규정은 이 속죄일에 관한 레16:31에서의 명령 즉 "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하신 말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이에 덧붙여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일을 되돌아볼 때나 전쟁, 재난, 기근 등 국가적 위기의 때마다 금식을 하곤 했습니다. 그 외에도 믿음에 열심 있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 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곤 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금식은 그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의 금욕적 삶의 방식을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요한은 보통사람들같이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또 그는 임박한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 의미와 동기는 조금씩 달라도 이미 생활화되어 있었던 금식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행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의외의 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19-20절에서 보는 대로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금식 그 자체의 가치를 부인하시거나 과소평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0절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의 차이점은 금식 자체에 관해서가 아니라 금식해야 할 때에 관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그 때에 금식하고 있었던데 반해 예수님은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고 나중에 금식할 때가 올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할 때에 관한 생각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부터 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신랑이란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즉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지금이 울 때인지 아닌지가 갈린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의 오심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며 금식으로써 그들의 통회하고 준비하는 믿음을 표현해야 할 것이지만, 메시야가 이미 오셨음을 알고 있고 이미 오신 그 메시야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는 금식할 이유가 없으며 오직 기쁨이 충만할 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을 뿐 그가 이미 오셨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모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새 시대가 이미 왔음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금식하고 있었으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진정 금식하며 통회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신랑 곧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빼앗긴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에는 분명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신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취하신 길이라 할 때에 하나님의 구속사역 자체로서의 그의 죽음을 통회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 금식하며 통회할 일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를 죽음에 내놓은 우리의 불신앙과 무지와 배신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통회하며 금식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앙과 그의 십자가를 온전히 따르며 그가 명하시는 대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신앙적 나태와 배신 때문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금식과 그 때에 관한 예수님의 답변은 보다 깊은 신학적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금식은 유대교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삶의 표현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적 믿음과 열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실 수 있으며 우리는 오직 그의 완전한 순종과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믿음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아니 계신다면, 이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그 믿음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아무 기쁨과 희망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신 말씀의 밑바닥에 깔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금식의 참 의미와 목표를 새롭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하고 안 하고 하는 일의 중심에 신랑 즉 예수님이 계셔야 함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거나 애통하는 것이 모두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의례적이고 기계적으로 행하는 금식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에 웃고 즐거워하며 예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기에 슬퍼하며 금식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다 하면서 슬퍼하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일 속에서 좋아하는 것은 바른 믿음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는 금식과 통회의 이유와 목적에 있어서의 이러한 변화를 밝히신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의 시작을 선언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속죄와 구원과 생명과 기쁨이 있으며, 이제 그 안에서 속죄와 구원과 생명과 기쁨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비유로 재확인하셨습니다. 그 두 비유가 21절과 22절의 말씀입니다.

첫째 비유의 말씀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생베 조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를 믿고 좇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낡은 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의 옛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비유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포하시는 복음과 구원의 진리는 옛 삶의 방식과 공존할 수 없음을 단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서 옛 삶을 내버리지 않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옛날대로 살려고 하면 긴장이 많고 불편한 것이 많을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 비유의 말씀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도 그 근본 뜻은 같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앞선 비유에서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일 경우 생베 조각 때문에 낡은 옷의 해어짐이 더 클 것만을 말씀하신 데에 반해, 이 비유에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을 경우 포도주와 부대를 다 버리게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새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낡은 가죽부대는 옛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옛 삶의 방식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 하다가는 그 삶이 기쁘고 편안한 삶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믿음을 망치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전에 좋던 것이 예수님 때문에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예전에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이 예수님 때문에 무가치해지며, 예전에 우리에게 슬픔과 고통이던 것들이 예수님 때문에 기쁨과 감사의 제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도 예전의 사고와 행동과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 이것저것 다 망치고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두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반복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금식은 유대교에 있어서 그들의 신앙과 경건한 삶을 표현하는 주된 방법의 하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 함께하지 않는 금식은 아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참 신앙과 같이 갈 수 없는 옛 것, 즉 버려야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천명하셨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과 경건의 특징 중 하나인 새벽기도나 심야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빠진 새벽기도나 심야기도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복음과 함께 할 수 없는 옛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과 참 신앙을 변질시키거나 못쓰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버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정치권에도 이 두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메아리쳐 울려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전부터도 집권하기를 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혁을 외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그 어떤 분야보다도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가 정치인 것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아무리 개혁을 외쳐도 그 사람이 바뀌지 않았으니 개혁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신하고 깨끗한 사람인 줄 알고 뽑아놓고 보면 다른 정치잡배들과 다를 바 없는 낡은 가죽부대로 드러나곤 하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현실입니다. 이제 두 달도 안 있어 총선이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스스로 속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외치는 개혁은 믿지 마세요. 개혁을 부르짖는 그 사람이 부정직하고 거짓 공약만 남발하며 부정한 돈을 닥치는 대로 긁어 담는 낡은 가죽부대인지 아닌지를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새 정치를 갈망하는 시대에 불법선거자금 퍼 담았던 낡은 가죽부대들이 지금 줄줄이 다 터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내 고향사람이라고 무작정 낡은 가죽부대들만 잔뜩 뽑아 여의도로 보내는 어리석은 국민들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새 가죽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과감히 내버려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오직 새 부대에 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들을 골라 세우는 이번 총선이 되게 합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시고 지금까지 지켜주신 이 나라를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들이 이끌어가도록 만드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신 신성한 사명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며 정직한 사회, 건강한 나라를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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