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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이 시키시는 일 /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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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시키시는 일
사도행전 13:1-3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 욕심쟁이 수지가 그 씨앗을 받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니 너무나 대견스럽군요. 아마 내년 봄이 되면 온통 우리 동네는 내가 심은 노란 꽃으로 덮여있겠군요.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km 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지 일주일도 안 되는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도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교를 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 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 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이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내겠지요. 저는 이곳에서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조선을 향하는 저의 열정이 아니라,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한국 선교 초창기에 한 이름없는 선교사가 고국에 있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는 우리의 과거를 발견하게 합니다.

복음이 들어와 이 땅에 있던 어둠을 빛으로 바꾸고, 죽음과 절망 가운데서 살던 영혼을 살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복음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 우리 귀에 다가오기까지 과정을 살펴야 할 때입니다. 오늘 한 선교사의 편지를 통해서도 잠깐 보았지만, 복음을 들고 미지의 땅 한국에 온 그들은 어떤 문제로 갈등했으며, 무엇을 두려워했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어야 했는지를 말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은 선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주어졌던 사명은 점점 시들어 가는 중에 새로운 도구로 안디옥 교회가 등장하는 분기점 입니다. 복음이 이 시간 우리에게 오기까지 최초의 시작점이면서 기대를 모았던 예루살렘 교회 대신, 도망자들로 구성된 이방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세계 선교의 문을 여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무너지면서 생긴 도망자들이 세운 안디옥 교회가 쓰임 받았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안디옥 교회와 같이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도 쓰임 받기 위해 이 시대 이 시점에서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안디옥 교회는 주님께서 하신 명령을 끝까지 간직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회는 잘 아는 대로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 받을 때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운 교회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1장19절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설립자 이름도 없이 그저 도망자라는 표현만 있을 뿐입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했던 사람들이 전혀 생소한 곳에 가서, 아는 사람도 없고 먹고 살길도 막막하니 미래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가슴에는 식지 않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증거하라 명하신 부탁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그들은 다급한 삶의 환경에서도 복음 증거하는 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승천을 앞두시고 행1장8 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주님은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제자들에게 복음 증거하기를 계속해서 부탁하셨습니다.

처음 이 명령을 받은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생명을 걸고 복음 증거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하루에 남자만 오 천명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초대 교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루살렘 교회는 엄청나게 큰 교회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예산 규모도 커지고 주위에 칭송도 자자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본질적으로 해야 할 일, 즉 주님께 부탁 받은 전도를 잊어버리고 부수적인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3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을 배타적으로 여기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자가 많아짐에 따라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조직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방인과 이방 선교에 대해 적대감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유산과 할례 등 유대 교회 전통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교회에 분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변화되지 않는 예루살렘 교회를 버리셨습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박해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이 세운 교회인 안디옥 교회는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당시 상황이나 분위기를 고려해 볼 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혁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증거하는 교회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유명한 사도도 아니고, 도망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슴속에 복음 전도를 귀한 사명으로 알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부흥하게 만드셨습니다. 또 그들이 그런 사명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를 구별하여 선교사로 보내라고 할 때도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은 1907년 대 부흥 운동과 1909년 백만 명 구령운동을 펼치면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복음 증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1911년도 영문으로 발간된 한 잡지(The Korean Mission of Field)에 다음과 같은 글이 개제되었습니다.

“고되고 가난한 생활을 하는 한국 사람들은 도합 십만 날을 이 사업에 바쳤는데 지난 겨울 개인 전도에 사용한 일 수는 칠만 육천 날 이었고, 금년 가을에도 수백명의 한인 전도인들이 가가호호를 심방하는 활동과 개 집회에 출석한 구도인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위해서 한 달을 온통 바쳤다. 수 백만 매의 전도지와 한인 신자들이 대금을 내고서 믿지 아니하는 동포들에게 칠십 만권의 마가복음을 무료로 배부하면서 복음을 잃고 믿으라는 간곡한 권고와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한국인 가정치고 심방 받지 아니한 가정이 거의 없었고, 심방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매일 기도를 올리고 있다.”

당시 우리 한국 사람들은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중 하루를 시간으로 헌금 했습니다. 이날은 자신을 위하지 않고 주님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모아진 시간이 십 만날 이었습니다. 한일합방이라는 위기 앞에서 일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희망을 잃고 있을 때 한국 교회는 복음으로 어두워 가는 백성들에게 소망을 심었던 것입니다. 가장 작은 수로 한국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소망을 주었던 바로 그 때가 복음 증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을 때였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위기의 원인 중에 가장 큰 것은 주님께서 내게 하신 간곡한 부탁이 우리 마음속에서 어느새 희미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선교 역사상 주님의 부탁을 잊은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주님 명령을 간직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다움을 잃게 되고 교회다움을 잃으면 잘못된 역사를 만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한국에서도 큰 교회입니다. 영향력 있다고 하지만 주님께 받은 사랑 대로, 전도에 대한 부탁을 기억하는 대로 정말 살아가고 있는가 의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생활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놀라운 기쁨과 감격을 전하고자, 주님 부탁을 항상 기억하고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산, 행사, 친교 속에 이에 대한 초점을 놓치고 있다면, 우리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위기를 맞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안디옥 교회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추천해드린 미국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이 지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책에 목적이 우리 삶을 이끌어 갈 때 얻는 5가지 유익이 있어 소개해드립니다.

첫째 목적을 알 때 삶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주어진 상황을 따라 허겁지겁 살아가는 사람은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는 이유와 목적을 아는 사람은 오늘에 담긴 의미나 가난해도 혹은 부유해도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발견합니다.

둘째로 삶의 목적을 알면 우리 삶은 단순해집니다. 복잡한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 앞에는 늘 수많은 선택과 결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목적에 따르는 선택만 하기 때문에 삶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셋째 초점을 맞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에너지가 분산되지 않고, 한 곳으로 모아져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과 역동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넷째로 목적을 알 때, 삶의 동기가 유발됩니다. 괴로움과 가난 속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고 계속 해야 하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언제 어느 곳에서나 동기 유발이 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목적을 알 때 영생을 준비하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는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 흔적을 본문 중에서 몇 군데 찾을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지역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 이방인들은 그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약간 조롱스런 표현이긴 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 그 교회가 하는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보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목적이 분명한 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보내라 하실 때, 바울과 바나바 없는 안디옥 교회를 생각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여 기도하며 떠나 보냈던 일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 구성원을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나이 많은 사람부터 어린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출신 지역도 다양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있었고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상류층 사람도 있었고, 하류층 사람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종도 다양했습니다. 부부간에도 의견이 달라 싸우는데 이들은 싸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가지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교회에는 선지자와 교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계속해서 배우고 훈련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목적이 있고 사명이 있는 사람, 즉 비전이 있는 사람은 비전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받는 훈련에 자기를 내어 놓습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처럼 교회만 왔다갔다하지 않습니다. 비전이 있으면 이루기 위해 필요한 훈련이 무엇인지 시간과 정성으로 받아들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런 훈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십니까?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동안 교회에는 왜 나오십니까? 교회에 오셔서 무엇 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교회는 여러분들이 모두 선교사가 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고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가정을 주셨고, 직장을 주셨고,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교회를 통해 훈련되고, 예배를 통해 공급 받아, 세상 정욕이 주장하는 곳에 의와 희락과 화평이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명입니다. 이러한 사명이 분명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나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가정이 되도록 하겠다는 꿈을 꾸셔야 합니다. 나의 직장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셔서 의와 희락과 화평이 넘치는 직장이 되게 하겠다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속한 어떤 모임이든지 주님 꿈을 이뤄드리기 위해서 훈련 받으셔야 합니다. 훈련을 통해 자기 비전을 하나님께 재 확인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한 비전이 있습니다. 이것 하기 위해, 이 사명 위해 상처와 아픔을 치유 받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성장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운 유산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동안교회 교인이라면, 오늘 삶의 현장에서 선교사의 영성으로, 집에서 밥을 짓더라도 하나님 나라 위해 보냄 받은 자의 심정으로 짓습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 속한 가정이 변할 것이며, 나아가 이 땅이 하나님 나라로 변할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여러분이 됩니다.

이 비전 없으면 교회에서 다툼이 생깁니다. 자리 다툼에 잘잘못 가리고, 출신지나 소유를 따지게 되어있습니다. 내 것 주장하며 훈련 앞에 자신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며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 동안교회 교인이 된 목적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계속 사용 하십니다.

마지막 셋째로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 역사무대에서 귀하게 쓰임 받았던 이유는 살아있는 예배가 있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주를 섬긴다는 단어는 ‘레이투르군톤’으로 봉사한다는 의미로도 번역하지만, 주로 ‘예배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표준새번역은 이 말씀을 ‘그들이 주께 예배를 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주님이 찬양 받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주님이 높임 받으시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우리 본 모습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이 예배 현장에서 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졌던 모습, 자신도 모르게 비틀어진 하나님과 관계를 발견하고 다시 초점 맞춰 하나님 뜻에 순종합니다.

금식하면서 예배했다는 의미는 음식을 포기하여 살아있음, 즉 생명보다도 하나님 뜻에 합당한 인생을 살기 위해 생명을 다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만을 의지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역대하 20장 3절을 보면,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 군대가 쳐들어와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전쟁이 여호와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만 있습니다.’ 에스더 왕비가 민족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삼 일간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왜 금식했습니까?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한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 뜻에 맞추기 위해 몸부림 쳤습니다. 크고 작은 유혹이 왔을 것입니다. 낯선 곳에 정착해서 먹고 사는 문제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어려운 문제들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사람들이 속한 일터에서 그들의 동료들에 비친 모습은 예수 믿는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손해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희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삶의 현장에서 안 믿는 사람이 ‘저 사람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 인정 받기는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 사람으로서 그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어떻습니까? 그냥 와서 구경만 하십니까? 오늘 목사 설교가 어떤가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 뜻이 있습니다. 그 뜻에 맞추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산 제물이 되어 내 생각은 죽고, 살아계신 하나님 뜻만 드러나기를 간구하는 간절한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간절한 몸부림 없으면 자아가 자꾸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제물은 죽어야 제물입니다. 제물이 살아서 예배 시간에도 그 생각이 돌아다니면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인간 본성과 환경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순종할 때, 성령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의 설교가 아닌 하나님 음성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 음성을, 헌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래서 이 곳에 회개가 있고 주님 닮기 원하는 몸부림, 갈급함을 채워주시는 성령의 임재 하심과 그로 인한 감격과 기쁨의 찬양이 넘칠 때 살아있는 예배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사용하셨습니다. 보내는 몸(Sending body)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선교사를 보낼 수 있는 교회로, 세계 선교 사역을 맡길 수 있는 교회로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동안 우리 교회는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와 여러분 속에 전도와 선교에 대한 부담은 사라지고, 우리끼리 교회 나와서 위로 받는 데에 만족하여 돌아간다면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계획하시는 역사 무대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주님 꿈을 꾸십시다. 우리는 정말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젊은이 실업자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일반 실업자 보다 청년 실업자가 늘어가는 것은 사회 문제이기에 앞서 앞날과 미래에 상처가 됩니다. 희망을 잃은 시대를 복음으로 다시 살린 선조들처럼 주님께서 지펴주신 복음의 뜨거운 사랑을 다시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남 달리 많은 청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 청년들 가슴속에 선교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모지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너무 냉담하지는 않았습니까? 선교사를 보내기는 합니다만 마음은 없습니다. 교인들에게 선교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돈 조금 후원하는 것은 선교가 아니고 주님 부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쓰임 받은 것처럼 우리 교회가 버림받지않고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원합니다.

제가 살았던 시카고 교외에 휘튼 대학이 있습니다. 휘튼 대학 본관에 졸업생 명단이 있습니다. 특히 순교한 졸업생 이름에는 특별한 마크를 해 두었습니다. 1949년에 졸업한 짐 엘리어트라는 이름에도 순교 마크가 있습니다. 엘리어트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심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2학년 마치고 멕시코에 단기 선교를 갔다가 남미가 사역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친구들까지 다섯 명이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남미로 갔습니다. 가장 잔인한 아우카족에게로, 얼마 전에도 많은 사람을 죽였던 아우카 족에게 복음이 증거 된다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이라고 기대하며 다섯 명은 정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선교 본부에서 급하게 수색대를 조직하여 밀림에 들어가니 부패한 시체가 여기저기 있습니다. 소지품을 보니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은 무모한 젊은이들이라고 떠들썩하게 보도했습니다. 바로 그때 짐 엘리어트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엘리어트가 말했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코 비극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섭리와 뜻대로 된 것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죽음 2년 후,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엘리자베스 엘리어트와 친구의 누이였던 라이처 자매가 다시 아우카 족에게로 갔습니다.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남편이 순교한 현장에 자신의 심장을 묻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우카족이 주님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잔인했던 종족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종족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진 일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스물여덟 살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떠나 보냈지만, 그의 삶에는 후회함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남편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 복음 증거라는 사명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변해도 잊지 맙시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 지셨을 때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드릴 희생과 헌신을 거절하지 마십시다. 복음의 열정과 사랑 때문에 나를 찾아 자기 심장을 미지의 땅 조선에 묻었던 한 무명 선교사의 편지처럼 오늘 여러분 각자 마음의 편지를 주님께 올려드리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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