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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비결 / 사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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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비결
이사야 43장 1-7절

< 패배에도 뜻이 있습니다 >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 승리의 기쁨과 여운이 한두 달은 그분을 행복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하는 말마다 역반응이 생겨나고, 최고 정점의 공인으로서 말 한 마디, 행동 한 마디에 엄청난 검증이 이루어지고, 가정사가 벌거벗겨지고, 옛날에 사업에 실패하면서 생긴 모습까지 파헤쳐졌습니다. 결국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소리까지 나왔습니다. 지난 몇 달간의 대통령 모습은 행복한 인생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선거에서 패배한 이회창 후보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유유자적하며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을 것입니다. 삶의 여유도 찾고, 책도 볼 수 있는 축복도 누리고, 새로운 무엇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을 것입니다. 지금 그 두 분의 모습을 보면 누가 승리했고, 누가 패배했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인생은 승리와 패배의 게임이 아닙니다. 인생을 승리와 패배의 게임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오직 패자만 있을 뿐입니다. 승리한 사람들도 다 패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하나님의 사명의 현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패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려운 환경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패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승리자와 패배자는 오직 하나님만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역경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역경은 하나님의 프로그램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두려운 순간이 없는 사람은 없고, 두려운 환경에 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인생의 반은 승리이고, 나머지 반은 패배로 짜여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패배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패배의 순간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진짜 패배이고, 패배의 순간에도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진짜 패배가 아닙니다. '패배'와 '패배자'는 다릅니다. 때로 '패배'를 당해도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패배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 삶에서 두려움을 물리치게 하는 것 >

오늘 본문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이방 민족에게 패배해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사 42:24-25)에게 주시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저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는 죽으면 천국에 직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의 삶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패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돈이 없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만은 부요해야 합니다. 왕따 당할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독의 순간에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가지면 됩니다. 귀신 영화 본 후에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허상에 사로잡혀 내 실상을 망가뜨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두려움은 현실입니다. 두려움을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두려운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이 우리는 삶에서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습니까?

1. 첫째, 온전한 믿음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본문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구속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맸다, 우리의 자유를 박탈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속전을 지불하고 구원했다" 즉 "대가를 지불하고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십자가의 피의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구속은 창조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는 말씀만으로 했지만 구속을 하나님이 친히 피를 흘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구원하셨는데 그렇게 구원한 우리를 지속적으로 붙잡아주시고 돌보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1절 하반부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는 내 소유가 되었다! 이제 내가 너를 돌봐주겠다! 너는 내 사랑을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 이상으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의 것인가(Whose am I)?"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너는 내 것이라!"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 선언에는 우리 자신의 위대성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볼펜 한 자루도 유명한 사람의 소장품은 고가에 팔립니다. 왜냐하면 볼펜이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라면 우리는 어떤 존재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가 어찌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고난은 있다 >

물론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1절 마지막에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한 뒤에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도 물 가운데로 지날 수도 있고, 불 가운데도 지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도 고난이 있습니다. 잘 믿어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리는 밟히면 뿌리를 깊이 박고 새 봄에는 더욱 튼튼하게 자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두려움에 빠져 마귀에게 벌벌 기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모욕감을 느끼시겠습니까? 우리는 마귀에게 벌벌 떠는 자가 아니라 마귀가 우리 앞에서 설설 기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마귀가 설설 깁니까? 돈 많은 사람에게 설설 깁니까? 많이 배운 사람 앞에서 설설 깁니까? 검찰 앞에서 설설 깁니까? 대통령 앞에서 설설 깁니까? 마귀는 그런 사람에게는 결코 기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 앞에서 설설 길 것입니다.

또한 희생의 길로 묵묵히 가는 사람 앞에서는 설설 길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는 사람! 인기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인기 없는 곳으로 가는 사람!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 쪽으로 가는 사람! 그런 사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설설 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도 사단 앞에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마십시오.

미국이 왜 월남전에서 실패했습니까? 베트콩 게릴라들의 고도의 심리전으로 용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 월남전에서 왜 한국이 용맹을 떨쳤습니까? "한국군에게 잡히면 국물도 없다. 껍질이 벗겨져 죽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따이한이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했습니다. 승리는 믿음에서 옵니다. 패배는 두려움에서 옵니다. 우리는 사단의 고도의 심리전에 넘어가지 말고 사단이 두려워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빌빌거리고, 비실거리고, 낙심하고 절망에 빠져 있고, 두려워하는 모습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파도가 닥칠 때 배가 피하면 파도가 옆구리를 쳐서 배가 파선합니다. 그러나 선수를 파도 쪽으로 돌리면 파도를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문제가 공격해올 때 피하면 옆구리 급소를 얻어맞고 넘어지게 됩니다. 그때 담대해 문제와 맞서 정면 돌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삶에 용기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그림의 떡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해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자기는 그리스도께 잡힌 존재라는 것입니다(빌 3:12). 자기가 때로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것은 복음의 진보가 된다는 것입니다(빌 1:12). 그 사람을 누가 막습니까? 그 거룩한 사명을 누가 말립니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는 순간 천국에 가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니까 얼마나 멋있고 용기 있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병원에서 진찰할 때 너무 벌벌 떨지 마십시오. 갈 때가 되면 가면 됩니다. 죽더라도 즐겁게 죽을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어떤 분은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오래 사는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갈 때는 가더라도 그날 아침까지 새벽기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소서!"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여러 사람의 신세를 지며 몇 년을 지낸다면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깨끗하게 살다가 가장 적절할 때에 요단강 건넌다면 그것도 또한 큰 축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 문제를 확실히 넘어서서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비행기 안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서 겁에 질려 있습니다. "사고 나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지금 주님에게 가면 주님 만나서 좋고, 조금 있다가 가면 그대로 좋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살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됨을 믿으십시오. 그 믿음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 믿음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2. 둘째,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 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요한 1서 4장 1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왜 삶의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고, 삶을 긍정하고, 감사가 넘치면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하다가 이런 경험을 합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너무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는데 어느새 영혼이 환해집니다. 주변도 환해집니다. 얼굴도 환해집니다.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감사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은 아무리 어둔 세상도, 어둔 환경도, 어둔 영혼도 환하게 만드는 위력이 있습니다.

2주 전에 아버님 사망 소식을 듣고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 햇빛은 보통 때보다 3배는 밝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아버님의 영혼이 천국으로 가는데 찬란한 빛을 뿌리고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비가 온 후에 햇빛이 난 것이 아닌데 창 밖 너머 언덕이 왜 이리 반짝반짝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아버님! 천국에서 뵈어요!" 찬란한 햇빛을 받으면서 아버님을 이 땅에서는 다시는 뵐 수 없다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천국 소망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햇빛을 받아도 은혜가 실감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겠는데,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받는다면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가끔 운전하다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힘껏 찬양합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런 영혼에 어찌 두려움이 틈타겠습니까? 골방에서 기도하는데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터져 나오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그 영혼에 어찌 두려움이 틈타겠습니까?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에 인생의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데 마음이 불안하다고 합니다. 아마 그 사랑은 대개 실천이 없는 사랑일 것입니다. 말뿐인 사랑은 두려움과 불안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오직 실천하는 사랑만이 우리 인생의 어두운 먹구름을 사라지게 만들 것입니다.

3. 셋째, 온전한 소망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심판을 당해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루터기는 남겨놓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회복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 회복 후의 축복은 반드시 이전의 축복을 능가하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소망이 퇴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큰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우리의 소망의 원천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큰 기대를 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소망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낼 때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존재로 큰 기대를 담아 창조하셨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누가 제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까? 돈 많이 번 사람입니까? 성공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돈 많이 벌어 성공한 뒤에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활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영광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없어도 부족해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하나님을 향한 순정과 믿음이 변함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은 어려울수록 교회 봉사를 더욱 열심히 합니다. 어떤 분은 힘들수록 더 말씀을 사모합니다. 어떤 분은 물질이 없을수록 더욱 어려운 분들을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거룩한 부담이 생길수록 그 부담을 느끼며 사명이 새로워집니다. 그런 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분들입니다. 어떤 분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이 누구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가끔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담 주지 마세요." 그 말은 부담이 주어지면 불평하거나 딴 길로 가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담 없이 그 신앙이 행복한 신앙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전도의 부담을 느끼고, 선교의 부담을 느끼고, 구제의 부담을 느끼고, 교회의 책임적인 존재로서 부담을 질 수 있습니다.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부담을 지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부담이 없는 신앙에 성령의 불이 붙는 경우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담을 통해서 일을 하시고, 그 부담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부담을 느낄 때마다 오히려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너지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 입술과 삶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만 나오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지금 내 신앙이 무너졌구나!" 불평하는 사람은 불평할 꺼리만 찾습니다. "무슨 교회가 돈이 많다고 교회에 이렇게 전등이 많아!"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교회가 환해서 아늑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어요!" 역시 최고로 영광 돌리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 목적에서 결코 이탈해서는 안됩니다. 실패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목적이 잘못된 것은 죄입니다. 돈을 왜 법니까? 공부를 왜 합니까?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이 너무 유치하고, 너무 한심하고,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비겁한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 목적이 뚜렷하지 않기에 삶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환경에 따라 수시로 흔들리는 환경의 종이 되고, 결국 두려움과 비겁함으로 점철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영광 돌리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화려한 꿈은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 의식은 없습니다. 화려한 꿈만 꾸는 사람에게는 현실이 없습니다. 그러나 목적 의식을 가진 사람은 현실이 있습니다. 화려한 꿈만 꾸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목적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있습니다.

꿈과 비전이 있다면 현실도 있어야 합니다. 꿈은 화려한데 현실이 없다면, 여전히 게으르고, 여전히 잠을 많이 자고, 여전히 잘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꿈과 비전은 허무한 공상일 뿐입니다. 꿈과 비전을 가졌으면 그 꿈과 비전에 합당한 '부끄러움이 없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없으면 내가 나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고, 결국 인생의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리고 새 일을 행하십시오 >

여러분!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새로운 비전을 가지십시오. 본문에서 조금 뒤로 가면 18-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새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아픔과 상처와 안 좋은 깨끗이 잊어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일을 자꾸 긁으면 새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비듬약 니조랄을 써도 손톱이나 빗으로 머리를 박박 긁으면 머리 표피가 상하면서 비듬은 더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손톱과 빗으로 긁지 않고 부드럽게 샴푸로 머리카락을 헹구듯이 감으면 비듬은 곧 없어질 것입니다. 머리를 긁으면 시원하니까 가끔 손톱과 빗으로 머리를 긁고 싶은 유혹이 생기지만 그 순간을 참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듬은 조금 있으면 저절로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손톱과 빗으로 머리 표피 부분을 긁으면 아무리 좋은 비듬약을 써도 비듬은 없어질 수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도 안됩니다. 과거의 상처 난 부분을 자꾸 끄집어내어 긁으면 그 상처를 결코 치유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은 아예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만 하며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런 마음을 준비해야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새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는데 예수님 믿고 행동 잘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믿고도 다른 사람과 싸운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천국 가서 그 싸운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잘 믿었는데 어쩌다가 부도를 맞아서 빚을 지고 충격 받아 천국에 갔는데, 공교롭게도 빚쟁이도 충격 받고 천국에 갔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빚쟁이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천국이라지만 빚 못 갚은 사람이 불안해서 살겠습니까?

반대로 천국은 모든 기억이 상실되는 곳입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까지 다 사라지면 허깨비만 남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 살면서 가졌던 아름다운 추억들, 단란했던 시간들, 행복에 겨워했던 일들까지 다 잊어버리면 과연 나는 정말 나로서 살아가는 것입니까?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천국에서 다른 '나'로 산다면 아무리 행복하게 살아도 그게 행복일까요?

천국의 모습이 어떨지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의 안 좋았던 일은 신비한 능력으로 다 잊혀지고, 좋았던 기억들은 다 남아서 모두가 행복에 겨워 살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 논리를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천국의 상태가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려면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은 다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만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지금 새롭게 시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준비되면 언제나 꿈과 같은 새로운 역사를 펼쳐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새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마음속의 절망입니다. 그 내부의 적이 진짜 문제입니다.

이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면 희망이 있다"고 우리는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기회의 문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는 너무 순적하게 교회 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같이 점잖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는 교회 이전을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작정 헌금 한번도 하지 않고 이렇게 순적하게 교회 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계기를 통해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배우게 되었습니다.

너무 어렵습니까? 너무 힘듭니까? 과거의 그 후회되는 일 때문에 손에 일이 잡히지 않습니까? 그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때 희망을 말하십니다. 희망을 선포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고 나가보십시오. 그리고 기다리면서 묵묵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꿈꾼 것보다 훨씬 더한 축복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지고 삶의 온갖 두려움의 순간들을 물리치고 항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행복하게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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