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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격려와 충고 / 눅 17:11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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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격려와 충고
성경 : 누가복음 17 : 11 - 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변함없는 기도의 제목을 드리며 한 주일을 지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성도들을 위험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모든 질병으로부터 치료받고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에 행복을 주시옵소서.
우리 서울남부교회 성도들을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왜 하나님이 원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지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악은 언제나 철저하게 심판받았으며, 악인의 종말은 비참했습니다.
죄인은 반드시 후회했으며, 세상을 따라 산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생을 한탄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성도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는 후회하지 않고, 하나님께는 축복받은 인생을 살고, 모든 가족 이웃들에게는 소망과 사랑을 주는 인생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 삶입니다.

사람에게 육적 삶이 있습니다. 혼적 삶이 있습니다. 영적 삶이 있습니다.
육적 삶은  말 그대로 육체를 가지고 사는 것이고,
혼적 삶은 정신적인 것으로 지식을 가지고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고,
영적 삶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삶을 조화를 이루어 살아야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육적 삶만 가지면 동물과 같습니다. 아니 짐승만도 못하지요. 육적 삶에 지혜가 들어가니 정말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혼적 삶만을 살아서도 안됩니다.

사람은 창조주의 창조 의도대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체적 삶과, 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혼적 삶과,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필연이 현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때가 다가오면 우리는 미래를 소망으로 바라보고 믿고 바울 사도와 같은 고백,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 나를 위해 에비하신 면류관이 있구나”하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꼭 이같은 고백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축원합니다.

그리고 누가 얘기한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영원히 가지고 가는 것은 믿음 밖에 없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지고 온 것도 없습니다. 가지고 갈 것도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믿음입니다.
딤전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러면 어떻게 영적 삶을 살 수 있을 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무엇보다 예수님과 만나는 생활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진솔한 대화를 해보십시오.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사는 사람이 잘못하고 있는 사람일까요?, 잘하고 있는 사람일까요?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잘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자기 하고 싶은 데로 살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롭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만용이며, 그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배짱이 같은 사람입니다.
겨울을 준비하는 사람은 봄에 벌써 곡식 씨앗을 뿌립니다. 봄에 벌써 여름 장마를 대비합니다. 하나님과 거리를 두는 사람은 눈 앞의 홍수와 겨울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수학자요 과학자인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참된 종교 없이는 그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 신을 믿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삶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얘기를 남겼습니다.
「이 세상은 신이 있든지 없든지 둘 중에 하나다.
  만약에 신이 없다면 그것은 그냥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러나 신이 있다면 신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불행을 겪고,
  신이 있다고 믿은 사람은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있다고 택하여 사는 것이 현명하고 옳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한마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은혜이지 이성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은 정욕이지 이성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여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다.」
파스칼은 위대한 과학자이며 깊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의 외침은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둥병자의 기적은, 구원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부모는 위인전을 아이들에게 많이 읽혀야 합니다. 역사를 많이 알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컴퓨터를 하는 아이가 만들어진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고 자기가 만들어서 컴퓨터를 사용하겠다고 하면 좀 이상한, 확실하게는 바보입니다. 자기가 만들어 언제 사용합니까 ? 그런 기술이나 자본 있습니까 ?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들어 놓은 것을 바탕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게 현명한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며 그 바탕 위에 우리 인생을 그려 나가야 합니다. 그게 정확하고 빠르고 확실합니다.
성경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을 세상을 다 살고 나서 너무도 장엄하게 후손들에게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인생을 헛되고 헛되도다고 말하며 현명한 삶의 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로몬 뿐 만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고 간 모든 사람들이 교훈으로, 또는 그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삶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곧 다가옵니다. 눈에 훤히 보입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지나 간 역사 속에서 제 멋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 회한과 허무와 미래에 대한 무서움으로 몸부림 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도 있습니다. “내 인생 간섭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살 거예요.” “제 식으로 살 거예요.” 그런 자녀가 있다면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어떤 연유로 그런 말을 했든지 간에 좋은 상태가 아닙니다. 반드시 후회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주님과 만나는 삶이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영적 삶이란 영이신 하나님과 매일 만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영적 성숙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성숙했다는 것이고,
영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여러분에게 “영적 삶을 사세요” 라고 하면 “하나님을 섬기며 사세요”라고 받아 드리면 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세요?”라고 말하면 무슨 말이겠습니까 ? “하나님과 제대로 관계를 가지세요.”라는 말입니다.“
“영성을 개발하세요?”라고 하면 무슨 말로 알아 들여야 합니까? “하루가 다르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세요”라는 말입니다.

자 우리 서로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눕시다.

2. 주님으로 부터 격려를 받는 생활을 하십시오.
격려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게 만듭니다. 격려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 주며 “잘하고 있구만”해주면 생기가 돌고 살 맛이 나고 가슴이 두근 거리고, 코가 벌름벌름해지며 ㅎㅎㅎㅎ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격려해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얼마나 살 맛납니까 ?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격려해줍니까 ?
할려고 노력하는 사람, 열심히 하는 사람, 감사를 할 줄 아는 사람, 능력이 되지 않은데도 땀을 흘리며 노력하는 사람을 격려해 주지요.
절대로 빈둥빈둥 거리는 사람, 요령을 피우는 사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향해 “음 잘하고 있구만, 그래 좋았어”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주님이 격려해 줄 것 같습니까?
.........................................................
여러분에게 지금 이 시간 주님이 어떻게 해주실 것 같습니까 ?
주님이 격려해 주실 것 같습니까 ?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
만일 주님이 주시는 격려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분은 뭔가 인생의 방법과 자세, 모습을 수정해야 할 분입니다.
여기 진리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면 할수록 축복이고, 기도하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할수록 저주입니다. 인생의 가늠자를 기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 가운데 기도하면서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 빨리 청산하셔야 합니다. 청산해야 할 것을 가지고 있으면 두고두고 불행이 되고 저주가 됩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조그만 일도 기도하면서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며 삽니다.

오늘 본문의 문둥병자는 감사할 때 격려를 받습니다. 그 격려는 구원의 선포였습니다.
주님은 감사를 아는 자에게 “아홉은 어디 있느냐 ? ”고 물으며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격려는 축복이었습니다.
사람은 감사를 하면 좀 못해도 격려를 받고 감사를 모르면 잘해도 격려를 받지 못합니다.

3. 주님으로부터 충고도 받아야 합니다.
충고는 용서의 선언이며, 발전의 기회이며, 도약의 찬스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아무에게나 충고해서는 안됩니다. 충고는 연장자가 년소자에게, 지도자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윗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건의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분수를 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동일하게 묻습니다. 충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충고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충고하지도 않습니다. 찾아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충고를 반복해 들으면 안됩니다. 게으르고 악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고를 들을 때면 억하는 심정을 가지고 대항한다든지 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되고 자신을 뒤돌아보며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잡고 새로운 발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더 격려하실 것입니다. 사람도 충고를 해놓고 그 충고를 받아들여 열심히 변화한 사람을 보면 더 애정을 갖습니다.
그러나 충고를 들을 때 자신의 잘못과 실수, 혹은 허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아셔야 합니다.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고는 충고를 재미로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충고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없습니다.
충고는 무엇인가, 어딘가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충고는 너무하다 싶을 때 그것으로부터 되돌이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고 받는 사람이 충고를 발전과 변화로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과 나쁜 감정으로 받아드리면 스스로 용서받을 기회를 차버리고, 도약과 발전의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가운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충고가 꼭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을 행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 겉 다르고 속 다른 외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충고는 성경의 충고입니다. 말씀을 듣거나 묵상과 읽음을 통해서 충고를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스스로에게 찔림이 옵니다. 그리고 그 찔림의 강도가 약간 심할 때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충고로 알아 차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압니다. 이럴때는 겸손히 무릎을 꿇고 충고를 감사함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설교자의 멧세지 가운데 격려도 있고, 충고도 있습니다. 특별히 주간성도의생활고백서가 우리에게 격려도 주며, 충고도 줍니다.
저는 매일 경건의 시간인 주간성도의생활고백서를 작성하는 시간에 성도들에게 변화와 기적, 그리고 영적 성숙이 일어나기를 축원드립니다.
주간성도의생활고백서는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믿음의 단계를 넘어선 따름 즉, 순종의 단계를 가져오게 합니다.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성도가 승리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려면 믿음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을 하루하루 삶에 실제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변함없는 신앙 비결이 바로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매일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면 그들이 하루에 3번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두 가지 개인적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주일성수 하는 것과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이 한주간도 여러분 모두의 삶에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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