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가 희망입니다 - 왕상 18:30-40

  • 잡초 잡초
  • 508
  • 0

첨부 1



† 말씀 : 열왕기상 18 : 30-40
† 제목 : 교회가 희망입니다.

미국 CHicago에는 수만 명이 모이는 월코크릭 컴뮤니티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를 섬기는 "빌 하이벨스"목사님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분입니다. 그 분이 2001년 9.11테러로 폐허가 된 뉴욕의 무역센터 현장을 방문하였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참혹한 장면에 다만 "이럴 수는 없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가족을 찾아 울부짓는 사람들과 잿더미가 된 건물의 잔해에서 타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슬픔에 북바쳐서 "이럴 수는 없어"만을 되 뇌이던 하이벨스 목사님의 입에서 일순 이런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교회만이 세상의 희망이다. 교회만이 세상의 희망이다> 슬픔과 분노 절망과 고통의 현장에서 빛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극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차마 눈뜨고는 바라볼 수 없는 참혹한 슬픔의 현장에서 확인 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5월 마지막 주일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희망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처한 가장 어둡고 힘든 고통의 때에 오직 교회만이 희망임을 선언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 아합은 백성을 철저히 핍박하였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잔인한 압제는 해가 거듭 될수록 더욱 악하여만 갔습니다.
특별히 그의 아내 이세벨은 이방 여인으로 철저한 바알 숭배자로서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으며 북 왕국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의 온실로 만든 여인입니다. 이세벨은 남편 아합왕 보다도 더욱 잔인하게 백성을 괴롭혔고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종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북 이스라엘 땅에 3년이나 계속하여 가뭄이라는 징계를 내리심으로, 백성은 도탄에 빠져 절망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갈멜山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게 됩니다. 먼저 바알의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신을 부르며 응답 호소 하지만 아침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저녁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피가 흐르기까 몸을 상하게 하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18:29절에 보면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소리도 없고 응답도 없고 돌아보 자도 없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없고, 없고 없더라 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상의 무능함과 우상의 무가치함과 우상의 허무함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악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TV 프로를 보는데 어느 시골에 있는 소가 혀를 내어 코를 핥을 때마다 목탁을 두드릴 때 내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중이 와서 그 소리를 듣더니 하는 말이 조상이 명망 있는 중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를 내는 소를 구경 왔던 람들이 엎드려 소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인간이 하나님 모면 저 지경까지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유치한 종교는 유치한 인생을 만듭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본문 30절에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백성을 가까이 불러 놓고 무너진 제단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성을 가까이 부른 것은 저들로 하여금 바로 보게 하고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바로 보여 주고 확실히 알게 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바로 하나님의 제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길은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 다시 쌓는 길 밖에 없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31절에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언약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32절에는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 눈앞에서 돌 하나 하나를 쌓아 올리는 것은 "우리의 사는 길은 이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이것뿐이다"라는 메시지를 백성들의 가슴에 심고있는 것입니다. 해가 기울어 가는 석양 저녁 소제 드리는 시간.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저녁 소제 드리는 일은 옛일이 되어 벼렸지만 바로 그 시간에 제단 쌓는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이 길뿐이다. 우리의 희망은 이것 밖에 없다고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의 행위는 바로 이스라엘의 희망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는 길은 하나님을 바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소망이요 교회가 우리의 희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LA복음 대학교 집회를 마치고 뉴욕주 알바니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생명샘 교회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은 제 둘째 아들 집에 머물렀습니다. 저녁이 되면 한국 시간으로 아침이니까 컴퓨터에서 조간 신문을 제 아들이 빼다 줍니다. 요즘은 지구의 어디에 있든지 컴퓨터만 있으면 조국 소식을 같은 시간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문에 난 기사는 저를 슬프게 하였습니다.

데모 아니면 구속 사건이고 뭐하나 흐믓하고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교회가 희망이다>라는 생각이 뜨겁게 다가 왔습니다. 거대한 나라 미국에서 조국을 바라보니 너무나 왜소해 보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들을 보니 속이 상하지만 하나님 바로 믿을 때 임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생각하니 제 가슴에 불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교회가 희망입니다. 그것을 엘리야가 보여 주었습니다.

본문 36절과 37절에서 엘리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제단을 수축한 후에 엘리야는 그 제단에 엎드려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기도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습니다. 본문 38절에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①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다. (전능하신 분)
②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주목하신다. (대하 16:9)
③ 하나님은 제단 즉 교회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

그 결과 어찌 되었습니까?
본문 39절에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희망인 이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으로 불의를 바로 잡고 백성을 고칠 수 있습니까? 교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런데 가정이 점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거의 50%에 가까운 가정이 이혼을 하고 30%의 아이들은 부모가 누군지 모르고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예입니다만 우리나라도 거의 그 수준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성이니 교육이니 해보아야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가정이 바로 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바로 세우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입니다. 교회가 희망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인생이 하나님께로 갈 때에만 바로 살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이 하나님께 있을 때 세상의 모든 문제는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 문제도 가정 문제도 교육 문제도 하나님께 대답이 있습니다. 제가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1950년 7월에 어느 날 경기도 어떤 읍에서 인민 재판이 열렸습니다. 6.25가 나자 인민군에게 마을이 점령당한 것입니다. 장소는 초등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지주로서 소작농을 착취해 먹었다는 뚱뚱한 사람하나가 인민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주는 오랏줄에 묶였고 얼굴은 초췌하였습니다. 누군가가 그의 죄목을 읽었고 결국 반동분자라는 결론이 내려 졌습니다. 인민의 이름으로 때려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옳소"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몽둥이를 들고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지주의 동생이었습니다.

마침내 동생이 형을 때려 죽였습니다. 몇 달 후에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그 해 9월에 유엔군과 국군이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그러자 그 동생은 재빨리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일도 다 잊혀 졌습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그 동생이 나타났습니다.

머리와 수염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으며 얼굴도 창백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때려죽인 형님 집 마루 밑에 숨어서 몇 년을 안전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못된 놈을 숨겨놓고 보살펴 준 사람은 바로 그의 형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그렇지 시동생과 형수가 못된 짓을 했겠지 라고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형수가 동네 사람들에게 한 말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제가 남편과 동네 여러분께 큰 죄를 지은 여자이지요. 하지만 용서해 주세요. 저에게 죄가 있다면 예수 믿은 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신 말씀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시골 교회 집사님은 울면서 그렇게 간증하였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며 여기도 요셉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산적한 사회 문제를, 이 비뚤어진 세상일을 어떻게 고칠 수 있습니까? 십자가로 가능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희망입니다.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