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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 행 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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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37~40 
제목 /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방문자 여러분, 우리는 요즈음, 5월 축제 이후, 기독교 신앙의 초보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주제로 그동안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하는 주제로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애매모호한 일이 아닙니다. 아주 분명한 일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시간을 요하는 작업은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라도 여러분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주 동안 살핀 메시지에서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고백하는 “거룩한 공회” 교회의 일원이 됩니까? 한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에 따라서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이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할 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됩니까?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됩니까?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답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 사람이, 어느 순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 한 번에 3천 명의 교인이 더해졌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고, 그들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전에는 교회에 속하지 않던 무리들이 그 설교를 듣고 교회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속했으며 무엇을 믿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2장에서 설교한 베드로는 나이가 많아서 뒤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 3:15).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서 우리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종교적인 문제들을 생각하고, 어느 정도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며,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그냥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지금까지 있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옮겨간 다음에 비로소 전에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가운데서 나는 이전에 이렇게 살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산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여러분의 신분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글쎄요 저는 예수 믿는 집에 태어났고요 전에도 착했던 것 같은데요.. 그러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죄 중에서 태어난다고 합니다. 죄 중에 태어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신앙의 가정에 태어나도 죄인으로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잘 알 수 있습니까? 아이들이 하는 것 보면 알지요. 키워보면. 사람이 죄 중에 태어났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신학교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결혼해서 아들딸 낳아서 키워보면 여러분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나쁜 말 먼저 배워 오고, 생각이 자기 중심적 이잖아요. 뭐든지 자기먼저, 엄마가 아무리 바빠도, 다림질 하고 있어도 아이가 나 먼저 도와달라고 울면 달려가야지 어쩝니까? 커서 말들 하고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볼 때도 죄인이라는 특징이 너무도 많이 드러납니다.

저는 신학교 다니면서 사람이 죄 가운데 태어났다는 것을 시험치기 위해서 공부를 했지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키워보니까 목사 집에 태어난 두 아들이 둘 다 죄인으로 태어나더라고요. 서로 귀찮게 하고 못할게 굴고, 이런 것 안 가르쳤는데도 잘 하잖아요. 제가 그래서 아들들한테 가끔 이야기를 했지요. “얘들아 너희들은 서로 못하게하는 일도, 귀찮게 하는 일 이런 것은 노력할 필요가 없다. 너희는 전문가다. 저희들은 태어날 때부터 전문가로 태어났으니까 서로 못살게 구는 것은 노력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서로에게 잘 하려고 그러고, 세워줄려고 하는 일에 노력해라”그랬더니 갑자기 형이 동생을 부르더니 “야 일어나” 이러더군요.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아빠가 너보고 세워달라고 그랬잖아”

하여간 우리는 날 때부터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 짓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하고 적어도 그 면에서는 모든 인생은 다 전문가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영역에 살다가 이제 다른 영역으로 옮겨오는 것입니다. 옮겨서 와서 보니까 그쪽에, 옛날에 살던 거기가 어두움 속의 세상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옮겨오기 전에는, 여기 머물러 있을 때는 그것이 세상에서 전부인줄 알아요. 사람은 모두 다 그렇게 사는 줄 압니다. 그렇게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속해있으면 모두 그렇게 살면서도 다 자기 잘난 맛에 살거든요. “내만큼만 해봐” 그런 자부심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선을 사람들이 넘어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때 내가 어처구니없이 교만한 삶을 살았구나 이게 비로소 깨달아지면서 선을 넘어와야만 그전에 살던 영역의 삶이 어떤지를 압니다. 그러니까 자기 삶에 대해서 전에 내가 이랬는데 지금 이렇다 이 말을 할 수 없으면 위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못했을 수 있습니다. 이전부터 착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은 전에 내가 죄악 가운데 살았습니다. 전에 나는 세상만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다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생각이 바뀌고 시각이 바뀌고 관점이 틀려지고 행동이 달라진 사람 그가 신앙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변화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물론 베드로가 설교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이 설교를 들은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듣는다고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뀌는 그런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거든요.

베드로가 “지금 시간이 아홉신데 우리보고 술 취했다고요?” 말 안돼는 소리를 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일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을 때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동이 있어야 됩니다. 뭔가 부딪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아니면 설교 듣는 것만 가지고는 사실 3천명이 변화되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성령님이 역사를 했다 그렇게 우리가 말하지요. 성령께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를 해야만 이러한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설교가 모범적이었어요. 아침 아홉시에 술 취한 사람이 백 명도 넘게 그렇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말세에 내가 모든 육체에 남녀노소 구별 없이 부어주겠다”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 진 것 틀림없는 일입니다. “너희는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렸다”고 그가 살아날 것에 대해서 선지자 다윗이 누누이 설명한 것이 성취되었다. 다윗이 그렇게 시를 썼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묘는 우리 가운데 있으니까. 그 말은 묘 안의 다윗은 썩어버렸으니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오실 그분을 향해서 한 말이다. 바로 예수님이다. 누가 반박할 수 없는 논리적인 설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삼천명이 순식간에 회개하고 돌아온 것은 성령님이 역사를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행 2:37). 구약에 말씀을 가지고 설명해 주는 일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은 그건 설교자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연약한 한 인간의 말을 사용하셔서, 듣는 자의 마음과 양심에 그 말이 박히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사용하시고 그들의 삶 속에 적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이 빈정대는 것처럼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기를 멈추고 마치 지적인 자살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까? 이상태로 더 이상 생각은 안하겠다. 눈 딱 감고 믿기만 하겠다. 그게 기독교입니까? 성령께서 강하게 찾아오시면 오히려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맨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그렇게 베드로가 설교를 하니까 그 말을 듣고 생각을 해보니까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에게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보내신 그분을 우리가 죽였으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자기들의 한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 마음에 찔려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온 것입니다. 그게 성령이 역사하는 설교와 보통 설교와의 다른 차이인 것 같습니다. 보통 설교는 열심히 설교자가 목이 쉬어가면서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설교를 했는데도 설교 다 끝나봤자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가 많은데 그렇죠? 베드로가 설교를 했을 때는 설교가 다 끝나기도 전에 중간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설교를 더 이상 도무지 들을 수 없어서 자기들이 한 죄악이 너무 자기들의 양심을 괴롭히니까 듣다말고는 “형제들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렇게 물었습니다. 반응이 있는 거지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불과 몇 주 전에 “이 사람을 없이 하소서.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입니다” 당대의 유대나라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 정치가들 성직자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학자들 이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 졌습니다. 어디 졸업장도 없는 친구가 나타나더니 하는 말말이 옳거든? 하는 일마다 착한 일만 하거든? 그러면 종교적인 행위를 전매특허 한 것처럼 앞장서서 성직자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입장이 난처해진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충동질을 했습니다. “보시오 저 사람이 지금 자기가 왕이라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계속 되면 로마 정부가 좋아할 리가 없소. 한사람 제거해서 민족 전체가 편안한 것이 좋지 않겠소? 그렇게 모의를 한 다음에 사람들을 풀어서 여론을 조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해가지고 결국 빌라도로 하여금 양심을 속이는 재판언도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 무리들은 그 얼마 전에는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를 에워싸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노래하던 무리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얼마 전에는 꼭 같은 사람들이 그 며칠 전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한 줄 압니까?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니까 누가 먼저 했는지는 모르지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하면서 모두 찬양을 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 꺾어서 깔고 귀한 임금님 오시는 길이니까, 가지 꺾으러 갈 여가가 없는 사람들은 자기 옷을 펴서 왕이 그 길을 지나가도록 싸인 공세 하는 것 이상으로 열광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하고 노래했던 사람들입니다. 가끔 개개인은 보면 똑똑한데, 한사람 한사람은 다 똑똑 한데 무리에 휩싸이게 되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리석은 것 같아요. 군중은 어떤 때는 “왕이여” 하고 찬양하다가 어떤 때는 “십자가에 죽이소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이것이 군중심리 인 것 같습니다. 남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고 남이 외치는 대로 따라 소리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지금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첫째 변화는 바로 그들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죽이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분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악한 세상의 주된 특징은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할 수 없으며, 군중심리에 휩싸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과장합니다.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자신을 조종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권세들의 희생물이 되어있습니다. 한번 더 보실까요?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다가 풍랑을 만나서 멜리데라는 섬에 표류를 해서 기착을 했습니다. 모두 쫄딱 비 맞은 병아리처럼 모두 그래 있으니까 그 섬에 사는 원주민들이 불쌍해서 불을 피워주는데, 사람들마다 검불을 주워 와서 불 위에 얹고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바울이 한 묶음 나무를 들고 와서 얹었는데 거기에 독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게 뜨거우니까 나와서 바울을 물었어요. 바울을 무니까 그것을 봤던 섬사람들이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저 사람은 틀림없이 죽어야 될 사람이야 바다에서는 간신히 구출 받았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저 사람을 죽게 하는 도다” 그래서 독사가 물었다는 겁니다. 살인자라는 겁니다. 큰 죄를 지었으니까 태풍에서부터 구출 받아서 독사에게 물려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분 지나서 쓰러져야 되는데 쓰러지지 않고 불을 쬐고 있으니까 사람들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이 사람은 신이다!ꡓ하고 소리를 칩니다. 군중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줄 모르고 무분별하며 무지합니다. 예루살렘의 무리가 주님을 무시한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도 기독교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역사하기 시작하면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큰 변화가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그리스도인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교라는 “아편”을 삼킨 자들이라고 조롱합니다. 기독교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지 못하게 하며 현재의 고통을 잊게 하고 장차 올 천국의 복만 바라보게 만드는 마약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거짓 종교는 마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 종교는 언제나 비지성적입니다. 두려움의 종교, 의식의 종교, 교리와 진리가 빠진 종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장엄한 것에 두려움을 느낄 뿐입니다. 이런 종교는 틀림없이 민중의 아편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타당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가 미치는 첫 번째 영향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큰 사건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회개했으며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동일한 역사를 합니다. 오늘 날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잠시 생각하다가 “아이고 귀찮아. 켜” 술 마시거나 텔레비전을 봄으로써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무엇을 생각하게 하십니까? 맨 먼저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보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그 다음절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에 대해서 자기들이 어떤 몹쓸 짓을 했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찌 할꼬”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삶, 예수그리스도의 죽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그의 승천, 그의 영광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그러나 거짓 종교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잘난 사람이 아무리 있어도 그 사람이 영광 받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광 받으시는 곳입니다. 찬송 보십시오. 찬송은 전체 다 주님을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터지면 사람들은 누구를 쳐다봐야 됩니까? 모두다 주님을 쳐다봐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다운 교회요, 제직회다운 제직회, 당회다운 당회 되려면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가 있으면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을 향해야 됩니다. 담임목사를 쳐다보든지, 유력한 장로를 쳐다보든지 하면 여러분은 주어진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인인 곳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역사 하실 때에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일은 저질렀는데 어떻게 뒷감당해야 되겠느냐” 그렇게 지금 묻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설교를 듣는 중에 임한 성령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이 우리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더 이상 구경꾼이 아닙니다. 더 이상 비판자가 아닙니다. “교회가 뭐하는 곳인지 한번 가보자” 그건 아직 구경꾼의 입장입니다. “아이쿠 가보니까 별 수 없더라” 비판자의 입장입니다. 전에는 그런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이지만 “이 모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하고 관계있는 이야기구나” 그렇게 듣기 시작하면 그건 이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한테 하는 말처럼 들리면 이제 귀가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던 사람들은 몇 주 전만 해도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소리친 사람들입니다.

“없애 버려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바라바를 석방하라! 예수가 누구냐? 대체 스스로 해방자라고 소리치는 이 정신병자 하나 대문에 우리 민족 전체가 위협을 당해서 되느냐?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쉽게 제거해 버린 예수가, 자신들의 삶에 중요한 분이라는 것이 느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깨닫고 나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걸 알게 되었으니까 설교자의 설교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두 “어떻게 하면 좋을꼬 형제들아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그래 설교가 중단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성령께서 역사하면 그냥 왔다 갔다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귀에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던 사람이 “예수님이 누구실까?”라고 질문을 하게 되면 이제는 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적 없어요. 나는 그렇게 잘못한적 없어요. 여러분 그렇게 해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Yes" 하던지 "No" 하던지 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했다고 해서 무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던지 아니면 그분을 무시하던지 둘 중의 하나가 여러분이 택하는 입장입니다. 그분에 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에 결코 설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거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서 중립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글쎄요, 저는 착하게 살고 있습니다. 간음한 적도 없고요 도적질 한 적도 없고, 술 취한 적도 없습니다. 이런 짓은 하려고 생각도 안 해봤습니다. 저는 정말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들 보면 좀 도왔으면 하고 생각해 봤고요. 도덕적으로 제 할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게 뭘 더 요구하십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은 그리스도를 전혀 생각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희망 없는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라 그 당시에 제일 잘 나가던 종교인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야 말로 예수님에 대해서 귀 기울이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뭔가 잘못을 잡으려고만 생각을 했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 삶에 필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한번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갑자기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이신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인 그분을 향해서“십자가에 못 박으라”하고 소리 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살려주시려고 살길을 주셨는데 그것을 스스로 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발등을 찍고 싶은 후회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라고 고통가운데서 소리 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지옥의 아비규환을 연상시키는 고통 가운데 터져 나오는 비명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전에는 생각 없이 외치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깨달음으로 연결되고, 죄에 대한 깨달음은 두려움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런 일을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세상의 구원자이신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자기들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행 2:37).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적인 관심이 아닙니다. “그래,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리가 좀 한 것 같아. 너무했어. 그 사람은 와서 좋은 말 하고 좋은 일 했는데 우리가 너무 매몰차게 몰아부쳤지?”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쩔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들은 죄를 깨닫고 두려웠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사실은 그날 삼천 명이 돌아온 그 때의 상황은 순간적이었습니다. 아주 순간적으로 섬광처럼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 중에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느 순간 한 시점 그때 밝은 빛이 갑자기 확 비치는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인 경우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가지고 어느 날 보니까 나야말로 대책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들도 있지요? 대체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생각하는 과정들을 겪습니다.

“왜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나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살게 될까?” “나는 왜 교회는 다니면서 성경책도 읽고 싶은 생각이 없지?” “나는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내 생각의 중심에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전에는 해 본적이 없는데 이제 그런 질문들을 하기 시작하면 이제는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전에 던지지 않았던 질문들이 이제 생기기 시작하면 이제 자라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아이들이 자라기 시작하면 “엄마 이게 뭐야?” “이거 누구 거야?”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뭔가 의문이 시작되면 여러분은 이제 일 단계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기본 과정을 지금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없이 교회를 나오지만 아무런 특별한 관심이 없고 예배시간 되면 “목사님 오늘 몇 분에 끝내줄 것인가?” 그것만 생각하고 있고 교회 오는 유일한 목적이라고는 집에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은 아직 시작 단계도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도 나온 것은 잘 한 것입니다. 나와서 듣다가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이 또 갑자기 듣게 해 주실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니까. 그래서 누구든지 텔레비전 안보고 나온 것은 잘 한 것입니다. 와서 엉뚱한 생각하고 있고, 사업구상 하고 앉아있더라도 나온 것은 일단 잘한 것입니다. 듣다가 보면 어느 순간 무슨 소리가 귀에 들어가서 다시 변하게 될지, 인생이 바뀌게 될지 인생역전이 될지 누가 압니까? 그러니까 잘 오셨어요.

2천년 전에 세상에 보내신 구원자 하고 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왜 세상 역사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과 후로써 나누어지고 있을까? 그분이 그만큼 중요한 분일까? 이런 생각들을 해본다는 것, 그것이 성령께서 역사하기 시작한 첫째 증거입니다. 예전에는 전혀 그런 질문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제 한 단계 나아가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복음서를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울산교회 담임목사는 언제나 사람들 붙들고 앉으면 맨 처음에 만나면 질문은 누구를 만나도 마찬가지인데 “당신 언제 교회에 첫발을 디뎠습니까? 언제쯤 신앙이 자리를 잡았습니까?” 물어본다고요. 제가 질문은 바꿀 수 있지만 내용은 꼭 같은 질문이거든요. 그러고 나면 또 하나 묻는 게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대답을 한번 해보세요. “성경을 몇 번쯤 읽어 보셨습니까?” 그러면 성경을 열심히 읽던 사람은 분명해요. “다섯 번, 여섯 번 읽었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머리 극적 극적 하면서 여기저기 보긴 했는데.... 말이 많아지면 제대로 안 읽은 사람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신앙은 성경이라고 하는 토양에 부리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을 한번도 안 읽어보고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는 믿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한번도 안 읽어봤지만 벌써 삼십년째 교회를 다니고 있고 주일마다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보다 좋은 교인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경 한번 제대로 안 읽은 사람을 제대로 된 신자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래서 청년들 보고 성경 네 번 읽고 나한테 주례 받으려고 와 그렇게 압력을 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적어도 성경을 한 네 번쯤 읽었다는 것, 그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겁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창세기- 그건 재미있으니까 좀 넘어가요. 출애굽기 한 25장 까지도 넘어가요. 26장, 27장, 28장 성막 짓는 이야기 나오고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 속에서 여러분 그 코스를 통과 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거든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광야 40년 기간을 못 통과합니다. 그래서 나는 오경을 다 읽고 성경을 쭉 읽은 사람들 만나면 이 사람들 하나님 은혜 받은 사람이구나. 이게 확신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다음에 만나서 또 성경 몇 번 읽었습니까? 그러면 머리 긁적이지 말고 지금 가서 책 펴서 오늘부터 좀 열심히 보기로 해요. 그렇죠? 연말에 가서 신구약 성경 읽었습니까? 집사님 표시 하십시오. 해서 한번도 못 읽은 사람은 전체다 서리집사 재임용에서 탈락해도 목사가 심한 건 아니지요? 그렇죠? 집사가 심한거지 그렇죠? 성경도 한번 안읽고 집사를 삼년 십년 이렇게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워낙 세상이 혼탁해져서 누구 말마따나 1급수에만 있지 않아서 말이죠 어떻게 하기가 쉽지를 않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가면 우리도 그래야 안 되겠습니까? 권사, 권찰 집사 이렇게 직분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 봉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주일날 고작해야 거울 앞에 앉아서 화장하고 나오는 일밖에는 안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왜 계속해서 집사라고 불러야 되는지 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요 성경 한번도 안 읽은 사람들은 자기 신앙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심지어 좋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꽝”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이런 질문들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무관심 했을까? 내 문제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9:10).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한테 필요하다는 생각 해보신적 있습니까? “나는 예수님 없으면 안돼요”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없이 못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니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자주 생각합니까?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세상이 오늘도 유지 되는 것은 누가 붙드는지 알고계십니까? 자연과학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의 눈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현상을 보면 그게 경이롭고 완벽해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것이 우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지금 무엇 하면서 살고 있지? 이런 생각들 하지요. 그저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한테 열심히 가르치는 것은 1등해, 남보다 빨리 달려야 돼, 열심히 뛰어야 돼, 먼저 잡아야 돼, 왜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서 먼저 붙들어야 되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가르쳐않는다니까요

더 나아가서 여러분은 삶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별반 생각하지 않아요. 주위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도 심각하지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아요. 기껏 상가 집에 가서 고스톱 치는 것, 그게 보통 사람들 하는 일들 아닙니까? “죽으면 인생 끝이야” 그렇게만 생각합니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엄숙함을 느끼게 하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삶에 대해서처럼 죽음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십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지만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다음은 심판으로 이어지는 직행 코스입니다. 영혼은 죽음 다음에도 계속 존재하며,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 존귀한 존재입니다. 왜 그렇습니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생명과 영혼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끝났을 때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무엇 하다가 왔어? 어떻게 인생을 살았어?”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인생은 엄숙하고 장엄한 장례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너머가 있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영원한 두 갈래의 운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있고요. 그분 앞에서 쫓겨나는 것이 있습니다. 의인들과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히 12:23)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서 기쁨을 누리는 지극한 기쁨의 상태에 들어가는가 하면 아니면 괴로움과 비참함과 고통 속에서 영원히 후회의 자리에 또 여러분은 갈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무지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하나님의 성령에 관한 일을 이야기를 하면 저기서 앉아서 “아이고 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저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어, 미련해” 이러고 있다니까요.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미련한 사람입니다. 미련한 사람 눈에는 미련한 것 밖에 안보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의 잘난 사람들이 아무도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왜 그들이 몰라봤습니까?지성(知性)이 부족했습니까?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리의 목수로만 알았습니다. 그까짓 인생 하나 없애버리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사는 이것을 계속 누릴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예루살렘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무지와 영적 죽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 변명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들은 순식간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큰 죄를 범했으나 여기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주님 앞에 울부짖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어디로 갑니까? 우리들 각자에게는 마지막 묻힐 곳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묘지가 있으며, 여러분은 그곳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곳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나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마지막 여행을, 그것도 혼자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어디로 떠납니까? 죽음은 여행의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확실하고 피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길을 떠나기 때문에 떠나지 아니하려고 버둥대면서 죽어서 예수를 모르고 죽는 사람의 시체는 그렇게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정말 죽을 용을 다 쓰고 가지 아니하려고 발버둥치다가 죽기 때문에 시체는 굳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예수 잘 믿다가 돌아가신 분들 한번 보세요. 그들이 삶이 달랐듯이 그들의 시체조차도 다릅니다. 편안하게, 잠자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가야 될 것이 어딘지를 알며 누가 기다리는지 알잖아요. 빨리 가고 싶은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여러분이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회개하여”―다시 생각하고, 마음을 바꿔―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을 이해했다면, 여러분이 한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인정하고 고백하십시오. 내가 교회 떠나서 산 적이 없지마는 수십년 신앙생활 했지만 나는 한번도 주님이 소중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어리석게 세상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어리석게 살았습니다. 내가 자랑했던 모든 똑똑함은 쓰레기와 같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회개란 아무것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고백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에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회개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요엘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회개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아보시고 여러분에게 미소 지으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괜찮다! 내가 너를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냈다. 그를 믿기만 해라. 그가 너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고, 그에게 감사해라.” 그런 후에 여러분 자신과 삶을 그분께 드리십시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분께 복종시키고, 세례를 받으십시오.

예루살렘 사람들로서는 세례를 받은 것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엄청난 박해와 가족의 냉대와 추방과 그 밖의 많은 것을 의미했습니다.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세례를 받는 것, 그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와 자신을 묶는 것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시체와 하나되는 것이었어요. 순교의 길을 수없이 걸어갔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가 의미하던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참으로 중요한 그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아이작 왓츠(Isaac Watts)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생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다가 그다음 어떻게 할 것인가? 언젠가 죽을 것인데 죽음 다음에는 어떻게 되지? 정말 교회에서는 내세가 있다고 그러는데 정말 있을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천국에 가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정말 그럴까? 한번 생각해 보시라니까요.

예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껏 생각해오던 것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살았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에 자기의 전 삶을 내 맡기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가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보내신 구원자를 영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을 인생에 모시고 그분의 지시를 따라서 인생길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각대로 여러분이 선택한 길을 걸어왔는데도 삶에 만족이 없으면 이제는 길을 바꾸어야 할 때 입니다. 이제는 생각을 달리 할 때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나면 찬송하면서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노래하면서 세상을 살 수 있는 장이 펼쳐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를 그 예수님께 초대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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