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식 없는 열심의 불행 / 삿 11:28-40

  • 잡초 잡초
  • 367
  • 0

첨부 1



Subject  삿11:28-40 / 지식 없는 열심의 불행

성경은 결코 성경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미화하거나 과장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실수와 실패, 그리고 인간적인 연약함과 추한 모습들까지도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인간의 연약성과 실수와 같은 어두운 부분들에 대해서도 대단히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는 그 사실로 인해서 저는 성경책은 인간들이 조작하여 기록한 책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고 진실된 역사라고 믿게 됩니다만,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의 이야기도 예외가 아닙니다.

입다의 생애를 보면 그는 큰 용사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불행한 출생 배경과 형제와 동족들로부터의 소외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 나감으로써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을 암몬 족속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내는 업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입다가 위대한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 장이라고 할 수 있는 히11장의 32절에 보면 이 입다의 이름이 올라와 있습니다. 즉 입다는 구약 역사 속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손꼽힐 만한 인물 중의 하나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좌절하거나 현실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써 자기의 환경을 변화시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살아 있고 역사하는 믿음의 특징입니다만, 우리는 입다에게서 바로 그런 역사하는 믿음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사기 11장의 내용을 보면 입다가 믿음으로써 이방 나라를 물리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그런 승리를 하는 과정에서 그가 잘못된 서원을 함으로써 자기의 무남독녀를 번제의 제물로 불태워 죽이는 너무나 슬프고 불행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입다는 큰 용사였고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도 역시 부족함이 있고 연약함이 있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백성답지 않은 크나큰 실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30절과 31절에서 보면 입다는 만약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승리하고 돌아오는 그 날에 자기 집 문을 열고 나와서 자기를 가장 먼저 환영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해 주시면 나의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번제란 희생 짐승을 잡아 통째로 제단에서 불태워 신에게 드리는 제사로서, 구약 율법에 나오는 5대 제사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제사가 바로 이 번제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번제의 제사를 드리되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짐승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했지, 사람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 한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그 사건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나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불태워서 바치는 그런 번제를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가르치신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인신(人身) 제사라고 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신 제사를 명백하게 금지하고 계십니다. 즉 신18:9-12에서 보면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일이 가나안 족속들과 그 주변 민족들 사이에서는 행해지고 있었는데, 그런 제사를 하나님은 가증한 행위라고 하시며, 바로 그런 가증한 일 때문에 가나안 족속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입다는 그런 인신 제사를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입다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열심 가운데에는 지식을 따르지 않은 인간적인 열심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집 문에서 나오는 사람이란 입다와는 가족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식구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런 사람 중에 하나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대단한 열심이며 대단한 헌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게 되었을 때, 입다의 승리를 기뻐하며 환영하러 나온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의 무남독녀 외딸이었을 때 입다는 얼마나 큰 슬픔과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입다는 그 서원을 이행합니다. 즉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 딸을 번제로 바치고 맙니다.

  많은 주석가들이나 설교자들은 이처럼 입다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인신 제사를 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서원을 이행한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견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원한 것을 성실하게 지킬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시15:1-4. 참고). 그러나 그 서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의 서원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원치도 않으시며 오히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어떤 일을 서원해 놓고 그것을 이행하는 것을 우리는 신실한 것이라고 칭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깡패들이나 조폭(組暴)들 사이에 맺어지는 의리와 충성을 아름답다고 동경하며 칭찬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릇된 서원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무지한 종교적 열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입다는 분명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만한 훌륭한 면모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이방인 방식의 인신 제사를 서원하고, 또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는 성실하게 이행한 것은 한마디로 무지한 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번제를 드리거나 서원의 제물을 바치라고 명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 그가 어떤 서원을 하거나 번제를 드리면 승리를 주시겠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30절에서 입다가 그런 서원을 합니다만, 그 앞 절인 29절에 보면 이미 입다에게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 것은 그 자체가 이제부터 하나님이 입다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그런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열심으로 무언가를 하나님께 더 드리면 하나님이 더욱더  자기와 함께 해주시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열심은 그의 가정에 크나큰 불행과 슬픔을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타락한 종교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종교적인 본능은 인간이 무언가 귀중한 것을 신에게 바치면 신이 은총을 주시고 자비를 내려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흔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이것은 인간이 신에게 무언가를 먼저 드려서 신으로부터 은총을 얻고 복을 얻는다는 인간 종교 본능의 표현입니다.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을 바쳤더니 천지신명이 감동하여서 아버지 심봉사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종교 논리입니다. 더 나아가면 유대교의 율법주의가 바로 이런 타락한 인간 종교 본능과 열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와 율법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열심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어리석고 불행한 민족이 되고 만 것입니다.(롬10:1-3. 참고)

  입다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역경을 이기고 자기 민족을 구원해 낸 영웅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암흑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부족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고서도 공연히 자기 딸을 잃는 슬픔 속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알아 가는 일에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종교 생활을 할 수도 있고, 더러는 대단한 열심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빗나간 열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식 없는 믿음, 지식 없는 열심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온전한 지식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