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장 바람직한 교회 / 살전 2:17∼20

  • 잡초 잡초
  • 437
  • 0

첨부 1



제목 : 가장 바람직한 교회 
본문 : 살전 2:17∼20

  '제자입니까'라는 책으로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에게 도전을 주었던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오늘날 교회의 성장은 바른 성장이 아니고 몸이 커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숙한 것이 아니고 비대해졌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300명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600명으로 부흥하고 교회가 점점 성장하니까 우쭐거렸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런 음성을 들려 주셨다고 합니다. "너는 너의 교회가 성장했다고 생각하느냐? 성장한 것이 아니고 살이 좀 쪘어. 너는 너의 교회가 좀 부흥했다고 생각하느냐? 부흥이 아니고 좀 비대해진 거야. 300명이 모일 때나 600명이 모일 때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어." 한마디로 몸만 커진 교회였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조롱하는 단어 중에 '공룡'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거대한 몸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 쓰러져 가는 것을 풍자해서 쓰는 단어입니다. 공룡기업들이 결국은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해 쓰러져 가는 모습을 우리는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문어발식 확장으로 빚으로 기업만 키우더니 구조조정이니 합병이니 난리를 부립니다. 한국교회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가 없습니까? 목사가 없습니까? 장로가 없습니까? 집사가 없습니까? 교인이 없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갈수록 나약하고 조롱만 당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싱가포르에 가면 새 공원이 유명합니다. 공원 전체가 새들로 가득 찼다고 하는데 대체로 다른 나라에 있는 새 공원은 그물을 쳐 놓았는데 여기는 그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새들이 그 공원을 떠나서 날아가는 새들은 한 마리도 없고 다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훈련을 시켜서 그 안에 그냥 있을까 하고 자세히 보면 새가 날아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새들의 꼬리를 다 뺐습니다. 옆에 날개는 있는데 꼬리를 빼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위로 날 수 있고 점프는 할 수 있는데 앞으로 나가지는 못합니다. 방향을 꼬리가 잡는데 갈 수가 없으니까 그냥 내려앉는 것입니다.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날기는 하지만 나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야할지 가는 곳으로 이끌어 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날 교회들이 성도들이 나아갈 바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바람직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첫째로 감동이 넘치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

  여자 집사님 한 분이 설교시간에 무언가 열심히 받아쓰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예배 때에는 그냥 듣고만 있었던 집사님이라, 설교를 하던 목사님은 관심이 집중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하면서 속으로 오늘은 저 집사님이 설교 듣는 태도가 달라졌구나하고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은 그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오늘부터 예배시간에 설교를 기록하면서 듣기로 하셨군요." 그러자 그 여자 집사님은 "목사님, 아니예요. 곗돈 순번 짜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배 태도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종교적인 의무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형식과 의식의 틀에 매여서 아무런 감동이나 기쁨이 없는 예배는 더 이상 원하시지 않습니다. 온 맘과 정성을 다한 구원의 감격이 넘치는 예배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만남이 있을 때 눈물도 있고 기쁨도 있고 감격도 있습니다. 형식적인 예배에는 감동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가 솔직하게 마음을 열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마음을 열고 회개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감동이 없다면 상한 심령으로 예배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의 상처를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심령, 죄의 상처를 감추는 거짓된 심령, 죄의 상처를 덮어버린 굳은살 배긴 심령으로 태연하게 앉아 예배드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예배는 잘난 사람들의 잘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요구하시는 예배는 멋있는 사람들의 멋있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흠 없는 사람들의 흠 없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예배는 죄의 상처를 내어놓고 치료받기를 원하는 못난 사람들의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요구하시는 예배는 죄의 상처로 엉망이된 볼품 없는 사람들의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죄의 상처로 흠이 많은 결점 많은 사람들의 예배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통회하며 변화시켜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길이고 절망을 희망의 미래로 바꾸는 유일한 길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는 심령으로, 통회하는 심령으로 감동이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날마다 감동 있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만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가장 바람직한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도 바로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능력의 기도가 있는 교회입니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사 최고의 엔지니어 찰스 케터링은 빈틈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 업계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모임에서 사회자가 그의 손을 높이 쳐들며 "케터링 씨, 이 손으로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회자는 물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자동차 탄생!'이라는 말을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손으로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두 손을 잡고 기도한 일이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 속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성장하는 교회들은 대부분 기도가 뜨겁고, 기도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기도가 차가운 교회는 영성이 미약한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지도자와 교인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지겨운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시간을 즐거워하고, 기도의 맛을 압니다. 기도를 통해서 은사를 받고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교회는 모든 일에 기도가 앞서야 합니다. 기도가 그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합니다. 기도가 교회의 최대의 재산이며 성도들의 최대 재산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무기는 은과 금이 아닙니다. 더욱이 세상의 권력도 지식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무기는 오직 기도입니다. 교회는 기도를 무기로 사용해야합니다. 기도의 크기가 교회의 크기입니다. 기도가 클수록 그 만큼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어느 직함이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불러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면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야도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사야도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도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도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이른 새벽부터 종일토록 꿇어 엎드려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몇 시간씩 기도를 오래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얼마나 오래 기도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능력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능력 있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는 기도를 말합니다.

  지난 역사를 더듬어보면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감리교회가 영국에서 처음 시작 할 때도 기도하는 모임이었던 요한 웨슬레의 신성클럽에서부터입니다. 1900년대 초 한국의 성령운동도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을 비롯한 기도의 사람들에 의해서 한국교회는 크게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800년대에 미국에는 큰 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미대륙을 휩쓸었습니다. 그 불길 속에서 은혜 받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세계각처로 선교사가 되어 떠나갔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도 그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이 대각성운동도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우리 교회도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모두가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게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바람직한 교회가 될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감화력 있는 전도를 하는 교회입니다

  미국의 코미디언이 친구와 함께 고급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웨이트레스가 실수해서 수프를 담은 쟁반을 뒤엎는 바람에 두 사람은 머리 위에서부터 전신에 수프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식당 안의 모든 사람이 긴장했습니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항의를 하면서 지배인을 불러 당장 그 여인을 해고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조용히 일어나더니 냅킨으로 머리와 옷을 대충 닦으면서 웨이트레스를 부드럽게 위로하더랍니다.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다니요, 참 안됐습니다. 놀라셨지요? 나도 이런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옷이야 세탁하면 되지 않습니까? 당신 마음에 상처가 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사람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랑의 은사를 생활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화시키는 전도가 되어야 합니다. 옛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성을 드려 기도하면 하나님도 그 뜻을 돌이키시사 마음을 바꾸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요나서 4장에 보면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요4:1)라고 부르짖습니다.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되지 않을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랑의 감화력 있는 전도를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데 앞에 있는 차가 엉거주춤 길도 비키지 않은 채 딴 일을 하면서 길을 가로막고 있더랍니다. 너무 화가 나서 차 문을 열고 나가면서 "야!"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려고 하는데 여자 운전자가 나오더니 "장로님 안녕하셨어요? 늦으셨네요?"하더랍니다. "예, 예, 지금 가시는군요? 제가 도와드릴 일 있습니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너무 미안해 가지고 빚쟁이 앞에서 굽실대듯 머리를 조아리다가 급히 차안으로 들어왔답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인가에 의해 감동 받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닫고 감동 받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은 바로 감동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능력있는 기도를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감화력있는 전도를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놓고 찾아올 수 있는 바람직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여 주님 앞에 내 보일 수 있는 바람직한 교회를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