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봉사하는 삶의 행복 (요 13:1~11)

  • 잡초 잡초
  • 414
  • 0

첨부 1



제목 : 봉사하는 삶의 행복
본문 : 요한복음 13:1~11

  예배를 “Worship”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Worship”만 말하지
않고 언제나 “Worship Service”라고 그렇게 붙여서 말을 합니다. Service
가 없이는 Worship이 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섬기고 봉
사하는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대하여 살라. 그것이
Worship Service다!” 이런 뜻으로 사용을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배경
을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선교 활동 끝 부분! 그러니까 11절에 “이는 자기
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가룟 유다가 이제 자신을 팔아 죽게 하는
일이 거의 다가왔을 때 하신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신 일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그런 사건으로 전용되
고 있습니다. 유대 나라 문화는 다른 민족과 특이한 점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남의 발을 씻겨주는 문화입니다. 이런 문화는
거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문화인데, 유대 나라는 특별히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그런 전통 문화가 오래 전부터 내려왔습니다. 실제적
으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우리 같은 문화에서는 엄마가 아기
들 목욕시켜 줄 때나 있는 일이고, 혹은 환자들을 목욕시켜줄 때 내가 다
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거나 내가 그런 대접을 받거나 그런 때에만 가능한
일이지 멀쩡하게 다 큰 어른들이 남의 발을 씻어주고 또 닦으라고 내미는
일은 거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문화는 그때 그 신발 문화가
샌들이라고 하는, 신었는지 말았는지 그래서 온통 아열대 기후 지방을 돌아
다니면 발에 먼지가 가득하게 자연히 좀 지저분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
의 집을 갈 때는 언제나 이 발을 닦아주는 그런 풍속이 있어왔던 것입니
다. 이때 발을 닦는 순서에 있어서 대개는 존경의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
에 발 닦는 사람은 발을 내준 사람을 높이 대우해 드리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 두 군데나 나와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릴 때
는 눈물로, 머리털을 털어서, 향유를 부으면서 하였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존경의 뜻으로 예수님께 그런 대우를 해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누구의
발을 씻겨드렸다는 것은 인격 대우에 관계가 되기 때문에 이런 일을 만나
게 되면 자연히 사람들은 좀 신경을 쓰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일행은 저
녁을 먹는 시간이 되어서 필히 이제는 발을 씻을 그런 시간이 다가왔습니
다. 누군가는 발을 씻어야 되는데 아마도 제자들이 그런 신경을 쓰고 교만
스럽게 ‘나는 안 한다!’ 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앉아있었던 것이 분명
합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은 누가 더 크냐 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
니다. 그러니까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의 발을 씻을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
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만약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다는 것
은 스스로 자기 인격을 평가 절하 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래서 저마다 품위 유지를 하려고, 인격 관리를 잘 하려고 ‘이때 잘
해야지, 괜히 내가 형편없이 될 수 있다!’ 아니면 현명한 처세, 권위의 손
상, 장래적 자리 확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들을 하고 그런 이기적 아이
디어가 가득했기 때문에 하나도 발씻을 사람이 나타나지를 않고 있는 그런
분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아마 그때 제자들의 생각이나 오늘 우리들이 가지
고 있는 생각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인간
적 대우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 심리를 최대한 이용한 것이
오늘의 상업주의 원리 문화입니다. 지금은 세상의 모든 사업이 Service 경
쟁입니다. “이거 잘하면 성공하고, 이거 못하면 실패한다!” 그래서 “우
리 회사로 오십시오! 최고의 인간 대우를 할 테니, 왕같이 모셔드릴 테니
이리 오십시오.” 그러며 모든 사람을 왕 대우하는 그런 문화가 생겼는데
매우 어려워지는 일은 교회까지 그렇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Service를
하러 오는 사람들까지도 이 문화권에서 살다 보니까 교회까지 와서 대접을
받아야만 자존심을 상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 드리는 일보
다 나에 대한 인간 대우가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교회
를 와야 되는 매우 불행한 그런 문화까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교
회도 Service를 얼마나 잘 하는지 와서 보니까 갈보리교회는 별로 그렇게
안 하는 것 같이 보여집니다. L.A 저 유명한 교회는 주일날이면 여 집사들
이 한복을 차려입고 저 문에서부터 이 교회까지 들어오는데 절은 한 10번
정도 받아야 들어옵니다. 그렇게 하고 뭐, 그냥 최고의 관심 있게 하니 사
람들이 좋아하더라구요. 그래서 저희 교회도 그렇게 하자고 하는걸 내가 반
대를 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교인은 좀 더 올지 모르지만 신앙 생활의
향상은 안될 거라고 해서 안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아무도 Service하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예수님이 봉
사자로 나서게 됩니다. 4절~5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
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이렇게 예수님의
Service가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에 베드로가 아주 당황합니다. 겸연쩍은
겁니다. 차마 예수께서 이렇게 하실 줄은 몰랐기 때문에 교만을 부리고 거
만하게 ‘내가 그래도 이 제자들 가운데는 당연히 그런 인격 대우를 받아야
지! 나이 어린 사람도 많고 나보다 형편없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왜 그
런 일을 하느냐?’ 이렇게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나서는 것에 당황한 것입
니다. 결국 그날 저녁은 예수님의 이 봉사활동으로 12명의 발이 깨끗하여
졌습니다. 이 봉사의 저녁에 담긴 예수님의 교훈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인간이 모여있는 이 공동체는 그 공동체
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누군가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군
가 Service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있는 거예요. 12명의 제자 가운데
만약 한 사람이 나섰다면 예수님의 봉사의 시간은 반으로 줄었을 것입니
다. 만약 제자들 중에 3~4명이 나섰다면 그 일은 더 빨리 끝이 났겠고 분위
기는 더욱 좋아졌을 것입니다. 만약 절반 이상의 제자들이 그날 저녁 봉사
를 했다면 순식간에 그 일은 끝나고 수고로움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봉사하는 사람이 많으
면 많을수록 영원합니다. 봉사는 곧 일입니다. 조금은 귀찮은 일입니다.
그 귀찮은 일을 위해서 수고하는 손길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공동체는 교회
가 되었든, 사회가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영원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은 경제가 좀 어려워지는 그런 분위기를 우리가 읽고 살아갑니다. 경제학
에 있어서는 저는 잘 모르겠는데 만고에 불변하는 법칙 하나는 잘 알고 있
습니다. 어떤 나라든지 그 나라가 경제적 고난이 올 때 이유가 하나 있는
데 그것은 일하기 싫어할 때입니다. 제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을 제가 얼마
전에 만났어요. 그래서 “어떻게 지냈어?” “나는 스웨터를 짜서 수출하
는 기업을 지금까지 잘 운영해 왔는데 그것 다 문닫고 말았어.” “왜 그랬
냐?” 뭐, 해마다 러시아로부터, 그 추운 지방에 2,000만 달러 이상의 스웨
터 주문을 받아서 얼마든지 개척해 놨는데 스웨터를 짤 사람들이 우리 나라
에 지금 없다고 합니다. 지금 어느 시대인데 공장에 가서 스웨터를 짜고 있
냐고 한답니다. 옛날에는 아가씨들이 막 그런 곳에 와서 스웨터를 짜주어
서 우리 나라가 경제 발전이 되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고단가 임금을 책정하
고 종업원을 좀 오라고 해도 우리 이 공장에 와서 스웨터를 짤 사람은 하나
도 없다고 합니다. “그럼, 다들 뭐하냐?” “우리 나라는 향락 산업으로
만 치중한다. 일하기 싫어한다.” 그러면 그 나라는 이제 끝난 것입니다.
내가 맡은 일은 열심히 하는 것이 봉사입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선진국들이 왜 선진국이냐? 봉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주 국민적, 문
화적 그런 형성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병원이라든가 학교라든가 사회 공공
기관에 월급도 받지 아니하는 봉사자들이 가득합니다. 고등학교 학생들 대
학 진학할 때 거기 씁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봉사했느냐?” 그랬을 때
“네, 나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이런 봉사를 했습니다.” 다 쓰고 거기에 증
명서를 첨부해서 내면 대학에서는 그것 보고서 입학 허가를 받습니다. “당
신 같은 사람을 우리 학교가 길러내야 이 사회가 밝아진다.” 그래서 학생
으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어느 기관에 가보면 다 그 사람은 보통 푸른
옷을 입습니다. 입고 다 봉사를 합니다. 그래서 선진국입니다. 국가가 튼튼
합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을 물러난 다음에 평화 봉사단원으로 무
주택자 주택 건설 현장에 항상 나가서 일합니다. 나라가 그렇게 되어 있습
니다. 그 나라는 튼튼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서비스하기를 좋아하니까
요. 

  갈보리 교회도 이만큼 지금 유지하는 것은 봉사자들이 있기 때문입니
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얻은 통계가 있습니다.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의 맞는 진리가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어떤 공공 기관에서 열심히 봉사
많이 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삶의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는 즐겁게 삽니다. 봉사 속에 즐거움이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런 사람들은 날마다 즐겁게 삽니다. ‘오늘도 내 손을 움직여서 형제들을
위해서 봉사해 줘야지!’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이 봉사를 잘하는 사
람들은 교회에서 불평이 없습니다. 봉사를 전혀 안하시는 분들은 이거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불평이 많은지 어쨌든 불평이 없습니다. 여러분, 봉사자
들이 뭐 불평하는 것 보셨습니까? 봉사 많이 했으면 그 일 자체에 기쁨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기쁜 사람이 무슨 불평이 있습니까? 봉사자들은 불평
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마음이 즐거워서 그런지 교회 봉사 많이 한 사람은 평생 건
강하게 삽니다. 여기 큰 기업에 무슨 책임자가 미국에 오셔서 사셨는데 저
희 교회 나와서 그러는데 그 친구는 아내가 365일 중에서 5일만 안 아프다
고 그러고 360일이 아프다고 합니다. “아, 목사님! 기도 좀 해주십시오!
아니, 아내가 날마다 아프다고 그럽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러고 여전도회 회장을 시켰습니다. 안 할 수 없잖아요? “아니, 목사님!
어떻게 하는 겁니까?”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드릴 테니 하십시오.” 아
프다는 소리가 없어졌어요. 그 남편이 나한테 봉투 갖다 준 것 그 부인을
모를 겁니다. “목사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이거, 치료비입니다, 치료
비!” 우리 집 사람 평생 여전도 회장 시켜달라고… 평생은 안해도 앞으로
교회 봉사 열심히 하라고, 하나님이 건강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많은 사람의 칭찬을 듣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봉사하면서 사는 것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주면서 반사되어
나오는, 나를 위한 축복이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봉사의 기회는 하나님
의 축복입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봉사할 수 없
는 밤이 속히 오리라' 우리 사회가 매우 타산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래
서 사람들이 소득 없는 일에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지나가는 거
지 한 사람에게 밥 한 그릇 주는 일 무슨 소득이 있겠습니까? 귀찮은 일밖
에 안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그럽니까?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그러면 천사를 대접하고 나면 하나님이 어떻
게 하시겠어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아무 소득 없다고 평가하는 일을 하
나님은 가장 높이 평가하신다는 말입니다.

  제가 샌프란시스코에 부흥회를 하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을 소개하겠습니
다. 어느 권사님이 이번 집회 동안에는 자기 집에서 꼭 식사를 한번 해야
된다라고 미리 전화를 주셨어요. 담임 목사가 또 그렇게 하자고 해서 저녁
을 먹으러 갔습니다. 자녀들이 한 4사람 되는데 가족들이 다 모였어요. 그
런데 그날 저녁에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그 가정에 문제가 하나 있는데 부
흥사께서 이것 좀 정리해 달라고 아들이 그랬습니다. 웃으면서 그래요.
“그래요. 이야기해 보세요.” 이따가 어머니도 다 계신 곳에서 말하겠다
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밥 잘 먹여 놓고 무슨 문제인가?’ 이민 가
서 살면 바쁩니다. 몸이 피곤합니다. 그거 스트레스 받고 나가서 영어도
잘 못하는데 그 틈에서 하루종일 그 모르는 영어를 알아들어 가면서 일을
하다 보니까 힘이 들고, 피곤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집 권사님, 어머
니의 특징이 있는데 이분이 어떻게 그분의 손이 움직여서 김치를 담으면 김
치가 얼마나 맛있는지 온 교인들은 그 권사님이 만들어준 김치를 기다리고
살아요. 어떻게 만드셨는지 그분의 특별한 솜씨예요. 무엇을 집어넣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분이 김치 한번 만들어 주었다 하면 굉장해요. 그건 어
디서 살수도 없어요. 권사님이 그것을 알고 그 봉사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
데 혼자 할 수 없으니까 딸, 며느리 다 동원하잖아요? “아이, 어머니! 그
거 한 두번 했으면 됐지, 그 봉사하는 걸 뭘 그렇게 1년 365일 하려고 그럽
니까? 저 집에 김치 떨어졌을 텐데… 이러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
들, 딸들은 너무 부담이 되는 거예요. 아니, 교회 봉사하는 것도 좀 알아
서 해야지, 그냥 자동차로 배추 실어다가 그냥 다듬으라고 하고 날마다 뭘
하니까 돈도 많이 들어가고 우리 어머니가 봉사를 좀 절제할 수 있도록 부
흥사께서 이 문제를 좀 해결하시라고… 웃으면서 그러시는 거예요. 어머니
도 거기 계세요. 막 아들, 딸, 며느리 할 것 없이 어머니를 성토하면서 나
한테 고소를 하는 거예요. “아, 그렇군요. 역시 오늘 권사님이 만드신 김
치를 먹어 보니까 참 맛있습니다. 기다릴만 합니다. 나도 한번 해 주십시
오.” 그랬더니 어머니가 그 다음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너희들 말 다했
냐?” “네, 어머니 차례입니다.” “내가 하겠다. 우리 4남매, 너희들 지
금 이 사회 아무 것도 없이 이민 와 가지고 너희들 이 사회에서 그래도 중
류층 이상의 좋은 집에서 다 살지? 이 사회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 포함해
서 상류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너희들이 타고 살지? 또, 너희들
은행에 이민 와서 살고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넉넉하게 은행에 저금이 되어
있지? 내가 다 알잖니?” “그렇죠.” “왜 그런지 아냐?” “우리가 열심
히 일했잖아요?” “누구는 열심히 일 안 하냐? 세상 사람 다 열심히 일한
다. 까불지들 마! 아직은 엄마의 손에 봉사가 있어서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복을 주시는 게야! 잔소리 마! 나 죽을 때까지는 김치 담아야 돼! 목사님
이 판단하세요.” 거기서 잘못 말했다가는 큰일납니다. “엄마 말이 맞습니
다! 엄마 말을 따르세요! 봉사는 좀 귀찮아요. 그리고 손해가 나요. 그러
나 뒤로 돌려서 지금 내용 보니까 다 잘사네… 그 김치 몇 병이 문제가 아
니구먼! 어머니의 즐거움이요, 남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좋은 은사
를 소박하게 하고자 하는 것 자식들이 거절하지 마시오.” 그래서 그 권사
님은 그 교회에서 제일 사랑 받고 자식들 다 잘 되었어요. 나는 그 어머니
의 말이 옳다고 믿어요.

  건강하고 무엇을 좀 할 수 있는 기회에 봉사활동을 많이 하십시오. 하나
님을 위해서 할 일은 예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하나
님이 결단코 그 상을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봉사는 말짱 헛일이라고
약싹 빠르게 사는 사람,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이웃에게 되돌려 받지 않을
수록 더 좋습니다. 하나님이 돌려주십니다. 퍼서 돌려주는 교회가 될수록
그 교회는 성장합니다. 교인들이 잘 됩니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목사는 어쩔 수 없이 많이 만납니다. 이런 사람을 만났습니다. 60
세가 되었는데 그만 돌이킬 수 없는 건강의 손해를 입어서 이제 세상을 떠
나는데 아무도 없이 목사님하고 나하고 둘이 만나자고 교회에 연락이 왔어
요. 그래서 갔어요. 내 손을 잡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 나
는 별명이 소년 시절부터 천하장사였습니다. 지금까지 나하고 팔씨름을 해
서 나한테 이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건강한 천하장사였어
요. 그런데 내가 이제 60이라는 아직은 더 살만한 나이에 그만 이렇게 세상
을 떠나게 되었는데 건강하게 잘 살았으니 됐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마음
에 견디지 못하는 고통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 보자고 했습
니다.” “그게 뭡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단 하루만 건강해 질 수 있었
으면 좋겠습니다.” “뭘 하시려구요?” 그때 제가 있던 교회가 건축을 막
끝낸 상태예요. “하나님께서 과거에 나에게 60년 동안 주셨던 그 건강을
하루만 되돌려 주시면 내가 가서 우리 새로 구입한 이 교회, 저 주차장에서
부터 목사님 사무실까지 본당, 교실… 할 것 없이 내 손으로 깨끗하게 청소
를 한번 다 마치고 그 이튿날 죽었으면 합니다.” 난 속으로 그랬어요.
‘그럴 날이 60년이 있었는데… 어찌 그 하루를 지금까지 그렇게 봉사 안하
고 살으셨소!’ 그러나 그 소원은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고 그대로 가셨어
요. 그게 뭡니까? 그래서 할 수 있을 때 하라는 겁니다. 나중에 그런 후회
가 와요. 내가 하루만 주님을 위해서 기쁘게 봉사했어도 이렇게 마음이 괴
롭지는 않을텐데… 천하장사의 힘을 가지고 60년 동안 내가 뭐했지?

  미국 역사에 두 대통령의 연설이 영원히 남아 있죠? 하나는 링컨 대통령
의 겟티스버그 연설에서 “정부는 국민을 위한 봉사기관이다!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 그렇게 말을 했죠? 존 F 케네디
는 “국가를 바라지 마십시오. 국가를 위해서 봉사해 주십시오.” 이 두 가
지 말이 유명한 말로 남았잖아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
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
라.”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은 지금은 모르지만 후에는 알게 되리라. 어
서 발들을 내밀어라. 그 12명이 앉아서 어디 가서 평가받지 못할 그 자존
심 하나 때문에 이 모양으로 신경 쓰고 앉아 있느냐? 어서 내밀라!” 이 봉
사는 자기를 낮추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남의 육신에 발을 닦아준다는 것
은 쉽지 않은 일이에요. 또, 우리 육신 가운데 이 발의 위치는 제일 대접
을 받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얼굴은 예쁜 게 작업하지만 발 예쁘게
작업은 거의 안합니다. 발에다 무슨 비싼 화장품 바르거나 그러지 않습니
다. 발을 예쁘게 성형수술 하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수고했다고 손은 잡
아주지만 발을 잡아주는 일은 없습니다. 발은 아무리 잘 생겼어도 평생 누
가 봐주지도 않고 예쁘다는 칭찬 듣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발은 우
리의 이 무거운 육신을 태우고 일평생 봉사를 합니다. 머리가 명령하는 것
발이 한번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험한 산도 잘 올라가 줍니다. 편안
한 신발이나 신겨주면 좋으려면 어떤 때는 빼딱 구두를 신고 가라고 하니
까 발이 고통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똥이 있는 더러운 곳을 그냥 밟고
지나가라고 할 때도 있고, 공을 차려면 이 발로 두드려 패야 하고… 발이
참 고생합니다. 봉사는 낮은 곳, 그늘 진 곳에 서야하는 직업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세족식은 제자들이 낮아지기 싫어하는 이유 때문에 생겨
진 일이 됩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는 본래 부잣집 귀공자였습니다.
그의 생활도 언제나 최고급으로 장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은
행복하지가 않고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왜 나는 최고의 좋은 것을 가지고
도 이 삶이 고난스러울까?’ 어느 날 그는 뛰쳐나갔습니다. 말을 타고 시골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옆에 문둥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런 사람은
왜 저렇게 되어 있을까? 자신의 차림과 정 반대인 그 보기 흉한 문둥이 앞
으로 가서 별안간 그 문둥병 환자를 힘껏 껴안아 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문둥병 환자의 얼굴이 예수님으로 변했습니다. 프란
시스가 성자가 된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아! 이 문둥이가 나의 예수님이
셨구나!’ 낮고 천한 자 안에 숨겨져 있는 예수의 형상을 본 이후 그가 그
렇게 성자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우리 시대의 고민은 모두 내 발을 빨
리 씻으라고 내밀고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수건과 대야를 들고 오
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20절까지 계속되는데, 13절∼14절에 보면 “너희가 나
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선생이다. 주다. 내
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
라.” 17절에는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오늘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가룟 유다에게 초점을 맞춰 있습니다. “너는 내
제자가 되어 섬기는 봉사의 삶에는 머리를 쓰지 않고 너의 선생을 잡아 죽
게 하는 마귀 생각만 하고 있느냐?” 신앙 생활이 빗나가면 교회 안에서도
엉뚱한 생각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보고
“너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봉사하며 살아온 인생은 참으로 행복한 성취적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 소유가 없어도 행복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내 양심이 나를 도
와주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으로 향하는 마음은 무겁지 않고 가볍습니
다. “하나님이여! 지상에서 나의 사명을 열심히 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
혜를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주 앞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를 받아 주옵소
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봉사자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