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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벨의 믿음 / 히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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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1:4
아벨의 믿음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들을 양육할 때 한 부모 밑에서 났지만 형제마다 서로 너무 다른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저희집에도 세명의 딸이 있는데 세명 모두가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첫째는 도전 정신이 많고 모험을 즐기는 이상주의형입니다. 둘째는 안정과 정확하게 하려고 하는 현실주의 형입니다.세째는 첫째와 둘째의 중간을 지향하는 통합주의 형입니다.어떤 스타일이 좋다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다른 스타일의 성격 때문에 때로 서로 싸우고 다툴때가 많습니다. 한부모 밑에서 각각 다른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결국 자라면서 스스로의 각각의 선택이 있기 때문입니다.잘못된 선택이 있으면 잘못된 삶이 나옵니다. 바른 선택이 있으면 바른 삶이 나옵니다. 믿음은 바로 선택입니다. 바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함께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각각 어떤 선택을 하면서 어떤 믿음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어떤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충실한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오히려 남에게 해를 주고 아픔을 두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속의 많은 인물 중에서 오늘 소개되는 믿음의 사람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아벨을 죽인 사람은 바로 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가인과 아벨이었습니다. 형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지은 농산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리는 제사만 받았습니다.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창세기 4장 4-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벨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드리다가 결국은 형의 시기심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같은 형제가 각가 제물을 취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렸는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믿음의 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히11:4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자신과 제물을 드리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하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믿음으로 부르는 찬송을 들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의 모든 삶과 행위를 받으십니다.
과연 여기서 하나님이 열납하신 아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받은 아벨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과 믿음의 예배가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1. 아벨은 첫것을 드리는 믿음이었습니다.
창4:3-4을 보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 형 가인도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습니다. 아마도 땅의 소산물이었으니까 여러가기 곡식과 열매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생 아벨은 양의 첫새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렇게 아벨이 더 나은 제물 양의 첫새끼로 제사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게신 것과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비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오직 믿음으로 믿고 드렸습니다.
여기 아벨의 제물과 가인의 제물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벨은 양의 첫새끼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땅의 첫소산물이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양의 새끼를 드렸는가? 땅의 소산물을 드렸는가? 어떤 제물의 차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흠이 없는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기 아벨이 양의 첫새끼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장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곳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제일이고 우선순위로 여긴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제일 우선순위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이 드리는 믿음의 예배를 기뻐받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드리는 모든 헌금과 헌신을 기뻐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합니다. 여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먼저 하나님을 구하시고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시고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시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첫째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귀하고 소중합니다.
첫아이가 태어났을때 얼마나 우리는 소중하게 여깁니까? 감기라도 걸리면 야단법석입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뒤질세라 몇세에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빚을 지고라도 책을 사고 장난감을 사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둘째 셋째가 태어나면서 조금 기침을 해도 좀 시간이 지나면 괜찮지 하고 넘깁니다. 장난감 사달라고 하면 있는 것 갖고 놀라고 합니다. 물론 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첫 번째아이보다 덜 정성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집을 장만하여 보신 분도 잘 알 것입니다. 첫 번째 집을 장만했을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은 공무원이신데 주택공사에서 마련하여 준 첫 임대아파트를 내집으로 장만하고 나서 너무 너무 좋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평수를 늘려가면서 내집이 생겨도 그첫번째 감격이 생기지 않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지금도 가장 잊혀지지 않는 기쁨이 첫 번째 목회지입니다. 비록 작은 동네의 30여명 밖에 안되는 작은 교회였지만 첫 번째 목회지의 귀중함과 감격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첫째 것을 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내 시간, 내몸, 내물질, 내 모든 것들의 첫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소중한 것을 내려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을 우리 하나님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지금 이시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때 내 소중한 것이 드려지고 있습니까?
제가 예배를 드릴때마다 가장 못마땅한 우리들의 습관들이 있습니다. 우선 시간입니다. 예배때 우리가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예배시간때마다 항상 늦게 오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만일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는데 지각을 한다면 얼마나 결례가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드릴때 시간을 지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우리의 우선순위가 되어있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미리 오셔서 앞에서부터 자리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헌금을 드릴때에도 진정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함에 한 부자가 많은 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았고 또 한 과부가 두렙돈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과부가 드리는 작은 액수의 헌금이지만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구차한 가운데서도 자기 전부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가난한 과부 여인이 전부를 바칠 수 있었습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나의 가장 소중한 분으로 여기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소중한 것을 우리하나님깨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찬송을 부를때에도 진정 내 마음의 중심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가사의 의미도 모르고 아무리 좋은 기술로 좋은 음성으로 드렸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내가 마음으로 믿음으로 찬송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우리 찬양대나 합주단이나 중창단을 향해서 제가 제일 강조하는 것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칫하면 남 앞에서 찬송과 연주를 하는 자들은 아무 교만하기 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드러낼 위험이 많습니다. 찬송할 때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오직 하나님이 최고의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첫것을 드리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용없는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아벨처럼 우리의 첫것을 드리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아벨은 자신을 드리는 믿음이었습니다.
여기 아벨이 하나님께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만 제사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드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 4절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 제물도 제물이지만 아벨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자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헌금을 드릴때 헌금을 받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자체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때 우리들의 존재가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릴때 우리가 먼저 갖아야 할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들의 몸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헌금은 드리고 찬송도 드리고 기도드리면서 만일 우리 자신을 드리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소개되는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소개되면서 그들의 삶이 소개되는 것을 봅니다. 특히 가인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는 분노하는 가운데 안색이 변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그사람의 인격을 보고 삶을 보려면 그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삶에 분노가 있는 사람은 얼굴에 웃음대신에 화가 가득차 있습니다. 얼굴이 굳어있는 사람들은 보통 삶에서 있어서 굳어진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 요일3:12에 보면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라고 합니다. 그는 이미 악한 자에 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미 가인은 악한 자였기 때문에 살인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이미 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형편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으로 말을 하면 예배드릴때 찬송도 드립니다. 기도도 드립니다. 헌금도 드립니다.
그러나 살인자의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삶의 회개가 없이 그는 삶을 살았습니다. 만일 이런 삶의 회개가 없이 그냥 예배드린다고 할때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절한 이유는 어쩌면 그의 제물보다도 그의 삶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삶에 있어서 형제와의 관계 속에서 미움을 갖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성경에서는 형제에 대하여 미움을 갖고 있을때 먼저 화목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5장24절에서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드리는 이 공정예배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공적예배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6일동안 세상에서 삶으로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아벨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마태복음23장 35절에 보면 주께서 아벨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의인 아벨은 ‘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왜 아벨이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았을까요? 바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릴 뿐 아니라 믿음으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공적 예배드리는 것 이상으로 믿음으로 삶을 평상시에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자꾸 보이고 시기심이 생깁니까?
왜 시기심이 생기는 것입니까? 자꾸 상대방과 나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벨과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비교하였을때 시기심이 생긴 것입니다. 시기심이 생기면 우선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얼굴은 굳어있고 마음에 분노가 가득차 있습니다.그리부정적인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스위스의 목사님이자 의사였던 요한카스파라바타라는 분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성격을 얼굴의 형태와 얼굴에 있는 각 부분이 어떻게 균형이 잡혀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상학에 대하여”라는 책을 썻는데 그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심리상태가 얼굴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가령 얼굴에 깊은 주름이 깊이 파여있는 사람은 마음에 실망과 원한이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시기심이 많은 사람을 보면 약간 눈썹을 흘기고 찡그리고 눈을 반쯤감고 있습니다. 내가 시기심이 많은가 아닌가? 는 남의 불생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보면 압니다. 시기심이 많으면 남의 불행을 고소해합니다. 그리고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하여 항상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시기심이 일어날때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바로 그런 류의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시기심이 일어날 때 모든 악한 일이 일어납니다. 야고보서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고 합니다.
이런 악한 시기심이 마음에 있고 마음에 원망이 잇을때 여러분 하나님과의 예배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에게 한 성도가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배의 감격이 없습니다. 간절한 예배를 드렷으면 좋겟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성도님 간절한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간절한 삶을 사십시오”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제가 경험한 것은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우리의 삶의 연속입니다. 삶이 감격있으면 예배가 감격있습니다. 삶이 기쁘면 예배가 기쁩니다. 삶이 낙심이 되고 어려우면 예배가 어려워집니다. 삶이 두렵고 원망스러운 예배가 짐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먼저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철저한 회개로 죄의 길을 버리고 악을 떠날 때 하나님께 예배를 받으십니다. 만일 우리 손에 그냥 피가 있고 우리 마음에 그냥 죄가 남아 있는채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벨이 온전한 에배를 드릴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예배를 드리면 마음에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새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이 예배가 하나님이 받아주신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면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나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왓는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는 얼마나 허전합니까?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가령 설렁탕을 주문했는데 내가 원하지 않는 맛을 내는 음식이 나올 경우 어떻게 합 니까? 배가 고파서 먹었지만 먹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돈을 내고 나오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나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나올때에 우리의 더럽고 추한 마음이 있다면 내놓고 정결하게 씻어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새마음 정결한 마음을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과 몸을 드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아벨은 고난을 통해서 확증된 믿음이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댓가로 형에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은혜받고 세상으로 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결과가 은혜도 있지만 우리에게 핍박이 돌아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돌아오는 댓가는 핍박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는 가장 가까운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집안에 원수가 있다고 합니다. 왜 가까운 자들이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핍박합니까? 빛이 비추어지시 시작하면 어둠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어둠이 드러날 때 어둠의 사람들은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빛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핍박과 고난이 있어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인가? 아닌가? 언제 알수 있습니까? 바로 고난의 때를 맞이하여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매한 고난을 받을때마다 오히려 믿음이 더 자라가고 더 성숙하게 변해가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고난을 통과할 때 마치 철이 불로 만날 때 연단하는 것처럼 더욱 굳게 단련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믿음살아있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고난을 피해가고 고난을 도망가지 않습니다. 물고기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살아있는 심령의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기고 나아갑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전부 고난을 당했습니다. 희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갇혔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과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고난을 이겼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고난 앞에서도 손해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고난을 받습니까?
먼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는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올때 우리의 감정이 흔들리고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때가 잇습니다. 오늘 아벨은 고난이 있어도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인정 예배를 드렸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제가 부목사때 어떤 여자 집사님이 암에 걸려서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매일같이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밤에는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잠시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지만 이 집사님은 매일 같이 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에배드렸습니다. 목사님 전도사님을 불러다가 함께 기도하고 에배드렸습니다. 살려달라고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을 원망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영광돌리게 해달라고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찬송은 부르지 못하고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였지만 그분은 온마음을 다하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그리고 편안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저는 그분을 보면서 진정한 믿음이란 고난 앞에서 고난 속에서도 고난을 경험하면서 알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고난이 있을수록 예배의 자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올수록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풍파가 거칠고 아무리 거세더라도 오직 믿음으로 나를 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그리고 주님 앞에 갔을때에 크게 인정과 칭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벨은 비록 짦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짧지만 가장 굵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볼품없는 인생이 아니라 가장 멋진 인생을 살앗습니다. 성경에 대대로 믿음 생활 예배생활의 거룩한 모범이 되었습니다.우리 모두에게 아벨과 같은 믿음의 삶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시는 삶이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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