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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해의 주 하나님] 창 3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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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주 하나님> 창33:1-12


오늘 본문은 성경의 모든 이야기 가운데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장면의 하나일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대하드라마가 그 한 차례의 막을 내리는 해피 엔딩의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탐욕과 시기, 갈등과 원한으로 얼룩진 형제간의 화해를 그린 장면치고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을 찾아보기도 힘들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다 도둑질해서 도망간 아우를 향해 이를 갈며 20년 간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을 형 에서가 장정 400명을 거느리고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그는 형의 분노가 사라지고 그의 마음이 기뻐져서 자기를 용서하고 받아주게 할만한 모든 조치를 취하는 한편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할 수 있는 모든 안전대책을 강구해 놓고서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소유와 처자들까지 차례로 얍복나루를 건너게 하고는 홀로 남았다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고 거기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자신도 얍복나루를 건넜습니다.

얍복나루를 건넌 야곱에게서 우리는 얍복나루를 건너기 전의 야곱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발견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했고 3절에서는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갔다"고 했습니다. 얍복나루를 건넌 야곱은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드디어 그의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그런데 얍복나루를 건너기 전에는 형이 그토록 무섭고 그를 다시 대면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워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1-2) 그러고도 자신은 홀로 뒤에 남았던 야곱이 이제는 그 처자들 앞에서 나아가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갔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졌고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또 형에게로 나아갈 때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상대방을 향해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는 것은 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더 이상 형을 우습게보거나 막 대할 상대로 여기지 않고 형을 최대한으로 높이며 자기는 최대한으로 낮추었던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합니다. 에서가 야곱을 보기에 앞서서 다섯 차례나 만난 예물 떼는 왜 보낸 것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 때 야곱은 대답하기를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형에게서 용서 받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솔직해진 야곱을 봅니다. 더 이상 형을 속이거나 이리 저리 둘러대려고 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말하는 야곱입니다.

이렇게 달라진 야곱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4절에 보면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했습니다. 상극하던 형제의 20년만의 만남이 곧바로 극적인 화해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에서가 이렇게 말하니다: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이것은 "내 땅으로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즉 용서하고 환영한다는 것이며 이제는 같이 살자는 뜻입니다. 20년간 야곱의 마음 한 구석에서 그토록 그를 짓누르고 괴롭혔던, 그리고 외삼촌 라반을 떠난 후로는 더더욱 무섭게 그를 사로잡았던 일들이 일순간에 헛된 걱정이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급격하고 놀라운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에서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었겠습니까?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다 보니 옛 일이 다 잊혀졌고 노여움도 다 식어버린 것이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에서가 야곱에게로 오면서 장정 400명을 거느리고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서가 장정 400명을 모아 그들을 이끌고 야곱을 향해 출발할 때에는 야곱을 단단히 응징하려는 의도가 분명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서가 야곱을 만나자마자 그 놀라운 화해의 몸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그가 야곱에게로 오는 동안에 야곱의 꾀대로 만난 다섯 차례의 예물공세에 그만 마음이 녹아버리고 만 때문이겠습니까?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8-9절을 다시 봅니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여기서 우리는 에서가 이미 아우의 재산을 탐할 일이 없을 만큼 자신의 재산을 넉넉히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결코 재물에 눈이 팔려 오랜 복수심과 천추의 한을 풀어버릴 에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재물이 형제간의 화해를 이룬 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런 돌연하고 놀라운 화해의 힘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으며(32:11-12) 얍복나루를 건너기 전 그 나루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그의 처절한 매달림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기 전에는 놓아드리지 않겠다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야곱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그의 그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얍복나루를 건널 만큼 담대하게 하시며 형을 향해 겸손하고 솔직할 수 있게 하실 뿐 아니라, 야곱을 향해 오고 있던 에서의 마음까지도 놀랍게 되돌려놓으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형제 사이의 공조, 다시 말하면 야곱과 에서의 공동의 노력과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진 화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견원지간의 형제 사이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써 놀라운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의 관계는 우리 남북간의 관계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형제 사이의 갈등과 화해라는 절박한 문제는 지금 우리의 상황에도 적용되는 것이며, 또한 그 문제해결의 힘 역시 우리의 남북문제해결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임은 분명한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문제를 해결한 열쇠가 에서에 대한 야곱의 물질공세나 저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듯이, 우리의 남북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 또한 북한에 대한 남한의 물질공세와 굴욕적인 저자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앞에서 새 사람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역사가 우리에게 없이는 결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얍복나루인 휴전선이 건너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만남과 그의 복주심의 약속 없이 행하는 모든 물질공세나 저자세는 헛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고 하나님께서 북쪽 동포들의 마음을 돌려주셔야 우리 민족의 화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염원하는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은 민족의 공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국론을 분열시키는 두 주장이 있습니다. "민족공조"와 "한미공조"입니다. 민족공조와 한미공조 중 어느 것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더 바른 길이냐는 싸움인 것입니다. 민족공조와 한미공조는 둘 다 좋은 것이고 따라서 공존하며 병행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서로를 극렬하게 배척하는 기이한 현상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일부 국민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민족주의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 된 것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근본적 믿음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민족이라 해도 그 민족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우리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 하더라도 민족사랑이 하나님사랑보다 우선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민족사랑이 하나님과 그의 법과 정의와 평화를 무시하거나 이에 반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성을 보다 확실히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 세계질서와 국제관계를 파괴하면서까지 민족사랑을 외쳐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민족사랑은 북한이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돕고 함께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되어야지, 한국도 북한과 같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함께 망하는 길을 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북한이 잘못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민족사랑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길입니다. 북한이 아무리 전세계가 규탄하는 만행을 자행해도 우리 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작정 두둔하는 것은 적어도 교회가 할 일은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용서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나 명백한 범죄행위를 무조건 비호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이 아님을 교회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북한돕기가 사탕발림 식의 도움이 됨으로써 북한을 계속 국제사회의 고아나 망나니국가로 남게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민족과 소수집권층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김정일은 한민족의 북쪽 절반을 대표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김정일 때문에 기아선상에 허덕이고 인권을 유린당하는 주민들이 우리 민족이지 세계에서 가장 호화판 생활을 하는 김정일과 그 무리들이 우리 민족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김정일 때문에 죽어가는 민족을 살리는 데에 우리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는 조건 없이 북한을 돕되 진정 북한주민들을 살리는 것이 확실한 일에만 나서야 합니다. 주민들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권력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며 결과적으로 비인도적이고 폭압적인 정권을 유지시켜주는 일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무책임하게, 그것도 이 교회 저 교회가 경쟁하듯 퍼주는 것은 결코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비인도적이고 폭압적인 정권이 강화되거나 유지되면 될 수록 더 많은 아사자와 인권탄압의 희생자가 계속 생겨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300만 명의 북한주민들이 죽어나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 때문에 김정일정권이 유지되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탈북난민들의 절규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돕는 것이 주민에게 가지 않고 소수 권력층에게 간다 하더라도 김정일정권을 잘 달래야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고는 전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며, 북한주민들은 어떻게 되더라도 우리만 전쟁의 희생이 되지 않으면 된다는 남한이기주의에 불과합니다. 북한주민들은 더욱 더 기아선상에 허덕이고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되는데도 전쟁이 날까봐 비인도적이고 폭압적인 정권이 요구하는 대로 퍼줌으로써 무너질 정권을 유지시켜주는 것이야말로 반민족적 범죄행위이며 기독교인의 신앙적 양심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이미 북한정권의 봉이 된 한국교회이지만 그러한 상태를 더 이상 지속시켜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는 한반도에 전쟁이 나고 안 나고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라는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김정일을 더 두려워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헤아리지 않고 김정일의 눈치를 더 보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과거를 접고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자는 입장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나 그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북한은 아직도 신뢰할 수 있는 집단임을 증명해보이고 있지 못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북한이 신뢰 받을 만하게 스스로 변화하도록 호소하고 유도해야 합니다. 북한이 신뢰를 받을 만하게 행동하고 신의를 지킬 때에는 한국교회로부터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일체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닫게 할 용기가 한국교회에 필요합니다.

남북간의 화해를 이루고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국가정책에 교회의 입장을 반영시키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소리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으로 교회가 그 믿음을 바르게 하며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노력이 실제적으로 앞서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그 믿음이 바로 서지 못하면서 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먼저 안으로부터 새로워지고, 그 다음 부패한 정치권력과 타락한 경제윤리에 대한 올바른 비판과 견제 및 개혁세력이 되어야 합니다.

해방 직후 공산주의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만한 기회가 없었던 때에 일어났던 좌우익으로의 분열과 대립상황이 반세기가 넘도록 공산주의의 실상을 경험하고도 남은 오늘날 어떻게 재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하나의 큰 의문이며 연구과제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는 30여년의 군사독재와 정경유착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와 정의로운 분배의 경제사회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정의와 평등과 공생의 사회를 목말라 하던 사람들에게 교회가 그 대안이 되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 대안을 찾지 못한 상당수의 서민근로자들과 상대적으로 정의감이 강한 학생들은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만민평등을 주장하고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북한이나 민족주의에서 그 대안을 찾으려고 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북한이 한국국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하여 가장 잘 활용한 것이 민족주의입니다.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감상적인 우리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데에 효과가 컸습니다. 요즈음 새삼 등장한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비극과 불행을 미국이나 일본에게만 돌리게 하고 우리 스스로의 자성의 길을 막으며 더더군다나 북한정권이 저지른 온갖 반인류적 반민족적 범죄와 만행을 덮어버리게 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자민족지상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 국민들이 이러한 민족주의의 포로가 되지 않고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을 갖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의 문제가 지금까지 교회가 바라고 기도해온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지금 상태로 그냥 지내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평화와 일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 실현의 방법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찾아야 하는 것이 교회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반세기가 넘도록 하루도 빼지 않고 새벽마다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 통일을 허락하지 않으셨냐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이 다 무너졌고 북한보다 덜 포악한 공산주의국가들도 벌써 무너졌는데 어떻게 북한 같은 체제가 아직 버티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문제인지 모릅니다. 즉 우리 한국이 아직 통일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안 되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통일을 위한 준비기간을 연장시켜 주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 연장되고 있는 기간 동안 우리는 서둘러 통일을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튼튼히 하는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리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교회가 먼저 바로 서고 그리고 이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통일을 선물로 주실 것임을 굳게 믿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민족공조만이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준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한미공조를 튼튼히 하는 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는 주장도 잘못된 것입니다. 민족공조도 중요하고 한미공조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그 무엇에 앞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는 민족공조는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는 한미공조도 별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온 힘으로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얻듯이 온전히 변화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우리가 바라는 남북의 통일과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는 놀랍고도 의외로 빨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20년만에 만난 야곱과 에서가 모든 원한을 잊은 채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울었듯이, 분단 60년이 가까워오는 우리 남북한의 동포들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며 감격의 포옹을 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가 사라지는 역사적인 화해의 장면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보다 더 감격스럽게 전 세계를 향해 연출하는 주역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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