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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 (고후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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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고후8:1-9)  박근호
 

성령강림절을 맞으면서 모 기독교 단체에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성령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나온 대답 가운데 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들이 충만, 은혜, 사랑, 기적, 능력 등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아마 이 일련의 대답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성령' 하면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가 '은혜'입니다. 성령의 은혜,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기독교 용어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우리로 그 은혜 속에서 살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또한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막상 '그 은혜가 뭐냐'고 물으면 막연해지는 것이 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 또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비유적 표현을 써서 그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편지'와 '향기'라는 표상은 하나의 매개체로서 그가 행하는 모든 삶의 영역이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겁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그 지역 사람들로부터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던 것도 저들을 통해 '그리스도라고 하는 존재'를 어렴풋하게 나마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편지로 남에게 읽혀지고, 향기로 남에게 느껴져서 '아 하나님이 이런 존재시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하는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편지로, 어떤 향기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살고 계십니까? 나와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우들에게 마게도냐 지방의 여러 교회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의 교인들에게 주신 은혜를 중고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 '마게도냐 교회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고린도 교회는 그 어느 교회보다도 자신들의 교회가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풍성했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신유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소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사도가 마게도냐 교회에 내린 하나님의 은혜를 저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너희가 성령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전부라고 착각해선 안된다'는 경고적 메시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 체험에 대한 지나친 독선과 자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체험한 그것이 성령의 은사의 표준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체험이 없는 이를 무시하고 자기와 같지 않은 자들을 판단하는 편향적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들을 향해서 사도는 '그들에게만 내려주신 그들만의 은혜'만 있는 게 아니라 '마게도냐 교회의 교인들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있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은혜와 자신의 은혜를 한번 비교해 보고 부족하고 미진한 것을 균형있게 채우라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럼 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마게도냐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사도는 2-5절에서 마게도냐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 사업은 주후 50년대 중반에 바울이 힘썼던 주요 활동 중의 하나였습니다. 저들은 여러 면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통치국인 로마로부터의 압제도 압제였지만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도 많은 미움과 질시를 받았습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수많은 불이익을 감수하애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였던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도울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역에 힘을 실어주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마게도냐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제 사업에 참여한 마게도냐 지방의 여러 교회들을 언급하는데 특히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의 교회는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구제사역에 많은 기부와 도움을 준 교회였습니다. 이것을 사도는 '마게도냐의 여러 교회가 풍성한 연보를 해 주었다'고 고린도 교회에 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은혜가 무어냐'는 질문으로 시작했는데 우리는 여기서 은혜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은혜'라는 말은 '죄인으로서 아무런 자격도 없고 단지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말합니다. 이게 바로 카리스라는 헬라어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하나님의 관대함이 우리에게 임한 것이요 또한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 역시 관대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관대함을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셨고 그런 관대함을 받은 마게도냐의 성도들 역시 관대함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저들로 하여금 큰 환란 가운데서 시련을 받으면서도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했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드리는 생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환난과 시련 속에 기쁨이 왠 말입니까? 극한 가난 속에 풍성한 연보가 왠 말입니까? 슬픔과 인색함이 절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의 자리 속에서 저들은 오히려 기쁨과 풍성한 드림과 나눔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마게도냐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해 드러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저들의 생활이 예루살렘 형제들보다 더 나을 것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본토의 성도들이나 저들이나 어렵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사도는 빌1:29-30절에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이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입니다..." 사도는 은혜와 고난을 함께 말하면서 그 둘을 연결짓고 있습니다. 또 살전1:6절이나 2:4절, 3:34절에 보면 "여러분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마십시오"라고 독려합니다.

본토에서나 밖에서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특징은 고난과 가난이었습니다. 그것은 박해의 결과였고 믿음에 대한 대가였습니다. 마게도냐는 농업과 광업과 목재업 등이 융성하여 전체적으로 꽤 번영한 지방이었지만 그것은 다 로마인들의 독점물로 식민지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환난과 시련 그리고 째지게 가난한 상황이 저들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밑바닥 가난의 충만함이 저들 마음을 단순하게 해서 넉넉한 선량함으로 흘러넘쳤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마음이 인색해지고 좁아진 게 아니라 관대함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의 어려운 시험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고 밑바닥 가난 속에서도 오히려 어려운 자들을 돕는 일에 기꺼이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바로 여기서 저들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를 본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요 신기한 일입니다. 이게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사도는 3-4절에서 저들의 관대함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그들은 그 어려운 중에도 힘자라는 대로 아니 힘에 겨웁게 자진해서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돕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종용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구제에 앞장섰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사도는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기 때문'이요 또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인 자기들에게 내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저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사도들에게 주었기에 자기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낼 수가 있었습니다. 즉 저들이 드러낸 하나님의 은혜란 바로 자신들을 기꺼이 나누는 관대한 삶이었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 경황없는 지경에서도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구호사업에 적극 참여했고 사도에게 '우리도 그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멋진 인생 아닙니까? 보십시오. 2절은 생각할수록 역설적인 문구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드러내며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도 그들처럼 살고 있습니까? 어려워서 그렇게 못살고 환난과 시련이 넘쳐서 그렇게 못산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저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며 살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에 갇혀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얇은 믿음이 아직도 우리를 자기라는 감옥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환경이나 소유나 그 어떤 여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저들은 환란 속에서 많은 시련을 겪어가면서 자기들보다 더 못한 사람들을 생각한 겁니다. 동병상린의 정을 느낀 겁니다. 형통할 때 생각 못했던 것을 환난 속에서 생각했고 잘 나갈 때 잊고 살던 것을 시련 속에서 기억해 냈습니다. '가난이란 게 겪어보니 이렇게 힘든 거구나, 고난이란 게 겪어보니 이렇게 벅찬 거구나... 그러니 우리도 힘들지만 함께 저들을 도와야지...' 그러면서 자신을 드려 선한 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며 사는 선교적 삶입니다. 환경을 초월해서 능동적으로 누리는 그 무엇이 바로 은혜라 그 말입니다. 환난이 닥치고 가난이 몰아치면 불평과 원망이 앞서고 자기 한 몸 보살피기에 급급해지기 쉽지만, 울어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 절망해야 하지만 저들은 오히려 기뻐하고 나누고 희망했다는 겁니다. 형통할 때 맛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 속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받은 은혜 속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이런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자, 그럼 왜 마게도냐에 임한 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증거하는 걸까요? 고린도 교회에다가 예루살렘 모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요청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얘기였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질 못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정식 사도가 아니라느니, 언변이 없다느니, 돈만 밝힌다느니, 못생겼다느니 하며 바울을 폄하하는 이들이 적지가 않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베드로파다, 아볼로파다 하면서 파당을 지어 바울을 배척하는 이들도 적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교인들을 설득해서 헌금을 하게 하고 예루살렘 성도들을 구제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도는 7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는 것들을 먼저 주욱 열거합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8절을 보면 사도가 얼마나 조심스레 이 말을 건네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고린도 교인들의 형편이 마게도냐 교인들의 형편보다 낫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저들은 마게도냐 형제들과는 대조적으로 훨씬 풍부한 형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저들의 모든 것이 풍부하고 흘러넘친다고 말합니다. 믿음도 넘치고 말과 지식과 열성 그리고 사도 일행으로부터 받은 사랑도 넘쳤습니다. 그러므로 마게도냐의 형제들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업에 풍부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마게도냐 교인들이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드러냈는가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소개한 것은 다른 사람의 열성을 보여줌으로써 저들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스스로 확인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마게도냐 형제들의 그러한 삶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들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유용한 척도가 되는 셈입니다. 그들과 자신들의 삶을 비교해 봄으로서 저들보다 더 풍성하고 넉넉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까를 깨닫고 실행하게 하려는 것이 바울의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행동 근거가 단순히 타인과의 비교에서 시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이지 그래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더 중요한 것은 저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분임에도 저들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여러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었고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주님이 자발적으로 가난을 떠맡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풍부한 여러분은 더욱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힘써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드러내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가난하나 풍성했던 마게도냐 교인들처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풍부하나 자기중심에 갇혀 인색했던 고린도 교인들처럼 살고 있습니까? 은혜로서 체험한 관대함을 누굴 위해 쓰며 살고 있습니까? 나입니까 이웃입니까? 저들 중에 과연 누가 진정한 부자였을까요? 자신을 부요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남을 부요하게 하는 자가 부자입니다. 자기가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거기서 관대하고 풍성하고 너그러운 삶이 나오는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받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받은 은혜를 어떻게 드러내며 사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잊지 마십시다. 그분은 우리를 부요케 하려고 스스로 가난해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려고 가난해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며 사는 인생은 언제나 나를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해지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바치는 데서 시작됨을 기억하십시다. 그 인생이 성공인생이요 승리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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