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 / 고전 14:34-40

  • 잡초 잡초
  • 1111
  • 0

첨부 1




Subject  :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
고린도전서14:34-40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34-40)


교회에서 여자의 지위 문제

  오늘 말씀의 첫 번째 교훈은 교회에서 여자의 지위 문제입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34-35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본문이 속한 문맥은 12장에서 14장까지의 은사의 문맥입니다.  좀 더 좁혀서 얘기한다면 방언과 예언을 논하는 가운데 언급된 "교회의 秩序"에 관한 문맥입니다.  즉, 교회에서 남녀의 질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자는 방언도 예언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앞선 11장에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를 논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여자가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고전11:5)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곧 자신을 다스리는 머리, 즉 남자가 땅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된 위치에 있습니다.  방언을 하든지 예언을 하든지 바로 이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여자들은 교회의 공적 집회에서 남자의 권위를 우선하라는 말입니다.  이 원칙은 사도 시대 당시 교회들의 일반적 규칙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규칙이 바로 율법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율법에 있다고 한 것은 바로 모세가 기록한 율법서에 있다는 뜻입니다.  율법서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다섯 권의 책을 말합니다.  그러면 율법서 어디에 여자가 잠잠하라는 말이 있습니까?  창세기 3장을 언급한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런 벌을 내리셨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  남편이 아내를 다스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성의 지위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바로 이 말씀의 원리를 적용합니다.

예를 들면 목회 서신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2:12-14)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여자의 지위를 상당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만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는 것까지도 금하고 있습니다.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35절)  여자들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기분 나쁜 일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몰라도 묻고 배우는 것까지 금하다니? 
이 점 때문에 많은 feminist들이 사도 바울을 남성우월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  과연 바울이 지나친 말을 한 것일까요? 

  우리는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두 가지 의미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요 질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이유를 묻지 말고 그냥 순종해야 합니다.  feminist들은 사도 바울을 남성우월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려면 아주 중대한 세 가지 도전을 해야만 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이 잘못된 사람이라는 비판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이 쓴 성경도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해야 됩니다.  셋째로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까지도 잘못하셨다고 비판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보다 위에 있습니까?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잘못 세우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자기 주장을 하는 겁니까?  절대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교훈이 하나님 말씀임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교훈이 곧 하나님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36-38절)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교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그렇게 한정하셨을까요?  그것은 곧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만 못해서가 아닙니다.  여자가 덜 똑똑하다든지, 능력이 부족하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질서의 문제입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질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강을 바라다보면서 따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강물아, 너는 왜 낮은 데로 흘러가니?  기분 나쁘다!  올라가라!"  우리는 물이 왜 낮은 데로 흘러가느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부는지 따지지 않아요. 

왜 지구는 하루에 한 번씩 自轉하느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나이가 들면 늙어야 되느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병들어야만 되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순종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질서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법이라면 그냥 이유를 묻지 말고 지키면 됩니다.  "왜 이스라엘은 12지파냐?  왜 아들들로 지파를 나눴느냐?  딸들로 다시 나누자!"  그렇게 따지지 않고 그냥 순종했잖아요?  12 사도들도 다 남자들입니다.  왜 여자 사도는 없느냐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셨으면 그냥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기 전에 따지는 것은 죄인의 특징입니다.  에덴 동산 가운데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먹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도 꼭 따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왜 선악과는 만들어 놓으셨을까?  꼭 고따위로 얘기해요.  창세기 2장에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잘 보세요.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마음대로 먹으라고 했습니다.  모든 실과를 맘대로 먹으라고 했으니 실컷 먹으면 됩니다.  오직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만 먹지 말라고 했어요.  100만 가지를 다 먹고 단 한 가지만 먹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야속하십니까?  먹으라고 한 것은 왜 안 먹고 왜 먹지 말라고 한 것을 꼭 먹으려고 합니까?  선악과는 괜히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괜히 먹고 자빠지라고 만든 게 아니예요.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순종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최소한의 규칙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예요.  그것이 인간의 생존 규칙입니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왜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의 질서는 존중하면서, 같은 하나님이 세우신 남녀의 질서는 반항합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둘째는 역할의 분담입니다.  남자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자가 열등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는 역할이 다릅니다.  남녀 평등은 가치의 평등을 말하는 것이지 역할의 평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남자의 역할이 있고, 여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아무리 남녀가 평등해도 남자가 출산을 할 수는 없잖아요?  여자가 수염이 나지 않고, 남자가 젖이 나오지는 않잖아요?  극단적인 feminist들은 창조의 질서까지도 거부합니다.  "지금의 남녀 역할은 사회적 진화의 결과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면 된다!"  알아서 하시구려!  성경에 보면 남자와 여자의 활동 무대가 다릅니다.  여자의 활동 무대는 가정입니다. 

남자의 활동 무대는 사회입니다.  여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가정을 세우는 일입니다.  가정은 99% 여성에 의해서 세워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시128:3-4)  남성이 떠난 가정은 존재할 수 있어도, 여성이 떠난 가정은 유지되기 힘듭니다.  특히 자녀 양육은 여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앞서서 여성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했지만 실상 여성은 최상의 교육자들입니다.  바로 가정에서 자녀를 가르치는 역할입니다.  오늘날 모든 교육이 학교 중심의 제도권 교육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극입니다.  인성 교육이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가정입니다.  정서 교육이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가정입니다.  성품과 인격이 어디서 형성됩니까?  가정입니다.  가정 교육의 중심은 여성입니다.  여성이 가정을 떠날 때에 자녀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문제아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나옵니다.  모든 사회 문제들이 다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우울증 걸린 아이들, 마약하는 아이들, 강도 도적질하는 아이들, 살인범, 사기꾼,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들, 돈만 아는 물질주의자....다 여성이 떠난 가정에서 나옵니다.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은 여성이 남성만 못해서가 아닙니다.  여성의 활동 장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산업 사회가 되면서 남녀의 역할이 뒤죽박죽이 되고 있습니다.  여자 같은 남자, 남자 같은 여자!  남자가 하는 일은 다 해보겠다는 여자, 여자가 하는 일도 다 해보겠다는 남자!  심지어는 남자로 태어나서 육체까지 여자가 되겠다는 놈들도 있어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부분의 결론입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이 법으로 정하신 남녀의 질서입니다.  둘째로는 남녀의 역할의 분담입니다.  여성의 활동 무대는 가정이요,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양육하는 일입니다.  가정 경영!  그것은 잭 웰치가 경영하는 다국적 기업 GE보다도, 빌 게이츠가 경영하는 마이크로 소프트보다도 더 중요한 사회적 기업이요 국가적 기업입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하는 가정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줘야 합니다.  여성들 자신도 오늘날 사회에서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

  오늘 말씀의 두 번째 부분은 39절에서 40절의 말씀, "적당과 질서"입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39-40절)  이 부분은 은사론의 결론입니다.  동시에 모든 교회 공동체 원리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무슨 교훈입니까?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40절)  방언을 하든지 예언을 하든지 다 좋습니다.  방언의 부작용이 많기는 하지만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언은 유익한 것이니 적극적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다만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해야 합니다.  적당하게, 질서대로!  질서에 대해서는 앞서서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기 때문에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적당하게 하라"는 데 맞추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십시오! 

  적당히 하라는 말의 뜻이 뭡니까?  우리 말 가운데 "適當히"란 말처럼 잘못 사용되는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본래 "適當"이란 말은 좋은 뜻입니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알맞은 분량이 適當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적당히"란 말이 오히려 "얼렁뚱땅", 혹은 "대충대충"이란 뜻으로 사용됩니다.  교회에서 모든 은사 사용의 대원칙은 適當과 秩序입니다.  모든 것은 적당히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적당히 하는 겁니까?  "적당"이란 말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동양 철학에 나오는 中庸입니다.  中庸이란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이 없는 중심체를 세워서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는 꼭 알맞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자의 손자인 子思는 中庸을 가리켜서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 일어나지 아니함을 중(中)이라고 하고 일어나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동양철학에서 중용은 상당히 의미가 넓습니다.  단순히 중간 정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에 맞으면서도 과부족이 없는 타협의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적당히"란 단어는 헬라어로 "ευσχημονωσ"(유스케모노스)입니다.  "ευ"(good)란 말과 "σχημα" (appearance, image)란 말이 합성된 말입니다.  직역하면 "모양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냥 기분이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알맞게 잘 균형이 잡혀서 보기에 좋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5)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는 말은 기분이 좋으셨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모든 기능이 바르게 작동된다는 뜻입니다.  "적당히"란 말의 의미가 그렇습니다.  공동체적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가 바르게 작동하도록 행동하는 것이 곧 적당한 행동입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공동체를 삐거덕거리게 만들면 잘못된 행동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모든 것을 적당히 하시기 바랍니다.  직분도 적당히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 직분이나 지위를 과도히 주장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권리라고 해서 다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권리를 양보하는 것이 공동체에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전9:11-12,18)  바울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될 사례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상급을 받겠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상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과도히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구역장, 교사, 성가대, 전도회 임원...다 마찬가집니다.  자기 직분을 과도히 주장하지 마세요.  적당하게 남에게 양도하세요.  가끔 보면 모든 일을 꼭 내 방식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소한 일까지도 자기 방식대로 휘두르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한 두 사람만 있어도 온 교회가 골치 아픕니다.  가족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으면 온 가족이 힘들게 살아야 됩니다.  이런 사람이 정치인이 되면 독재자가 됩니다.  자기식대로 휘두르는 사람은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어떤 교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과도한 것도 좋지 않지만 부족한 것도 좋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일에 너무 소극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든지 남이 먼저 하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하지 않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아요.  누가 먼저 인사하지 않으면 아는 척도 않습니다.  누가 말 걸기 전에는 입도 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말이나 걸어주지 않나 항상 기대합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나를 왜 몰라줄까?  사람이 귀신입니까?  어떻게 움직이지 않고 콕 박혀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이런 소극적인 사람들만 있으면 교회 공동체는 썰렁해집니다.  목사 혼자 허리가 휘어집니다.  기업체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소극적인 사원들만 있으면 앞날이 뻔합니다.  발전이 없어요.  사장 혼자 죽어라 뛰어다닙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은사를 기꺼이 사용하세요.  누가 뭐라고 하든지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열심히 하세요.  개인적인 관점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모든 일에 소극적인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밤낮 남의 꽁무니만 따라 다니다가 인생 종칩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에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여학생들은 가만히 있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혼자 가만히 있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여럿을 즐겁게 만들어 보세요.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앞장서서 해 보세요.  때로는 당신의 좋은 점은 이런 것이라고 말해보세요.  머지 않아 연애 박사가 될 겁니다.  제가 지금 연애 강의 한 겁니까?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적극적으로 사세요.  그것이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공동체를 세우려거든 모든 일을 적당히 하세요.  "적당히"란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이치에 맞고 알맞은 상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된 상태가 바로 적당한 상태입니다.  적당히 행동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두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교회에서의 여성의 지위 문제입니다.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이요 창조의 질서입니다.  차별이 아닌 질서의 문제입니다.  또한 이것은 남녀의 역할의 분담입니다.  여성의 활동 무대는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여성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녀 교육과 가정 건설입니다.  여성이 가정에 있다고 해서 결코 남성들보다 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은 사회의 모태입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자랍니다.  인격과 재능이 가정에서 길러집니다.  가정은 인간 생활의 안식처입니다.  가정에서 안식하지 못하면 어디서도 안식할 수 없습니다.  가정은 국가의 토대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국가 사회도 무너집니다.  가정은 인류 사회의 모태입니다.  인류 평화도 건강한 가정에서 나옵니다. 
  둘째는 공동체를 위한 직분의 원리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적당의 문제를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일은 적당히 해야 됩니다.  과하지 않아야 되고, 너무 부족하지도 말아야 됩니다.  공동체에 유익이 되도록 행동하세요.  그것이 곧 適當입니다.  적당히 행하면 모든 공동체가 발전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마찬가집니다.  적당한 행동은 개인에게도 유익됩니다.  개인적으로 대접 받고 개인이 발전합니다.  적당한 행동가가 되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