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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은.... (행 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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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2:37~47 
제목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방문자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신앙의 기본적인 사항을 살피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어떠해야 합니까? 부모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착하게 산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달에 두 번 초하루 보름 절에 올라가야 되는 것을 일주일 마다 일요일날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깨닫게 하실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큰 거리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독교를 자신이 선택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한 다음에 기독교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이들은 기독교에 그 나름대로의 가르침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해야 할 숭고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 책을 읽기도 하고 상당 부분에서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독교가 순전히 감정의 문제입니다. 아주 멋진 평안이나 사랑이나 행복을 경험하는 것을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그 멋진 감동을 먹고 살아가며 계속 그것을 느끼려고 집착합니다.

그 다음으로 의지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생각할 때 사람들이 어떤 특별한 생각을 한다고 하거나 혹은 괜찮은 느낌을 가진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평안과 사랑이나 행복을 느낀다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은 의지적인 결단에 따라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관한 오해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네 번째 오해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흔히 가지게 되는 오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의무, 두려움 때문에 마지못해 해야 하는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한마디로 말하면 신나게 사는 것을 망치는 걸림돌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을 주위에 살펴보니까 그 사람들은 신나게 살아나갑니다. 주일이거나 아니거나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놀러가고 등산하고, 낚시하고 골프하고 지냅니다. 그들은 전혀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내심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하고 싶어도 쉽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기독교라는 것은 뭘 못하도록 하고 제한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두려워해서 하지 않는 어떤 행동이 마치 기독교인의 삶인 것처럼 그렇게 여깁니다. 기독교를 의무감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은 엄숙한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짧고 빨리 끝날수록 좋습니다.

이런 기독교인은 그 어디에도 행복이 없습니다. 기쁨은커녕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주일날 오전에 교회 가야되고 저녁에 교회 가야되는 것은 더 힘든 일입니다.그래서 대채로 주일날 낮에 한번 나가는 것으로 끝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세례 받을 때는 철썩같이 약속 했어요. 예배시간에 잘 참석하는 것 가르쳐 줬습니다. 그런데도 보니까 그냥 빠지는 것입니다. 모르지요 앞의 선배들이 그러니까 따라서 그러는 건지도.

이들에게 기독교란 엄숙한 의무감입니다. 그 의무는 우리를 비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신나게 살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힘들게 신앙생활 하면서도 그것도 신통하게 자기 자녀들 보고 교회 가라고 그러고 강요를 합니다.

그 결과 아이들이 어릴 때 고분고분 말 잘 들을 때 말이지 조금 머리가 커지면 더 이상 말 듣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래요. 대한민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안 있습니까?” 이렇게 반발하고 나오면 자식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고등학교 갈 때 벌써 엄마가 포기한 부분이 있습니다. “고등부 나가지 말고 주일 어른 예배만 드리고 열심히 공부해라”그렇게 벌써 해놓았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생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대학교 가서 좀 잘 믿어다오. 그래가지고 대학 들어가면 끝입니다. 이들에게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사슬이고 얽어매는 규율입니다.

천로역정에서 주인공처럼 잔뜩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 마치 종교인것처럼 보입니다. 기독교가 그런 것처럼 보고 자라면 나중에 철들고 부모의 통제를 벗어날 나이가 되면 그 아이를 신앙생활 하도록 할 방안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예수믿는 것이 신나는 것인 것을 보여줘야 됩니다. 어릴 때는 아직 뭘 모르지만 “우리 엄마 아버지는 주일날 되면 기분이 제일 좋아지더라” 주일 되면 아주 깨끗한 옷, 멋있는 옷 입고 손잡고 교회가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나중에 철이 들어서 도대체 무엇이 교회하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아이들이 신앙생활 한다는게 힘이 들지요.

예수 믿는 것 완전히 즐거움 단절하고 마치 수도원 생활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성경 읽어보았는데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기독교는 그런 기독교가 아닙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6-47절).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입니다. 떡 먹고 기뻐하면서 음식 나누면서 기뻐하고 찬송하고, 그 모습 보고 사람들이 다 부럽게 쳐다보고, 이런게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이와는 동떨어진 기독교가 나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기쁨을 빼 버리면 그건 이단이라고. 예수 믿는 즐거움이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그건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딴것은 몰라도 저 사람은 예수 믿고 나서 아주 신나게 살아가더라”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시편에 보니까 우리 하나님을 표현하기를 “극락의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가장 최고의 기쁨의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우리 마음 속에서 기쁨이 넘치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내가 믿기로 결단하고 시작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나한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참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접했다면 여러분이 도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봅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무엇이며, 우리 스스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이 약속은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은 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벧전 2:9) 라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 속에서 끄집어 내신 분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빛으로 들여보내신 분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우리에게 영혼의 쉼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보니까 베드로가 사람들을 향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사람들은 너무 쉽게 기독교를 종교적인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달린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종교는 생명이 없고 기계적입니다. 활력이 없고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는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하나님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자신을 흔들어 놓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여길 근거가 어디 있는지 다시 살펴야 합니다.

태초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시는 역사는 창조에 버금가는 엄청난 역사입니다. 사실 천지창조보다 더 놀라운 역사가 우리 안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어둠, 공허, 혼돈 속에 빛이 있으라 하신 그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 시작됨으로서 우리가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새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성경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써서 그런지, 너무 경박하게 써서 그런지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별반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구원, 구원받는 것 보다 십 원 받는 게 낫지 뭐 이런 농담부터 하기 시작해서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단어입니다. 그건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을 갈라놓는 차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비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속합니다. 집에 불이 나서 활활 타오르는데 어떤 사람은 구출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구출을 못 받았어요. 그럴 때 우리가 구원받았다, 구원받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법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판결이 끝나면 피고는 둘 가운데 하나의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자유를 얻거나 아니면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가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구원 받는다는 것은 무죄 선언을 받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종들이 나오지요. 종들은 전적으로 주인에게 달려있는 사람입니다. 사는 것도 주인의 손에 달렸고 죽는 것도 주인의 손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 종을 돈을 주고 사서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은 있었습니다. 몸값만 지불하면 해방되는 것입니다. 해방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쩌면 종노릇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해방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기가 힘들지 모르겠어요.

오늘 1부 예배 때는 함경도 북쪽에 살다가 지난 3월달에 자유대한의 품에 안긴 자매 한 분이 며칠 전에 울산에 보냄 받아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시간이 없어 못 물어 봤지만 만나보면 그 삶이 얼마나 크게 차이 나는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원 받는다는 말은 성경에 구원 받았다(saved) 그러기도 하고 구원받고 있다 이러기도 하고 구원받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 세 가지 의미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법정에서 피고석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십시오. 그에 대해 할 말은 많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사항은 그가 피고석에 서서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기분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신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간밤에 잠을 잘 잤을 수도 있고 밤을 꼬박 셌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눈만 붙이면 악몽에 시달렸을 수도 있고 좋은 꿈을 꾸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서 있는 그 피고의 신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지금 그의 처지는 기소당해 있고, 재판을 받고 있으며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모르는 처지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끼리는 “저 사람은 나빠, 저 사람은 착해”그렇게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심판아래 있으며 이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나면서부터 그리고 우리가 행한 잘못 때문에 피고석에 서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신분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죄를 범했습니다. 흠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판사석에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는 죄인이며 죄인에 대한 판결은 바로 이렇습니다.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자비로운 하나님의 얼굴에서 떠나서 그의 힘의 영광에서 벗어나서 영원히 벌 받아야 한다. 그것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믿는 순간, 우리의 모든 신분이 바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신분과 지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것이 구원을 바라보는 첫 방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 믿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정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왜? 우리는 이미 무죄 방면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우리 죄에 대한 처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요 3:16, 18).

우리 모두는 믿기 전에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만, 믿는 순간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피고석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자녀의 신분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는 구원받았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이제 완전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무죄로 방면된 것은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법을 지켜가면서 살 수 있는 새로운 자리에 회복된 것일 뿐입니다. 무죄방면된 것은 그 형제는 완벽해졌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법을 지키는 시민으로 살아가는 자리에 놓여지는 것입니다.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까? 나의 악한 본성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나의 악한 성향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나의 유한한 몸에 남아 있는 죄의 흔적과 찌꺼기에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예”라고 하고 내 욕망에 대해서 “아니”라고 할 때 마다 우리는 한 개씩, 한 개씩 그 구원의 여로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온전하신 그 성숙하신 모습에 닮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구원 받고 는 중입니다.

성경은 첫 번째 과정을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두 번째 과정은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고 말합니다. 칭의는 법적으로 무죄 방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이제는 완전을 향한 노정을 걸어갈 수 있는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피고예요. 갖혀 있어요. 새 삶을 살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면 그때부터 구원을 향한 완전을 향한 노정을 걸을 수 있는 특권이 여러분들에게는 주어집니다.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완전해져 갈 수 있습니다. 이 완전을 향한 노정은 가다보면 오르막길도 있고 또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뭐 잘 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영 아니올시다 싶은 그런 때도 있습니다. 내가 봐도 내가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 와중에서 오르막 내리박이 있지만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 입니다. 이를 향한 신앙의 걸음을 나선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향하고 있는 영광을 위해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구원받았고, 지금 받고 있지만 완전히 구원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성경은 이 마지막 과정을 영화(榮化, glorification)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정죄와 죄의 책임에서부터 해방될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와 오염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들이 죄 짓지 않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여러분과 저는 완전해질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소원하는 대로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우리는 다가오는 영광 속에서 이런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세 가지 단계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구원 이미 받았다”(완료). “구원받고 있다”(진행). “구원받을 것이다”(미래).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두 번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가 이들 삶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들의 삶에서 지배적인 요소였습니다. 기독교가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우리의 삶에 덧붙여진 무엇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과 거의 같지만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는 삶이 아닙니다. 주일아침이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찾는다는 것만 다르고 나머지는 모두 같은 삶이 기독교인의 삶이 아닙니다.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그들의 관심사를 보십시오. 그들이 흥분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 하고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재밌어 웃는 것도 다를 것이 없고, 근심하면서 탄식하는 것도 다를 것이 없고, 그러고도 어떻게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저는 텔레비전 프로 가운데서 보지 않기로 결심한 프로가 있습니다. 억지로 우리의 웃음을 쥐어짜게 하는 것, 별반 내 영혼에 도움 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만 죽였지요. 저는 제가 그렇게 믿기 때문에 자녀들을 키울 때도 그랬습니다. “저런 프로그램은 봐서 안 된다”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어야지 24시간 방영한다고 24시간 입 벌리고 앉아있으면 여러분은 제대로 된 신앙인이 아닙니다.세상 살 때도 그렇지 않아요? 신나하는 것, 열광하는 것,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이웃에게 무엇입니까? 이게 달라야 그리스도인이지요. 저는 정말 교육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생각, 어떻게 도와야 될지 길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믿는 것은 대학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대학교 믿는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 믿는 사람입니다. 기독교하고 대학교하고 교자가 같다고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기독교 믿는 사람은 수능 성적에 따라서 자녀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믿지 않습니다. 아이가 어느 대학 들어갔느냐에 따라서 그 아이의 한 평생이 결정된다고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모든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인 것을 믿습니다. 그분의 손에 크게 하심과 위대하게 하심과 뛰어나게 하심을 믿는 것 입니다. 여러분 지난 주간에 성경 묵상하면서 읽어보지 않았습니까?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아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솔로몬이 그렇게 기도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믿고 삽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믿고 살고 관심은 어디에 쏟고, 물질은 어디에다 쏟아 붓고 있습니까?

나는 그래도 십일조 하고 있다고요? 십일조 하겠지요. 그건 세례 받을 때 다 약속한 기본적인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십일조 액수하고, 자녀에게 쏟아 붓는 액수하고 비교해 봐요. 그러면 여러분이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진짜 어느 쪽에 줄섰는지 여러분이 알게 된다니까요. 우리는 “관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되심이라”그렇게 고백했으면 그대로 믿는 거예요. 단지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간다는 것 말고는 안 믿는 사람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러고는 어떻게 신자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텔레비전을 보고 즐기는 것도 같고, 여러분이 애써서 시간 쓰는 것도 같고, 노력하는 것도 같고 물질 쓰는 것도 같고. 기독교인은 삶의 우선순위가 세상 사람들하고 다른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중심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가물일 뿐입니다. 주일 아침에 갈 때 가방하나 골라 메는 것과 같습니다. 갔다 와서는 그 가방 팽개치고 또 다른 가방 들고 나갑니다. 신앙은 단지 교회 갈 때 만 둘러매는 것 같습니다. 교회 갔다 오면 세상 사람들이 메는 똑 같은 가방 메고 설칩니다.

보십시오. 사도행전의 사람들이 우리와 달랐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바뀐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에는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무리들이 이제는 갈릴리 사람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부터 돌아서겠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떤 재난을 만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인재라고 그러지요. 사람들이 그냥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서 여러분의 재산을 탈취해 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법이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분들은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래도 그분들은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십시오. 세금문제 하나 가지고도 정직하지 못하잖아요. 몇백만원만 차이 나도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를 보고 뭐가 달라졌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저사람 정말로 예수 믿는 사람 다르네.” 뭔가 다른 것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초대 교인들은 뭐든지 다 포기할 각오를 가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갔다고 히브리서는 말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시가지라고 하는 영역을 벗어나서 바깥으로 시가지가 줄 수 있는 모든 평안과 안정과 모든 쾌락을 포기하고 광야를 향해서 나아가는 진리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요새는 너무 예수 믿기가 쉬워졌지요?

그들은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았고 멸시받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 철저하고 깊은 변화였습니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이 욕하던 바로 그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여기 사도행전의 사람들에 관해 가장 확실한 사실은, 이들의 전인(全人)이 관련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을 결정짓는 것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리고 감정도 아닙니다. 그리고 의지적인 결단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한 사람 전부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지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를 보면 탁월한 사람들이 다 크리스천들이었어요. 머리가 좋다고 해가지고 예수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속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대인이 어떻게 그런 종교를 믿느냐? 그렇게 나옵니다. 현대가 되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이 있는 줄 압니까? 여러분이 부딪히는 삶의 문제들을 옛날 사람들도 다 겪고 살았습니다. 누군가 우리 사역자반에서 QT sharing 하면서 한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솔로몬 보니까 몇 천 년 전의 사람인데, 적어도 삼 천년 가까이 옛날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고 그러길레 내가 답은 안했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현대라고 해서 뭐 달라진 거 있습니까? 우리 꼭 같은 사람들입니다” 걸치는 옷 스타일은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학시간에 배운 것은 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누기를 배우고도 공정하게 나눠먹기 싫어하는 것은 꼭 같잖아요. 여러분이 당하는 문제를 성경에서 다루지 않는 것 없습니다.

현대인이라고 해서 신앙을 못가진다고요? 천만에요. 현대의 지식은 아무것도 바꿔 놓은 게 없어요. 현대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해서나 인간에 관해서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말해주는 것 없습니다. 죽음과 예언에 관해서 새로운 것을 전혀 말해준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똑똑해서 예수를 못 믿는다는 것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나 당신이 신앙을 갖기에는 너무 당신은 많이 배웠소 하고 여러분의 등을 마귀가 두드려 줄때가 있지요? 또 어떤 사람은 붙들고 이럽니다. “야 예수 믿으면 얼마나 지루한지 몰라. 재미는 끝났어.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니야” 이렇게 속삭입니다. 신앙인이 되겠다고요? 이제부터는 세상 재미 다 봤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한편은 맞는 이야기일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을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재미가 없다는 것,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니까요.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이 세상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뻔질나게 이혼 소송한다고 법정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의 표정 보세요. 거기에 행복이 있는지. 술 마시는 것으로 안돼서 이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마약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왜? 참된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정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예루살렘 사람들이 믿고 변화된 진리 외에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 진리에 감동했습니다. 해방을 느꼈고 기뻐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성령께서는 세상이 그렇게도 원하는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당해도 죽음의 문턱에서도 기쁨이 넘쳤습니다. 죄와 수치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싸움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예수 믿는 길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행복을 찾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자식 공부나 대학입학이나 사업 성공이 아니라 여러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 길 외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떠나서 다른 삶의 영역으로 옮겨져 가야합니다. 거기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여러분은 행복해 질수가 있습니다. 여기 파묻혀 있으면서 여러분의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금 여러분의 삶에 참 보람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분 같으면 이제는 결단하시고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하는 기독교의 진리에 한 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영역에 나와서 세상을 바라볼 때 그 너머를 꿰뚫어 볼 때에 다가올 영광이 비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6).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여러 가지 근심할 만한 사항이 있지만 그것은 순간이고 정말 놀라운 것은 우리는 크게 기뻐하는 영역으로 삶이 옮겨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원한 심판에서부터 벗어났습니다. 더 이상 지옥을 향하지 않습니다. 지옥 고통에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 져야만이 예수 믿게 된 것으로 인해서 여러분이 영원히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한다고 그래도 늘 일희일비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일이 잘 되면 좋아하고 아니면 또 이마에 내 천 자 그리고 있고 왔다갔다가 왜 그럽니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믿게 되면 어떤 일이라도 별거 아니예요. 대수로운 것이 아니예요. 지금은 이 문제 때문에 고통하고 있지마는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니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진노에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여러분에게 더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에서 더 나은 어떤 것을 보장해 줄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그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것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연연해 질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서부터 빼앗아 갈 수 있는 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 된 이 영원한 신분은 세상이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일 수는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일에는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감동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삶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하고 그치겠습니다. 설교를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저는 여러분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있는지를 묻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교인인지를 묻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신자였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아세례를 받았는지, 어른이 되어서 세례를 받았는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는 것은 여러분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신앙인들과 같은지를 묻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들만 아니라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진노에서부터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어쨌든 끝나는 시한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게 60, 80 평생을 살던지 좀 일찍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던지 끝은 오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앞서서 보낼 때에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소망이 없는 자처럼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셨고 여러분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믿음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무죄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십시오. 혹 잘 될 수도 있고요 혹 어려운 처지에 빠질 수도 있지마는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그래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무업니까? 좀더 많은 재물을 축적했다고 해서 여러분이 달라진 것이 뭐예요? 아니 어려워서 계속해서 실패를 겪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달라지는게 무엇입니까? 달라지는 것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의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내세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입니다. 마지막 영광스러운 환영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전의 드라마를 사람들은 즐기지요? 인생 마지막 역전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즐거워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처럼 신나는 일이 없다고 그들은 알고 살았습니다. 별거 아닌 것에 여러분의 마음을 내어주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은 잠시잠깐 후면 지나갈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믿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고 계속해서 세상에 남아 있으려고 합니까?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여기가 영원한 곳이 아니라 장차 오고 있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그 영원한 도성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 입니다. 여기는 영원한 도성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오고 있는 그 영원한 도성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로 새로워진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 진리가 삶의 중심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한가지 사실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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