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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의 우상숭배 /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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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의 우상숭배 / 계 2:18-29   
작성일: 2003/06/28 14:27:22
작성자: 이종원 목사 ()
 

제목 : 이 시대의 우상숭배"
본문 : 요한계시록 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두아디라 교회는 두아디라시대의 상징으로 두아디라교회는 시기적으로 로마 교황이 행사하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배교시대 또는 영적 암흑시대라고도 부르는데, 상징적으로는 두아디라 교회(계 2:18)입니다. 교황권이 권세를 잡은 538년부터 말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작한 1517년까지입니다.

중세기를 "교황시대"라고 부르는데, 주님은 "그 눈이 불꽃 같"은 분으로 묘사하시므로 이 시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보고 계심을 말씀하시고 그리고 이 시대에 일어났던 종교 개혁은 ‘나중 행위’로 주님의 칭찬을 듣게  되었으며, 중세 암흑시대를 진리의 빛으로 밝힌 종교 개혁자들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칭찬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참된 신앙의 몸부림과 그리스도인들의 수고와 인내, 그리고 시대적 부정과 부패는 극에 달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일어나게 되었고, 그리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수도승들의 종교적 권한은 성경에 보증된 것이 아니며 화체설은 성경과 이성에 모순되며 신부에게 하는 고해성사를 반대했습니다. 연옥을 부정하고 순례를 반대했으며, 성자 예배나 유물 숭배가 성경적이 아니라고 반박했으며,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무사하였으며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일으키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암흑시대 동안 악전고투하던 두아디라 시대 교회를 향하여 동정과 깊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알고 계신다고 칭찬하시면서 "네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많다"고 격려하셨습니다.

중세기의 권세를 획득한 교황권을 "이세벨"로 상징하였습니다. 교황권의 배도를 묘사하기에 적절한 상징입니다. 교황권의 권세는 중세기에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세속화된 교회는 세속의 권세와 동맹을 맺어 교권과 정권을 함께 장악함으로서 중세 암흑시대를 완전히 지배했습니다.

이교화된 로마교회와 속권 사이의 역사적인 사건은 교황이 봉건제도 하에서 정치 경제의 핵심인 서임권 쟁탈을 놓고 각축하다가 1076년 황제를 이기고 중세기 서구 세계의 최고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교황권의 승리는 인노센트 3세에 의해 십자군 대원정(1095-1207)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극에 달하였는데, 유럽의 모든 왕들과 제후들은 교황의 발아래 앉은 봉신에 불과했습니다. 이와 같은 점진적인 발전은 중세기 교황권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중세기 교황권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황제, 성상들, 유물들 숭배와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대신한 세속적인 사제들과 미사 제도의 미신화로 이교적인 우상숭배로 흘렀습니다. 이교 신앙에서 유래한 사상과 행습들을 받아들임으로서 영적 부도덕을 초래하였으며, 신실한 주의 백성들은 종교 재판소의 희생자들이었지만 부패와 타락과 우상숭배로 어두웠던 시대에도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한 자들은 주와 함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릴 것입니다.

두아디라는 우상에게 제사 드리는 일에 약해지지 않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이 중지되지 않고 계속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소 교회에 니골라당의 우상숭배가 있었듯이 두아디라 교회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의 교훈에 따라 우상 숭배가 성행되고 있었습니다.

두아디라는 당시 인구가 약 2만5천 명가량 되는 자은 도시로서 땅이 비옥하므로 축산업이 성하였습니다.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시를 보호하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이곳을 요새화 하였으므로 이곳은 군사 도시로서의 성격을 많이 띠고 있습니다. 두아디라시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당시 모직업, 자주업, 가죽업, 제조업, 노예매매업, 질그릇업, 구리업 등의 산업이 번성했던 것 같다. 이 곳에는 버가모시처럼 여러 이방 우상 신당이나 로마 황제 숭배 신당 등은 없었으며 다만 이곳 시의 보호신으로 여겨지는 태림나스신의 신당만이 있었는데, 태림나스신은 용사를 상징하는 신으로 좌우에 날선 도끼로 무장한 전사를 조각하여 숭배하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특히 유명한 것으로 소위 계 조합이 있었습니다.

공장에 취직하려면 구직자는 먼저 계원이 되어야 했으며 사업을 하려고 해도 계 조합원이 되어야 은행 거래를 할 수 가 있었습니다. 누구든 두아디라시에서 시민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계 조합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각 계 조합은 필히 테림나스 신당의 성원조직으로 계돈의 일부를 신당에 바쳐야 했으며 또 곗날이 되면 계원들은 테림나스 구내에 모여 신에게 헌금을 드리고 제주를 하고는 음주하며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고 승녀들과 음행하면서 계 사무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내려진 이세벨을 용납하고 행음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었다는 책망의 내용입니다. 그로 인해서 두아디라 교회는 결국 계 조합으로 인해 점점 신자가 줄어들더니 2세기 말엽에 2세기 말엽에 가서는 아예 없어졌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회구조상 돼지머리 앞에 절을 하지 않으면 곤란한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술을 먹지 않으면, 함께 음란한 사회 속에 거짓과 당을 짓거나 남을 죽여야 살아가며 남을 속인만큼 이득을 보는 시대가 오늘 이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쉽지마는 않습니다. 사회구조가 어렵다보니 자선사업도 사실상 많아지기도 하며 해야할 일이 많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여러 사회사업에 동참하며 선교사업도 그렇고 하는 일들은 많아집니다. 때로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의를 행하려는 몸부림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우리의 만족이 될 수도 있으며 대외적인 사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의 최선이라고 생각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두아디라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는 일은 점점 더 많아지지만 그 가운데 그들과 사회와 같이 가야만 할 때가 많다보니 은연중에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물질 앞에서의 종노릇하며 권세와 세상 앞에 종노릇하는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도 돈이 점점 신격화되어져만 갑니다.

하나님과 돈과의 사이에 저울질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우선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맹종하며 돈이라면 우리의 영혼도 서슴없이 우리의 몸도 서슴없이 버리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장자의 분깃을 팟죽 한그릇에 팔아먹은 에서처럼 오늘 우리의 삶 속에는 어느덧 우상 앞에 맹종하는 인생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며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는 우리는 바로 두아디라 시대와 두아디라 교회에 사는 인생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잠시 거하는 인생인지 속하는 인생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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