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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허망의 극치 - 전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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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전 6:1-9
제목 : 허망의 극치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 하느니라.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지난 1년 동안에 세계적으로 백만장자가 20명이 늘었답니다. 한국에는 백만장자가 무척 많을 것 같습니다. 백만 원 이상 가진 사람들 말이지요. 그게 아니고 백만 달라 이상을 가진 사람이 지금 전 세계에 730만 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소식은 북미와 남미에서는 백만장자가 줄어들었고, 아시아와 태평양 주변지역에서는 늘었다는 것입니다. 그 늘어난 사람들이 전부 한국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인생을 즐겁게 살지 못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 왕이 하시는 말씀의 초점은 일종의 경고입니다. 전도서 1장부터 6장까지 계속 “인생은 허무하다, 헛되고 헛된 것이다, 영원한 것이 아니다, 금방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해 아래 사는 인생은 상당한 수고와 고통과 눈물과 아픔이 있으므로 작은 것들에서 만족을 찾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전반부를 경고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수고의 열매를 누리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억울한 일이지요. 그런 사람은 사산한 아기의 인생보다 더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재산을 받아서 아무 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재산을 열심히 모았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이 누리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장 1절에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즉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다 받았지만 누리지 못하고 죽어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이런 것들은 헛되고 악한 병이라고 말합니다. 누리지 못하고 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돈을 모으느라고, 명예를 추구하느라고, 자식을 키우느라고 죽도록 노력을 했는데 갑자기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 그 사람의 생이 끝납니다. 그 불행한 일은 질병이나 사고일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꼭 행복해질 것이다’ 라며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중간에 끊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제가 아는 젊은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 부모가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의 첫 번째 방학 때 스포츠카를 하나 사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새 차를 타고 기분을 내며 순환도로를 질주하다가 사고가 나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좋은 스포츠카를 누리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래서 좋은 학교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좋은 차를 아버지로부터 받았어요. 그러나 전혀 누리지 못하고 갑자기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 마음 아픈 경우는 열심히 일을 해서 이제는 좀 살 만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질병이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입니다.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어서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아무 것도 누리지 못하고 인생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젠가는 나도 행복하게 살 때가 올 것이다’라고 생각해도 그 날이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허망합니다. 이것은 인생을 제대로 사는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가질 것을 모두 가진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2절). 다 받았는데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는 겁니다. 또 자녀를 100명이나 두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마음에 낙이 없다는 것입니다. 1천 년의 갑절 즉, 2천년을 사는 장수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고, 아무리 자식이 번성하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인생을 어떻게 사는 건지 모르면 이 사람은 이 사람은 낙태한 생명보다도 더 헛되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낙태한 생명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허망의 극치라고 하지요. 뱃속에서 잘 크다가 태어날 때 사산이 되어서 햇빛도 한 번 보지 못하고 바로 무덤 속에 들어간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그런데 인생을 제대로 살 줄 모르는 사람은 그것보다 더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낙태된 아기는 그래도 고생이나 안 했지요. 죽도록 고생하고 노력은 해놓고 그것을 누리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하고, 기뻐하지도 못하고 살다가 죽었으면 그것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고생만 하고 인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면 사산된 아기보다도 더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구두쇠라서 누리지를 못합니다. 모을 줄만 알고 쓸 줄을 모르는 것이지요. 돈은 쓰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써야 또 주시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물질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누리면 또 주시는데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아니하고 아직도 받지 못한 것을 가지고 속상해 하고 기분나빠하고 욕심만 계속 늘어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그런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모아놓은 것들이 많으셨답니다. 그 딸들이 와서 어머니의 좋은 것들을 보니까 가지고 싶어서 좀 달라고 했겠지요. 그런데 그 할머니는 “안돼!” 하면서 계속 그것들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결국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딸들은 죽은 자의 물건이라고 좋아보이던 그 물건들을 전부 싸서 갖다 버렸습니다. 허무한 것이지요. 죽은 다음에 장학기금을 만들면 뭐합니까? 죽은 다음에 알 수 있나요? 살아 있을 때 장학금을 주어서 함께 기뻐하고 누려야지요. 모으는 재미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는 이것을 보고 5장 13절과 16절에서 “큰 폐단”이라고 하였습니다. “폐단”이라는 것은 ‘속을 상하게 하는 불행’ 또는 ‘악성 질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누리라고 주셨는데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인생을 마친다는 것은 억울하다는 겁니다.

  인생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그 때 그 때 누리지 않으면 인생은 하나의 슬픈 역사로 끝나버립니다. 제가 인생이 얼마나 힘드는지 알아보려고 신문을 찾아보았더니 하루의 신문에서 대강 보았는데도 36가지가 나오더군요. 처음 눈에 띤 것이 결혼하고 싶은데 안 되는 것입니다. 결혼 못한 것에 대해서 매일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주실 때까지 혼자서도 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결혼해서도 낙을 누리는 것이지요. 또 아기를 갖고 싶은데 없어서 서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서럽겠지만 어차피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주실 때까지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즐기고 기쁘게 살아야지요. 슬퍼한다고 아기가 생깁니까? 아기가 없다고 매일같이 슬퍼하면 그건 제대로 살 줄 모르는 것이에요. 오늘 주신 인생을 오늘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주실 것이 아니겠어요? 클린턴 전미국 대통령의 아내가 “남편의 외도-힐러리”라는 책을 써냈습니다. 아무리 대통령의 아내이지만 집에서 비서와 외도하는 남편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입니다.

  셋째로, 마음이 어두워서 인생을 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어두워요. 비판적이고 지나치게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까 이 세상도 온통 어두움뿐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죠지 버나드쇼라는 작가가 있지요.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관론자란 다른 사람들이 자기만큼 악하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미워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볼 때마다 그들이 나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만 보면 속이 상하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싫으면 참 힘든 저주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 싫어하는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지 있거든요. 사람들을 피하고 살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사람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면 참 축복입니다. 한 사람은 분노와 슬픔과 속상함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떤 사람은 감사와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 결국 마음상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너츠에 왜 구멍을 뚫었냐고 불평합니다. 거기도 채워서 줄 것이지 왜 구멍을 내었냐는 것이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곳을 정탐하고 와서는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아서 이제 꼼짝없이 다 죽었다”라고 보고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보고합니다.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늘 밝고 맑아서 하루하루의 인생에 참 행복들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먹을 것 있고 입을 것 있고 드러누울 장소가 있으면 만족하라!” 작은 것들을 누리면서 지혜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7절에 보면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 하느니라”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인데 아무리 먹어도 식욕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마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주신 것, 이 자리에서 주신 것,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날마다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에요. 9절에도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라고 하였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있는 것이지요. 즉 마음속으로 벼라 별 공상을 다하고 마음으로 욕심이 가득 차서 불만스럽게 사는 인생보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그것부터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면서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이에요.

  여러분과 제가 인생을 매일같이 즐겁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 주신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오늘 주신 은총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사도 바울은 먹을 것 있고 마실 것 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만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이 만족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날마다 누리며 평생을 행복하게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내 모든 욕심과 소원이 이루어질 때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주신 은혜를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을 감사하고 찬양하고 송축하며 매일 매일 여러분에게 삶을 누리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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