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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찾는 사람들♣ - 마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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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찾는 사람들♣
마 4:18-22

할렐루야!!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어제 저는 아내와 함께 새소망교회 이상수 전도사님의 목사 안수식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목사 안수식은 세상의 그 어떤 예식보다도 아름답고 소중한 예식입니다. 특별히 목사 안수식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목사로서 첫 출발을 시작하는 사역자에게 당부하는 권면의 말씀 때문입니다. ........ 2003년 올해로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지 벌써 15년이 되는 해입니다. 15년이라는 세월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지만 ..... 어느새 목회자 초심의 그 순수한 열정과 뜨거움은 다 사라지고 기교와 테크닉만 살아있는 허수아비 같은 목회자가 된것에 대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어제도 권면의 말씀 속에 「목회자는 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한다. ②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③ 성령충만한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제직/교사 헌신예배'와 아울러 '총동원 주일'을 한 주 앞에 놓고 "예수님이 찾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보시고 다가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는 말씀하시며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4가지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찾으실 때에, 지혜와 총명이 넘치고 똑똑하고 교양 있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 가득한 헤롯 궁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또 종교적으로 깨끗하고 윤리적인 생활을 하는 제법 품위를 갖춘 사람이 가득한 예루살렘 성으로도 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소외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 근근히 벌어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밤새껏 그물을 던졌지만 때로는 빈배로 돌아와야만 하는 허탈감과 좌절감속에 살아가는 갈릴리 사람들을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속에서 그 어떤 가능성을 보셨을까요?
물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얼마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 많으며,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 많고, 가문이 좋은 사람, 재물이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세상 적으로 내세우거나 자랑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좀더 본문에 대한 친밀감을 가지고 묵상해보면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속에 남다른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돈에 눈먼 어떤 사람들처럼 생선 입에다 납을 집어넣거나 저울의 눈금을 속이거나 그런 것이 없이 본래 태생이 고기 잡는 어부처럼 순수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예수님이 찾는 일꾼들도 바로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처럼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도 내면 속에 있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저 머리로만 듣고 가슴으로만 이해할 뿐 영적 감화 감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 깊은 산골 촌사람들과 어부들 그리고 아프리카 밀림의 사람들 속에서는 갖가지 이적과 은혜와 능력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늘찬양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침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말 하나님 앞에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쫓고 또 그런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또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소개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전도가 힘들고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 서로 모이기를 힘쓰며 떡을 떼며 말씀을 나누며 사랑을 나누는 나누며 기도와 전도에 힘쓰는 제직과 교사들 그리고 성도님들이 되어질 때 우리의 영적 충만함과 아울러 늘찬양교회가 부흥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둘째: 마음이 따뜻하고 진실한 사람들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날 때 이 두 형제는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눅5:3) 더욱이 이 두 사람이 밤새껏 열심히 그물을 던져 만선의 기쁨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빈배로 돌아와 심한 허탈감과 낙심과 피곤함 속에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때 당시의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무척이나 히스테리 적이고 신경질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하여 침묵함 속에 열심히 그물만을 씻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과중한 업무로 인한 삶의 피곤과 절망감과 좌절감을 가지고 언제 어떻게 스트레스가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속에 침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빈배로 돌아와 심한 허탈감과 낙심과 피곤함 속에 그물을 씻고 있는 두 형제에게 다가가 배를 조금 띄워주기를 요청했습니다. ..... 참으로 위험천만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사람들 진정으로 그 영혼을 사랑하고 돌아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럴 때일수록 담대함을 가지고 달려들어 상처 입을 영혼들을 위로하며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

어떻든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요청에 대하여 토를 달며 안 된다고 부정하거나 화를 내거나 욕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하신 대로 배를 선착장에서 조금 띄워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얼마나 마음이 따뜻하고 착하고 삶에 진실한가?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밤이 맞도록 일을 할 만큼 아주 성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듯 매사에 성실하게 많은 사람들을 감싸안으며, 따뜻하게 사람들이 많을 때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예: 대동장로교회 전종서목사)

어떤 사람은 직장을 구하다가 안되거나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면 주의 종이나 한 번 해 보겠다는 식으로 나선다든지 공부를 못해서 대학에 떨어진 사람에게 신학이나 하고 목사나 되라고 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되지 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큰 일을 맡기시겠느냐고 말씀하시는데 세상의 일에도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모든 일에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매사에 눈가림 식으로 적당히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에서, 일터에서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도 인정을 받고 쓰임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셋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용기를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열심히 고기잡이를 하던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9절)고 하시니까 그들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들이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그들의 직업을 버렸다는 것이고 야고보와 요한은 부친까지도 뒤로하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사람에게 직업과 부친을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직업은 온 식구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이고 부친은 혈육의 핵심인데 버린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유교사상이 철저한 나라에서 부모님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에서도 부모공경은 십계명의 핵심사상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모님까지 버릴 수가 있습니까?

제가 목사안수를 받는 날 그 순간까지도 부모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학교 시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거기다 개척 할 때도 서울 상계동에서 조그만 전셋집 방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으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어제 드려진 목사 안수식은 너무나 행복하고 풍요로운 예식이었습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의 경제적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직업을 잃은 이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직업과 부모님을 버리기까지 했으니 정말 이것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주께 헌신하여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 그 무엇에 미련을 두거나 예수님보다 그 무엇을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좇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와 그물을 버려 두지 않고 예수님을 좇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편견과 주장과 의지와 방법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주정헌금이 고작입니다. 지금 같이 어려운 경제상황에 십일조는 큰 부담입니다. 커다란 믿음과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정확히 하나님께 드릴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가 큰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3년 만에 맞는 -재정입니다. 여러분의 물질적 헌신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물질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정으로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줄 아는 용기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린다면 우리는 물질적 위기를 능히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하여 교회가 큰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책임을 면키가 어려울 것입니다.

어제 송탄중앙침례교회 배국순 목사님께서 성도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하시는데 " 교회 개척은 목사가 하지만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키는 것은 성도가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한 여러분의 뜨거운 헌신과 용기가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넷째: 사람을 낚는 어부를 찾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왜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하셨을까요?
우선, 지금 부름 받는 사람들이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적절한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을 물고기들로 비유하심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다의 고기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냥 조류를 따라 움직이고 먹이를 따라 움직입니다. 본능적입니다. 그런 물고기처럼 사는 사람들,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본능적으로 먹고 싶으면 그냥 아무 것이나 먹고사는 사람들, 때 지어 다니며 남들이 하면 같이 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건져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이하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중요한 주제는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에 속한 무리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제자도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의 흐름을 거부하고 천국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들은 소수입니다. 물고기처럼 때를 지어 세상을 좇는 사람들을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으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씀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건져내야 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 늦어 바다에 빠져 죽기 전에 건져내야 합니다. 나의 욕심만 채우는 삶이 아닌 주님의 그 요구에 응답하여 사람에게 관심 갖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주님께서 찾으시는 바로 "그 사람"이 됩시다.

베드로는 오순절 이후 주님께서 그를 들어 쓰심으로 설교할 때, 하루에 삼천명을 예수님께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했지,
'사람을 잡는 어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고기를 잡되 큰 물고기를 잡되, 큰 그물로 한꺼번에 많은 고기를 잡을 때도 있지만, 낚시를 가지고 한 마리, 한 마리 낚듯이 한 심령, 한 심령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는 후자의 방법이 우리에게 요구되며, 이 방법이 전도에 있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이 방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한 사실이 여러 번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도 그랬으며, 니고데모와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낚시는 고기와의 끈질긴 인내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자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까지 우리는 끈질기게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시고, 예수님을 자신 있게 시인하며, 증거 할 수 있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이러한 능력은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이제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나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심을 믿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자질을 갖추는 성도 여러분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않겠습니까? 깨달으세요.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계신지 깨달아야만 합니다. 때로 이 일을 감당하다 보면, 스데반처럼 핍박을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바울처럼 순교자의 길을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영혼구원을 위해 힘쓰는 성도를 향해 하나님께서 환한 미소로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복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으세요. 지금도 죽어 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애통해 하시고 계신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은 확산되어야만 합니다. 내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향해 흘러 넘쳐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한 사람의 불신자라도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주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교인의 수평이동이 아닙니다. 죽은 한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열정을 쏟으셨습니다. 그럼으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열정을 쏟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얻어진 부흥의 경험을 세상을 향해 쏟아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세요. 죽어야 할 죄인까지도 죽지 않기를 바라시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늘찬양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며, 또한 믿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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