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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용사들 / 대상 1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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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대상11:9-25절
제 목 : 왕의 용사들

새 대통령이 선출되고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통령의 고충이 있습니다. 대통령을 보좌할 인물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개혁성향을 가진 젊은 인재들을 많이 기용을 했는데
며칠 전에도 비서관 행정관 3명이
새 만금 사업 시찰 때 가족들과 함께 소방헬기를 이용해 물의를 일으켜 전격 사표처리 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개혁해야할 사람이 개혁 대상이 되었으니 대통령이 얼마나 실망이 크게 습니까?
나라든 기업이든 교회든 강성해지는 이면에는 꼭 인물이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다윗 왕국이 강성함의 배경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발견함으로
우리가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지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가 10절 말씀부터 읽지 않고 9절 말씀부터 읽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9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말씀은
물론 다윗의 강성의 원인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4절 말씀을 보면
다윗의 용사들이 불레셋 사람을 죽였는데
[ 여호와께서 큰 구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 고 합니다.
즉 여호와의 큰 구원이 다윗의 용사들을 통해 나타남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의 왕국이 강성한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용사들을 통해 역사하심을 말합니다.
그러니 10절 이하에 나오는 다윗의 용사들의 이야기는
다윗 왕국의 강성함에 배경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오늘날도 사람을 통해 역사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다윗의 왕의 용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남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다윗의 힘을 도와 나라를 얻게 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가리켜 10절, 11절에 <다윗에게 있는 용사> 라고 합니다.
다윗의 용사, 즉 왕의 용사들입니다.
용사란 < 게보림 > 이란 말로서 자이안트, 거인들이란 말인데
키가 거인이란 말 보다 싸움에 거장들이란 말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교회를 보실 때 <2>
그 교회 교인이 얼마나 되는가를 보시지 않고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 즉 주의 용사들이 몇 명이 있느냐를 보십니다.
이것은 마치 기드온에게 32000명의 사람들이 모였지마는
하나님은 그 중에 용사 300명만 해도 족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드온의 300용사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오늘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몇 명이나 되는가를 말합니다.

이 용사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부자와 용사는 다릅니다. 학자와 용사는 다릅니다. 용사는 싸움꾼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용사들이 누구입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이 용사인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용사들 본래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왕의 용사들 이라 해서 본래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르다면 저들은 다윗을 도와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한 몫을 담당한
비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함께 하시니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삼상22:에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 굴에 숨어 있을 때
사람들이 아둘람 굴로 몰려드는데
먼저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모였고
그리고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들이 모여들었는데 약 400명 가량이 되었읍니다.
다윗의 친인척 바로 사울의 미움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모였나가 아니라 왜 모였으며?
모여서 무엇을 하였냐?는 것입니다.
왜 다윗을 중심해 아둘람 굴에 모였습니까?
시578:1절「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구께 피하여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물론 저들은 사울의 학정 때문에 피한 것- 그러나 주의 날개 아래 피함.
그러니 저들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자들입니다.
시33:12절「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모여서 <3>
신세타령이나 하고 불평만 했더라며 못난 조상되었을 것입니다.
반역자나 산적 떼 아니면 불한당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당시 상황으로서는 별 볼일 없는 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짝 달라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친근히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할 자가 없는 용사로 세워 주시는 줄 믿습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모여서 무엇을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아둘람 굴 사람들 비록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지마는
저들은 시57:7절 이하에 보면 뜻을 정했던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새나 라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비전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실 이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입니다.
10:14절 그리고 11: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새나라를 새우기로 계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할 때 은혜 받아 하나님 주신 비전을 품은 사람들
하나님은 왕의 용사같이 들어 쓰십니다.
잠29:18절「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합니다.
영어성경 K.J.V에는 「비전이 없으면 사람들이 망할 짓만 한다」
다른 성경에는 「비전이 없으면 사람들이 거칠어진다」
그렇습니다.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 주시는 비전을 품지 않았더라면 불평하다가 거친 불한당 밖에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만나 하나님 주신 비전을 품으면
하나님은 용사같이 들어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께 피한 자들이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구를 변화시키겠다는 비전을 품은 자들 되시기 바랍니다.
삿6:에 보면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실 때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 큰 포도주 틀 안에서 밀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하면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출해내라」고 합니다.
기드온은 깜짝 놀랐습니다. 나보고 큰 용사라니?
그래서 기드온이 하는 말이「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디안을 내 손에 붙여 주겠다」합니다. <4>
이와 같이 하나님은 비록 극히 약하고 적은 자라도
그 손에 붙들리면 용사같이 들어 쓰십니다.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체구가 몹시 작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마을의 어른들은 자기 자녀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벤 후퍼와 함께 노는 것을 원치 않았고, 친구들도 그를 놀리며 멸시하였다.
벤 후퍼가 12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벤 후퍼는 그때까지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젊은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교회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 시간에 좀 늦게 예배당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오곤 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
벤 후퍼는 목사님의 설교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고.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벤 후퍼를 보고,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하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벤 후퍼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당황하여 빠져나가는 벤 후퍼의 등을 향해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 벤 후퍼는 두 주먹을 불끈 지었다고 합니다.
[ 그래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자 ~! ]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주지사 벤 후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다시 태어난 날입니다 ]

중요한 것은 비젼을 품은 사람, 비젼 메이커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000명이 모이고 10,000명이 모여도 비젼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들어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10명이 모여도 비전을 품고 뜻을 정한 사람들
한 사람이 천을 당하고 두 사람이 만을 당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혀
용사같이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15-19절까지의 <5>
세 용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다윗 휘하에는
다윗을 위해 새나라 건설을 위해 충성된 용사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특히 15-19절까지 보면 두 번째 세 용사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첫 번 째 세 용사보다 두 번째 세 용사들의 이야기가 상세히 기록한 것은 저자의 의도가 첫 번째는 말할 것도 없고
두 번째 세 용사의 충성심이 이 정도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베들레헴을 두고 불레셋과 전쟁할 때였습니다.
다윗은 본래 베들레헴 들판의 목동 출신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양을 칠 때에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우물물이 생각나서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하는데
곁에 있던 세 용사가 불레셋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니 너무 감격하여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고 여호와 앞에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하고 그 우물물을 마시지 아니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의 휘하에는 다윗에게 충성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세 용사 같은 장수들이 부지기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도 다윗에게 충성한 세 용사같이
주님께 생명이라도 바칠 수 있는 충성된 일군이 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충성된 자를 찾고 계십니다.
시101:6절「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실 때도 나는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중심이 불타올라 주를 위해 나아가, 하나님의 비젼을 실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하나님은 꼭 왕의 용사같이 들어 쓰십니다.

비록 세 용사에는 들지 못하지마는
삼하15:13절 이하에 보면 가드 사람 잇대 장군이 나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궁궐을 떠나 피난 갈때에
잇대 장군이 자기 부하 600명을 데리고 다윗을 따라옵니다.
그때 다윗이 당신은 나그네니 당신 부하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삼하15:19절「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몸을 바쳐서라도 왕을 따르겠다 는 것입니다.
다윗 휘하에는 잇대 장군보다 급수가 높은 용사들이 <6> 부지기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교회의 부흥과 바울 전도의 승리의 배후에도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왕의 용사 같은 복음을 위한 일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롬16:3절에 나오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로마교회에 소개하면서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숨이라도 내어놓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빌2:30절에 에바브로 디도를 가리켜
[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다 ]고 합니다.
이와 같이 헌신된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나타납니다

제2의 성경이라고 하는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신앙의 박해로 인해 <베드포드> 감옥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존 번연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신앙의 절개를 굽히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싶은 충동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연은 이를 악물고 되새긴 말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했으니 내 눈썹에 이끼가 끼더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기보다는 이 감옥에서 죽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결과 성경 다음으로 권위 있는 불후의 명작 천로역정을 남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약속과 비전에 헌신된 사람 꼭 용사같이 들어 쓰십니다
우리 가운데 왕의 용사같이, 복음의 일군같이
주인을 위해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칠 각오한 자들이 많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충성하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 쓰십니다.

20-21절에 보면 세 용사 중 두목인 아비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압의 아우 아비새가 그 삼인의 두목인데
창을 들어 삼백 인을 죽였더라 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 휘하에 300명 정도야 대단한 것 아닙니다.
그런데 아비새를 소개하면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21절입니다.
[ 저는 둘째 삼인 중에 가장 존귀하여 저희의 두목이 되었으나
그러나 첫째 삼 인에게는 미치지 못하니라 ]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윗 휘하에는 아비새 같은 용사는 2 급수라는 말입니다.
다윗 휘하에는 이러한 용사들이 부지기수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 옥 목사님 - 그런 순장들 때문에 사랑의 교회가 있네.
이것은 초대교회가 왕성했던 이유 <7>
즉 사도 바울이 복음 전도자로서 승리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같은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열 두 제자뿐만이 아니라
스데반, 빌립 집사라든지
그리고 바울 주변에도 보면
끝까지 함께한 의사 누가라든지,
감옥까지 따라와 헌신한 에바브로 디도라든지
동고 동락 하던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라든지,
선교 동역자 바나바, 실라, 그리고 아들 같은 디모데 등
복음을 위해 헌신된 동역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동역이 없었더라면
바울의 전도에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같은 면에서 보면 삼하11:의 다윗의 용사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도
전투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전투적 교회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된 일군 즉 왕의 용사들이 얼마나 있느냐?가 교회의 부흥의 승패를 가리며 개인적으로도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22절-25절 까지는 두 번째 세 용사 중 둘째 브나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 용사 가운데 22절에 나오는 브나야는
「눈 올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한 사자를 죽였다」 고 합니다.
팔레스틴 북부 지방에 혹 겨울에 눈이 오면
사자가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동네로 내려왔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함정을 파놓았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그 함정에 걸려 들었을때
창이나 갈고리 같은 것으로 사자를 죽였으나
그러나 브나야는 맨 몸으로 그냥 내려가 사자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용감하고 담대했다는 것입니다.
이 용감함, 담대함, 어디서 나옵니까?
불레셋도 두렵지 않고 사자도 두렵지 않는 이 용감함 어디서 나옵니까? 누가 용감하고 담대합니까?
바로 생명 내놓은 사람입니다. 죽을 각오할 사람입니다.
다윗 휘하에는 이렇게 생명을 걸고 충성하는 용사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알렉산드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를 물려받은 <안티고노스 1세>의 휘하에 병에 시달리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한 병사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참전했습니다. <8>
그리고 적진 깊이 들어가서 종횡무진하며 용맹을 떨쳤습니다.
그 전쟁은 마침내 그의 공로로 대승했습니다.
안티고노스가 유심히 그 부하를 눈여겨보고 그의 병을 고쳐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이 완치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전쟁이 일어나서 그 병사도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용맹스러움이 전과 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물었습니다. “병이 있을 때는 그렇게 용감하더니
병을 고쳤는데도 왜 그 용맹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그러자 그 병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는 기왕 죽을 몸이니까 목숨 생각하지 않고 싸웠지만
병을 고치고 나니까 목숨에 대한 애착이 생겨서 몸을 사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입니다.
예수님도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죽을 각오하고 나면 얼마든지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나는 오늘 하나님의 왕국, 즉 교회에서
어떻게 해야 왕의 용사같이 왕 되신 주님께 충성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세 용사가 길어온 물을
다윗이 하나님께 부어드린 일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린 일은
<호크마> 주석에 전제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전제는 구약에 번제와 소제와 함께 드리는 제사의 일종으로
잔에 담은 포도주를 번제물 위에 붓는 제사입니다.
딤후4:6절에 보면 바울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말로서
「관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라고 했는데
바로 전제를 의미합니다. 순교의 제물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제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여호와께 헌신을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세 용사가 길어온 물이 여호와 앞에 전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세 용사의 충성이
다윗에게 대한 충성을 넘어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전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헌신이요 충성된 마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때 물 한 바가지는
억 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앞에 억만큼을 주워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충성된 마음을 주께 드릴 수 있는 전제물이 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스탠리>란 의사가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갔습니다. <9>중국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무서운 병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의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병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의학 서적도 없었고 변변한 연구실도 없었으나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조사하여 그들의 이 병을 일으키는 병균을 담아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는 뉴욕에 도착하기 직전에
자기 몸에 병균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홉킨스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실험 재료로 의사와 의과대학 교수들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 젊은 의사는 병에 걸려 아픔과 고열에 시달리고 의식을
잃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 결과 미국의 의사들은 이 병을 치료하는 주사약을 개발해 냈고
이 의사도 하나님의 은혜와 주사약 덕분으로 그 병에서부터 살아났습니다.
건강을 찾기가 무섭게 이 젊은 의사는 주사약을 가지고 중국으로
되돌아가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고 합니다.
비록 한 대의 주사 약값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마는
그러나 스탠리에게는 세 용사의 물 한 그릇 같이
하나님 앞에 전제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억만 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충성된 마음을
우리의 왕 되신 주님께 전제로 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보면 고대 올림픽에 레슬링 경기가 있는데
그 경기에서이긴 자에게는 전투할 때 왕의 옆에 서서
왕을 호위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스파르탄>이라고 하는 레슬링 선수가 있었습니다.
상대의 제의가 경기를 포기하면 매우 많은 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맹렬한 경기 끝에 그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때 친구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스파르탄이여, 너는 이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이 승리로 너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때 스파르탄은 “나는 다만 전쟁터에서 임금 앞에 서서 왕을 지키며 왕을 위해 싸우는 특권만을 얻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보상은 섬기는 일이며 필요하다면 임금을 위해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용사들에게는
왕을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요 명예인 것입니다.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의 용사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200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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