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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도 은혜입니다 / 요 2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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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21:3-12 
제목 : 실패도 은혜입니다.

  유명한 사람, 천재들,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사람이 많습니다. 링컨 같은 사람입니다. 나중에 묻기를 “당신은 어떻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라고 물을 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답니다. 토머스 에디슨은 구제불능의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중학교시절 수학성적이 낙제점이었습니다. 농구천재 마이클 조던은 고등학교 때 후보선수로 전전하다가 결국 팀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실패나 쓴맛을 맛본 이들이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실패가 은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의 삶 초년기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꿈을 꾸며 살았는데 중간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팔려 가는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에는 성공자가 되고 역사에 길이 남는 복된 사람이 됩니다.

본문을 보세요. 제자들이 제자로서의 삶에 실패하였습니다. 유다 같은 이는 예수를 팔면서 ‘내이니까’ 라고 위선적인 행동으로 자기 이익을 취하려다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한때 주를 위해 죽음이 온다 해도라는 장담을 하였지만 예수님을 선생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상처의 치유도 받고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실패는 은혜였습니다. 실패의 상처가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실패도 은혜입니다. 제자들을 보세요. 실패가 은혜가 되었습니다.


1. 자기 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제자들은 전과 같이 제자입니다.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와 있습니까? 바다에 와있습니다. 어장에 와있습니다. 그들 7명이 연합하여 그물을 던지고 있습니다. 같이하니까 무엇인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전문가입니다. 전문가들이 연합하여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는 진정한 성공은 없었습니다. 만선의 꿈을 갖고 실력을 총동원하였으나 빈 그물이었습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데 잘될 것 같았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실패한 후에야 제자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점점 사업이 잘됩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는 중에 사업이 어려워집니다. 이렇게 저렇게 신경을 쓰다가 자기 몸에 몹쓸 병이 걸렸습니다. 나을 희망이 없어진 상황에서 방법은 한 가지 기도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모르고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귀중한 직분을 주었음에도 직분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때부터 기적적으로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때야 자기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직분 이상으로 충성합니다. 주의 종들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마음에 기쁨이 솟아 넘칩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행복합니다. 이분의 실패는 은혜입니다.

발명가 ‘찰스 캐더링’은 말하길 “실패하였을 때에는 문제점을 분석하고, 그 이유를 찾아내라. 왜냐하면 실패는 성공의 광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발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리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이정표도 없이 길을 가다가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합니까? 제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실패하였을 때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생각해야 합니다. 왜 실패하였을까?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자만입니다. 우리는 어부로서 고기 잡는 전문가이다. 더구나 일곱 명이 연합으로 그물을 내리는데 왜 고기를 잡지 못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만입니다. 자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방심하게 만듭니다. 사람들 중에는 실제는 교만하면서 겉으로는 겸손한 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된 말로 연기를 잘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친구도 많고 삶을 살아가는데 편하게 삽니다. 배우 인생입니다. 이따금 TV나 영화를 보면 부부로 나오는데 진짜부부 같이 연기를 합니다. 같은 동갑 네기들이 연기를 하는데 한 사람은 며느리가 되고 한 사람은 시어머니가 됩니다. 그래도 실제상황하고 같이 연기를 합니다. 이런 이들이 성공한답니다. 예를 들면 반갑지 않은 분을 만나도 “아!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연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갑지 않다고 힁하고 돌아서 버리면 영원한 적이 됩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맛이 없어도 아! 맛있다. 나 이런 음식 처음 먹어보는 거야. 그렇지요. 요리 책을 보고 만들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처음 먹어보는 거지요. 이것이 뭐야. 이런 게 음식이라고 내놓은 거야. 그러면 그 집에 이상한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칭찬하면 음식 준비한 사람의 마음이 좋습니다. 재미없는 이야기도 잘 들어줍니다. 몇 번 들었어도 처음 듣는 것처럼 들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한 말을 또 하고 다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듣기 싫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 있게 들어줍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이상적인 부부로서 누가 보아도 멋있는 한 쌍인데 이혼한다고 난리입니다. 알고 보니 그들의 문제는 연기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부자는 돈 있는 것처럼 하지 않습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아는 채 하지 않습니다. 엄살을 부립니다. 이기는 것 같아도 지는 것 같이 연기력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연기력을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미워도 사랑하는 것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룟 유다의 처신입니다. 주님을 팔면서 내니이까 문제는 이런 연기를 잘 하다 보면 지나친 위선으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 앞에서는 진실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나는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제자로 끝났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신앙고백을 잘했다고 칭찬도 들었고 매사에 우선적이고 앞장섰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실패의 가책 속에서 옛날처음 부름 받았던 소명의 열정을 회복하지 못한 채 고기를 잡으러 바닷가로 간 것입니다. 겸손히 자기를 반성하고 분석하고 새롭게 재기하려는 마음은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대게 남을 탓합니다. 누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다. 당신이 문제라는 식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도 여리고 성은 쉽게 점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성에서는 대패합니다. 이것이 웬일입니까? 이유는 자만이었습니다. 소수의 군대를 보냅니다. 상대를 무시하였습니다.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옛말에 눈먼 놈이 앞장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나지도 못한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합니다. 아는 체 합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배우려고 합니다. 아는 체 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실패를 마지막이나 파멸로 보지 않고 은혜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어떻게 처리하고 치유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설계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의도한대로 안되면 그것만을 가지고 비판하기도 하고 남을 원망하다가 낙심합니다. 여러분들 나 자신이 의도하는 게 무엇입니까? 육신적인 거라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머리만 숙이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돌아보아 부족한 분야를 보충합니다.

실패한 제자들을 보세요. 소득 없는데 그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한 번 던져보면 압니다. 안 되는 구나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아는 게 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전쟁은, 1)정보입니다. 운동경기를 해도 상대방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진행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2) 전략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 가? 전략이 정통하게 맞아야 합니다. 3) 그 다음에는 실전입니다. 알고 있고 전략만 세우는 게 아니라 실제 전투를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승리의 공식입니다.

계속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깊은데도 던지고 얕은 대로 다니면서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제자들이 그물을 던질 때마다 자기들의 계획대로 잡혔더라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패하였기에 주님을 만나고 같이 식사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의 자리에 돌아 왔습니다. 그러니 실패가 은혜가 되었습니다.


2.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밤이 지나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얻은 게 없습니다. 6절을 보세요.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어부의 기쁨은 만선입니다. 그렇게 피곤하고 힘들었어도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는 배에 깃발을 달고 돌아옵니다. 이것이 어부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빈 그물입니다.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빈 그물입니까? 항상 빈 그물인 사람도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언제인가는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가 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낙심은 금물입니다. 내가 한 일이 정당하고 아름다웠는데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였는데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하여도 낙심하지 맙시다. 언젠가는 거둘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금물이 있습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라. 이건 실패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귀한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6:9절에 “때가 되면 거두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할 것이 있습니다. 순종입니다. 말씀을 보면 처음에 그 말하는 분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미친 사람의 말도 세 마디는 들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하는 말 중에 듣기 싫은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던가요? 비판하는 말입니다. 그 말 중에도 들을 것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말이라도 들을 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까? 가정도 행복하려면 서로를 존중하고 의견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화의 내용이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이나 비판하는 말들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분노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계속되면 문제가 아닌데 심각한 문제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귀한 일은 순종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순종을 익혀 나가야 합니다. 생활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도 순종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학생은 부모님의 말씀에도 선생님에게도 순종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의 삶의 철학이 나는 나대로 산다는 생각입니다. 왜 우리는 권위주의 이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순종이 많은 것을 얻게 한다.  순종해서 손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편 23: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른다는 말입니다. 흔히 교회에서는 목자는 누구인가 할 때 목자는 목사입니다. 양은 신앙인들입니다. 오늘 성도님들이 다 양 같아서 순종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그때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패배의식 가운데서 그물을 던지는데 무슨 힘이 생겼습니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순종이고 하나님의 약속은 구원이다. 그리고 축복입니다. 실패한 중에 많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은혜 되었습니다.


3. 주님을 만나 새로운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 주님과 조반을 같이 하였습니다. 조반을 같이 하였다. 식사하였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사람은 먹을 때 정이 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명을 받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주님이 묻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패자체보다 죄책감 때문에 시달리게 됩니다. 바로 남들이 어떻게 볼까 하는 것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실패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서 네가 왜 나를 배신하였느냐 죽을지언정이라는 헛소리했지 기도하라니까 꼴 좋았다 라고 하시지 아니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습니다. 이는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상처받은 베드로의 마음을 싸매시는 것입니다. 상처를 어루만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상처에 치유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후회하지도 말고 죄책감으로 괴로와하지도 아니해야 합니다. 누구를 탓하지도 마십시오. 심리학자 ‘헨리 나웬’은 “후회란 쓰라린 기억이고 죄책감은 자신을 고소하는 기억이며 감사는 즐거운 기억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도 주님의 은혜가 있다 라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내 양을 먹이라”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묻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말할 때에는 공개적이었습니다. 이제 회복시켜주시고 사명을 주시는데도 공개적이어야 했습니다. 세 번 부인하였기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도 세 번하십니다. 그러면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보여주시는 교훈은 사역은 주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일이 되면 사명을 수행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사명적인 존재입니다. 무슨 일인가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할 일이 있다는 건 행복입니다. 퇴직하고 놀고 계신 분들이 노니까 좋다라는 생각이 드는 분은 적을 것입니다. 할 일이 있다는 게 좋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교회에 오시면 분주하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으니 감사하구요.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주어진 게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명은 행복입니다.
여기에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1) 내가 하는 일은 주의 일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자기 양이라고 생각하지말고 주님의 양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일이기에 소중합니다. 잘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 내가 하는 일은 주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게 아닙니다. 대중 교통 중에 하나가 택시입니다. 택시 중에는 개인택시가 있고 회사 택시가 있습니다.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개인택시는 운전하시는 분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됩니다. 회사 택시는 안 하면 안됩니다. 왜 그 날 입금을 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택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데 개인택시 같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사명입니다.

3) 기억할 것은 사명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때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사람은 일하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일이라도 어떤 자세로 일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기 싫은데 하라는 명령에 의하여 하는 이도 있습니다. 억압에 의하여 합니다. 이런 이들은 참으로 힘듭니다. 어떤 이는 의무적으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안할 수 없다. 그래야 내가 승진도 되고 내 가족이 살기에 좋을 거다 라고 하는 이들은 보람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부르심인 줄 알고 순종하는 자세를 갖는 이들입니다.

베드로는 그게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입니다. 사랑함으로 일할 때에는 힘든 일도 힘들지 않습니다.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는 부부의 도리를 말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 이것이 부부의 도리입니다. 사랑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순종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는 또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말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어느 부부가 대화하면서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성경적으로 말합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 그럽니다. 화가 난 아내가 남편들이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골 3:19) 그럽니다. 잘되는 대화입니까? 사랑하면 다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진정으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힘들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데 힘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왜 힘듭니까?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실패한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네가 실패하였더라도 기억할 것이 있다. 나를 사랑하는 건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실패하였어도 사랑합니다. 고백하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여라. 내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일해라” 그러십니다. 베드로가 실패하였으나 결코 손해가 된 건 아닙니다. 실패가운데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패는 은혜가 됩니다.(할렐루야)

실패하였을 때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숯불 위에 떡과 생선을 준비하신 주님은 그래서 베드로에게 먹을 것을 준비하여 먹게 하십니다.
왜 숯불입니까? 베드로가 부인할 때에 모닥불을 쬐고 있었기에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침입니다. 새 출발의 아침입니다. 새 출발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원위치 제자의 자리에 서라는 말입니다. 더 풍성하게 하십니다. 실패의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도 너를 사랑한다. 이제 새로운 자세로 내 양을 먹이라.” 새로운 사명을 받고 승리로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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