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 곁에 있으려면 / 히 3:7-19

  • 잡초 잡초
  • 522
  • 0

첨부 1




  하나님 곁에 있으려면
히 3:7-19

우리는 주변에서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하여 믿음의 길을 저버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그들을 나름대로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주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의 문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이유로든 낙오된 자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으며, 진정으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조그마한 시험이나 어려움이 올 때 헤쳐 나가지 못하고 쉽게 교회는 떠나버렸다는 것입니다. 만약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믿었다면 쉽게 믿음을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거기서 보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에 뿌려진 씨앗의 공통점은 열매를 즉 결실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교회로 초청을 받아 교회에 열심히 출석은 하였으나 낙심하여 믿음으로 복음의 진리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14절에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주님을 만난 후에는 결코 하나님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곁을 떠난 다는 것은 곧 사망을 의미합니다. 눅 15장에 탕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난 후 얼마 동안은 행복해 지는 것 같았으나 그 즐거움은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는 늘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그가 아버지를 떠날 때는 정말 행복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얼마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많은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즐거움과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곁을 떠난 다면 그것은 정말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들에게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한 까닭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셔서 인도해 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늘 시험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하셨는데, 그들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즉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끔 부모님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할 때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아빠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말아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말대로 부모님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아이들은 길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님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제 멋대로 가는 아이들을 부모님과 헤어짐의 아픔을 당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부모님의 곁에 있기 위해서는 늘 부모님의 말씀을 잘 준수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곁에서 행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곁에 있으려면 매일 피차 권면해야합니다. 권면의 주된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며, 또한 성도로 하여금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믿음을 잃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아며.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의 심령은 질그릇과 같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질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권면은 이런 질그릇과 같은 사람의 심령을 강하게 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매일 서로를 권면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잘못된 길로 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방관한다면 정말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 형제가 잘못되는 것을 보면 그가 정상적인 길을 갈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권면하기 위해서는 일단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모임에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자기 영혼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 있다면 빨리 정신을 차리고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다면 모든 것을 접어두고 예배나 모임에 참석해야 합니다. 모임이나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성도는 자신의 영혼을 결국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25절에서는 이렇게 권면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이 충만할 때 나타났던 현상 중에 하나가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환난 가운데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그 환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신앙인들을 로마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매일 그들은 지하 무덤에 모여서 서로를 권면하고 예배함을 통해 어려운 환난을 극복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면 이처럼 매일 서로를 권면하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 주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처음 믿을 때의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잃어가기가 쉽습니다. 이런 일들이 점점 심각해지면 신앙생활 자체가 일종의 습관처럼 아무런 의식 없이 반복될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습니다. 기도를 드려도 형식적으로 하고 맙니다. 예물을 드려도 돈만 드리는 것이지 진정한 예물을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태도를 일컬어 외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예배도 드리고 예물로 드리지만, 기도를 하지만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말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섬기는 법을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주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죽어있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원하십니다.
오래 동안 신앙 생활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믿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19: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유대인들은 복음에 있어서 먼저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복음에 먼저 된 자들이었으나 그것을 끝까지 확실하게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에서 제외된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님들은 처음 믿을 때의 감격과 은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자신을 살펴보아 처음 사랑을 신앙을 회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하나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신앙적인 삶의 위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성도, 서로를 권면하며 처음 사랑을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늘 하나님 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