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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이 오시면(5) - 롬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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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오시면(5)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 시작하는 말

우리들이 하는 말 중에 “사람이 살다보면 하루에도 열 두 번 더 천국과 지옥을 넘나든다”고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열 두 번 더 바뀐다는 것은 실존의 주소가 아니라 감정의 주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감정을 조정하는 것이 바로 주변의 말과 표정입니다. 평소 부담스러운 이웃이 웬 일인지 웃으며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 오면 순간 머리끝에서부터 강한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엔돌핀이 만들어지는 순간입니다. 곧 천국 같습니다. 그러나 늘 좋은 관계에 있던 사람을 만났는데 표정이 굳어져 있고 뭔지 모르지만 외면하는 느낌을 받으면 순간 멍치 끝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 이유를 알 때까지 지옥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는 날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목사는 어디에서 더 많이 살고있을 것 같습니까? 천국일 것 같습니까? 지옥일 것 같습니까? 저는 예배 후 여러분들을 배웅하는 시간에 그 두 곳을 수 백 번을 왔다 갔다 합니다. 표정이 밝게 인사해 주시는 분을 보면 천국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기에 지옥에도 자주 갑니다. ㅎㅎㅎ 여러분은 그 상대가 소수이지만 저는 대해야 할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그 대하는 사람이 한결같지 않기에 그 기폭이 상당합니다.

문제는 천국의 기분보다 지옥의 기분이 더 강하다는데 있습니다. 소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지옥의 느낌이 앞서 가졌던 그 천국의 기분을 깡그리 몰아내 버리고 우리들의 감정을 지배해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잔치 집의 주인의 기분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손님들이 많이 와서 기분 좋던 주인이 갑자기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며 당황하는데서 오는 추락되는 그 기분, 그 기분은 이제껏 좋았던 모든 기분을 다 쓸어가 버리는 강한 느낌을 줄 것입니다. 

2. 성령이 오시면 회복됩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집의 이야기에서처럼, 바로 그 때 예수님이 오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해주시듯,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들의 그런 감정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의와 평강과 희락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어떤 느낌을 받든지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근본적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십니다. 그래서 떨어진 포도주를 대신 채워 넣어주십니다.

첫째로 성령이 오시면 성도를 의롭다고 해주십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로 가장 많이 고민하고 힘들어합니다. 밝은 감정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책감입니다. 죄책감은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탄이 그것을 붙잡고 우리를 비난하며 괴롭힙니다. 

이런 만들어진 얘기가 있습니다 - 베드로가 한국인 한의사를 찾아왔습니다.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온 몸이 다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 한의사가 진맥을 하고서는 처방을 내려주었는데, 처방전에 보니 “하루에 한번씩 삼계탕을 일주일 동안 꼭 드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 뒤에 한의원을 찾아온 베드로는 매우 건강해 보였습니다. 베드로가 의원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인사를 받으며 의원이 하는 말이 “그랬을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배신한 후 새벽마다 들려오는 그 닭 울음소리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한 주간 그 닭들을 일곱 마리나 잡아 드셨으니 화병이 확 풀렸을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죄책감에서부터 해방케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둘째로 성령이 오시면 평강을 주십니다.

당시 헬라어에서 평강은 “에이레네”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전쟁이 없는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비록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를 사용했지만 그의 유대 전통의식에서 샬롬의 의미로 평강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샬롬은 전쟁같은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누리는 깊은 영적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 비난과 손가락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이런 찬양을 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사실 우리들은 찬송가 408장의 내용(2,3절)처럼 살고 있습니다.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맘이 조려서 못가네

이런 우리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이렇게(4절)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성령이 오시면 비록 창파에 배를 띄워도 은혜의 바다로 느끼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얻는 참된 평강입니다. 다윗 임금은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 5-11)

셋째로, 성령이 오시면 희락을 주십니다.

기쁨은 성령 임재의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기록에서부터 성령의 충만과 기쁨은 항상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행 13장에 바울과 바나바 선교단이 비시디아 안디옥 지역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핍박하며 그들을 성에서 내어쫓을 때에 성경은 기록하기를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 13:52)

고 했습니다.

기쁨은 행복의 적극적인 느낌입니다. 비신자들은 그런 기쁨을 쉽게 얻으려고 찾는 곳이 술집입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져 걱정 근심을 잊고 노래부르며 춤출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는 그런 기쁨을 주지만, 그로 인하여 남에게 주는 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술만 마시면 세상 호인이 되어서 술값을 자기가 다 계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은 호인이 되지만 식구들에게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술 마시는 대신 성령을 마시라고 권하였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령이 주는 기쁨은 이기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경우에만 적용되는 기쁨도 아닙니다.

지난 주일 재정부에서 제 이름으로 된 지정 기탁 헌금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제 사무실 책상 위에 두고 갔습니다. 순간 걱정이 앞섰습니다. 이것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정 기탁 헌금일 때는 보통 구제헌금이 대부분인데 . . . 내가 지금 구제 받을 사람도 아닌데  . . . 이게 도대체 무어지? 하고는 봉투를 열어보았습니다. 그것은 두 장의 시네마 엠 영화 관람권이었습니다. 엄청 황당했으면서도 혼자 억수로 웃었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3-4년 전에 영화관에 간 후 영화 관람권을 처음 손에 쥐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티켓 기간이 6월 말까지로 되어 있어서 한 주간 밖에 여유가 없었고 그것도 지금 하고 있는 영화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주신 분의 사랑을 버릴 수가 없어서 지난 목요일 아내와 같이 갔었습니다. 제목은 “첫사랑 사수대”(?)였습니다. 정해진 시간을 기다린 다고 앉아 있으니 찾아오는 관람객들이 모두 20대 초반의 연인들이었습니다.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나갈 수 도 없었습니다. 이것도 성도의 헌금이라고 생각하니 . . . 말입니다.

영화 내용은 매우 코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나이가 나이인지라 옆의 20대 연인들과는 달랐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관객이 박수까지 쳐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세대별로 다르고 경우에 따라 다르고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남녀노소가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은 성도들의 심령을 기쁘게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걱정들이 있어도 성령은 성도에게 용기를 주며 웃으며 나아가게 합니다. 단지 우리가 성령에 충만할 때 그렇습니다. 만일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면 우리는 다시 웃음과 기쁨을 잃게 될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도 지난 10여 년간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며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고 서로간에 격려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맺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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