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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을 얻었습니까? (마 19: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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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얻었습니까? (마태복음 19:16-22)

1. 영생에 대한 본능

일전에 경기도 연천 지방에서 대순진리회에서 갈라져 나온 대순진리성도회라고 하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생명수로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고 주장하면서 시신 4구를 수개월동안 보관해 오다가 경찰에 적발되면서 사회적인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주인 손 모씨를 우주 만물의 주인인 상제의 딸이라고 주장하고, 또 작년 10월에 상제께서 지하 10m 바위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수를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물은 신비한 물이요, 또한 불멸의 생명수라고 주장합니다. 이 생명수는 일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은지 백년이 지난 사람도 그 뼈에 바르면 부활하여서 살아나고 영생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조사해 보았더니, 그 물은 일반 지하수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물이었고, 교주 손 모씨는 생명수로 질병을 치료하고 시체를 부활시킨다고 생명수 치료를 하고 있었지만, 자신과 남편과 아이들은 아플 때마다 병원을 찾아가서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었졌습니다.
교주와 간부들이 구속되자, 신도들은 경찰서로 몰려가서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경찰이 망쳐놓았다고 항의까지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일들을 하고 있겠습니까? 영생에 대한 본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식물도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에는 어느 가정에 추도식이 있어서 가 보았더니, 난(欄)들이 많더라고요. 난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난을 따뜻한 방 안에서 겨울을 나게 하면 봄에 꽃이 잘 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겨울에 추운 곳에 두어야 봄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겨울을 지나면서 ‘내가 추워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식물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꽃을 피워서 후손을 통하여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산에 가면 소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좋은 땅에서 자라는 소나무에는 열매가 많이 맺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열악한 환경가운데 있는 소나무를 보면 훨씬 더 많은 솔방울이 맺히게 됩니다. 죽기 전에 씨를 더 많이 만들어서 생명을 오래 연장하기를 바라는 식물의 뜻이 그 가운데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좀 더 오래 살기를, 그리고 영생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래 살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씁니다. 생명공학을 발달시켜서 인간의 수명이 상당히 늘어나고 앞으로 더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캐기 위해서 사람들을 보내기도 했고, 또한 이슬을 받아먹으면서 오래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래 살기 위해서 왜 이렇게들 야단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영생하도록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오래 살기를 바라고, 또 영원히 살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청년이요, 관원이요, 부자인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우리들도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참된 행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사람은 마치 자동차에 엔진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등불에 기름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세상적인 권세, 세상적인 물질, 젊음이 아무리 있어도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육신적인 죽음이 인간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듯이 영생을 얻지 못하고 멸망에 빠지게 되면 영원한 축복을 송두리째 다 잃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생의 문제만 해결된다고 하면 세상적인 것이 좀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고, 또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얻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것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스런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에서라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향유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자 청년과 같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슬픈 기색을 하며 돌아가는 성도들 되지 않고,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는 지금 이 세상을 떠나도 하나님 나라 갈 수 있다. 지금부터 나는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하는 영생을 지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영생은 어떻게 얻습니까?

청년은 영생을 자기의 선한 행동을 가지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시의 랍비들은 영생을 얻으려고 하면 ‘끊임없이 기도해야 되고, 율법과 시편을 암송하고, 노인을 잘 공경하면 영생을 얻는다’ 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행을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고, 또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그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행위에 따라서 구원과 영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착하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남을 도와주며 살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구제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천국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인간의 어떤 선행도 어떤 행동도 구원받을만한 수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킬만한 선행을 인간으로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영생의 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바퀴벌레는 언제보아도 징그럽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깨끗한 바퀴벌레라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그것을 씹어서 먹을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 없어요. 우리가 볼 때는 바퀴벌레 그 자체가 아주 흉한 곤충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아무리 그게 깨끗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먹을 수가 없는 것처럼,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힘으로써는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영생의 길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알려고 하면 영생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의 준말입니다. 영생이란 말 그대로 해석하면 <시간적으로 영원토록 존속하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만 영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 믿는 불신자들도 영생합니다. 어디에서 영생합니까? 지옥에서 영생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우주개발계획국에 유명한 베르너 러폰 브라운 박사는 과학은 어느 것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법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연에는 소멸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변형만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가 종이를 불태웁니다. 그러면 그 수분과 재를 다 모으면 질량은 불변합니다. 그리고 그 원소도 불변합니다. 형체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근본원리를 우주의 가장 보잘 것 없는 미물에게도 적용하셨다고 하면 그 원리를 창조의 최고의 결정품인 인간 영혼에게도 적용시키지 않겠는가? 이 땅에 있는 모든 물질도 영원한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야 얼마나 더 영원하겠는가? 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먼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멸망받은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 예수님께서 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다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마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이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생명은 이미 영원한 생명되시는 주님께 접붙임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어졌습니다. 죽어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분들은 영생에 들어가 있습니다.


3. 영생은 영생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수준에서만 머물러 있을 때가 참 많아요. 한 단계 더 나가야 됩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영원히 존재한다는 그런 의미뿐만 아니라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줄여서 말하면 영생이란 뭔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 자신이 영생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영원부터 영원’까지라는 말이 통하지 않아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창세기 21장 3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영생의 본질이십니다. 다니엘서 4장 33절에 보면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나님 자체가 그 본질이 영생입니다. 영원하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영생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영생이신 하나님과 영생이신 예수님을 알아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노무현 대통령을 알듯이 그렇게 아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키가 얼마나 큰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누구의 남편인가, 자녀가 누구인가, 고향이 어디인가, 정치적인 경력이 어떤가 이런 것을 안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안다>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을 썼을 때는 <경험적으로 하나가 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이 이야기를 들었던 마리아가 깜짝 놀라서 대답합니다.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고 대답을 합니다. 사내를 알지 못하였는데, 내가 결혼하지 않았는데, 내가 성적(性的)인 관계를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느냐?  <그런 성적인 관계를 하지 않았다>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피상적으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결혼을 통하여서 한 몸이 되듯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을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성경에서는 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뭐냐? 영생은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예수님과 결혼하듯이 하나가 되어져서, 그렇게 신비로운 아는 것, 그래서 늘 체험적으로 사귀면서 교제해서 아는 것입니다. 남의 귀를 통해서 들어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찬양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을 통해서 알아가는 이것을 <영생 얻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정말 영생을 얻고 있습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영생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7장 3절에 있는 말씀은 <영생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영생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고 하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어야만 영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둥치로부터 영양이 올라옵니다. 수분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저절로 우리는 영생에 대한 그 축복과 열매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의술이 얼마나 발달되었습니까? 한 두어 달쯤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며 봉사하는 한 집사님의 아들이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 손가락 세 개가 절단되었습니다. 그 잘려나간 손가락을 주워서 초량에 있는 세광병원에서 봉합수술을 했습니다. 
가서 보니까 그 손가락이 아주 새파랗더라고요. 부모님이 이야기합니다. 이 손가락 두개는 괜찮은 것 같은데, 하나는 아주 위험하다고. 만약에 이게 잘 붙지 않으면 썩든지 하면 또 잘라버리고 또 재수술한다든지 해야 하는데 매우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요일날 기도회 때 이름을 불러가면서 아무개 손가락 좀 잘 붙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어서 그 손가락이 붙어서 잘 회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우리는 마치 잘려져 나간 손가락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두면 썩어버리고 없어질 것입니다. 이런 손가락같은 우리가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서 그리스도로부터 피를 공급받고 신경이 연결되어져서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바로 그 상태가 영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시간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생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늘 교제하며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바로 이것이 영생얻은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죽어서 천국에 가서 사는 것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영생의 삶이 출발되어지고, 오늘 우리는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영생 얻었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그것은 죽어봐야 알지, 어떻게 여기에서 영생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야기하기를, 이 땅에서 이미 우리는 영생을 얻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내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영생을 얻어서 영생을 누리고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능력을 공급받고, 축복을 공급받고 살아가는 바로 이것이 영생을 누리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4. 영생얻은 자의 삶

이번 천국문과 지옥의 불 드라마에 참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거제도에서 오신 한 부인이 암에 걸려서 부산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얼마 살지 못한다고 하는 진단을 받은 분입니다. 그 남편되시는 분이 아내에게 천국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주기 위하여서 휠체어에 태워서 제일 앞좌석에 앉아서 그 드라마를 관람을 했습니다.

제가 그 다음 다음날인가 그 분을 만났습니다. 교회 집사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래 다니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냥 교회다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예수님을 믿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졌습니다. 하늘나라를 사모합니다. 병원에 온 것은 내가 나아서 갈 것이라고 온 것이 아니고, 내 생명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 내 질병이 어느 정도인 것을 알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일 퇴원하게 될 것인데, 내가 내 고향에 가서 죽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죽음을 오히려 환영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 영생을 소유한 자의 삶이 저렇구나. 저렇게 담대하고 당당하구나’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았습니다. 영생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붙어있기 때문에 벌써 영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생을 소유한 자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그 축복을 이 땅에서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축복과 모든 삶의 문제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놀라운 사실들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바로 이것이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의 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영생을 얻었습니까? 그리고 이 영생을 지금도 누리고 있습니까? 주님과 더불어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마치 우리에게 손가락이 붙어있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피가 올라와서 통하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예수님에게 연결되어서 붙어있습니까? 이게 오늘 영생을 얻은 자의 삶인 것입니다. 이제 영생을 소유하셔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어서 구원만 받아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영생에 대한 삶을 누려서 정말 예수님의 생명 내 생명, 예수님의 능력 내 능력, 예수님의 축복 내 축복, 이 모든 하늘나라의 축복을 이 땅에서 누리고 살아가는 그 사람이 바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영생을 주기 위해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게 하기 위하여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어졌습니다. 믿어서 그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요한복음이 기록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요한 1서를 기록한 목적은 조금 다릅니다. 5장 13절에 가서 보면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영생이 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장 불행한 인간입니다. 지옥의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영생하신 그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여서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잘려진 손가락처럼 된 우리였지만 이제 예수님에게 붙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고 관계를 누려야만 영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데, 이 예배 속에 여러 순서들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할 때 단순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찬송할 때 그저 찬송을 불러버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지금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이 주님과 긴밀한 교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라도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몇 살까지 사셨는지, 이적을 몇 개 행했는지 그것을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설교를 통해서 배워서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아야 되는데, 얼마나 내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호세아는 말합니다. 6장 3절에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냥 와서 찬송부르고 가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야만 그것도 경험적으로 알아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영생을 얻은 사람 그리고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생을 얻엇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늘 경험하여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아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누릴 놀라운 축복을,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이 생명의 축복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이제 영생을 누리며 삽시다.

이 세상에는 영생과 관계된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본인도 영생얻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불신자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했는데, 자기는 영생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선행을 통해서 천국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또 세 번째 사람은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기는 믿어요. 그런데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위하여서 요한1서가 기록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네 번째 사람은 영생을 얻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능력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어야 됩니다. 그리고 나는 영생을 얻었다고 확신하면서 살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늘 예수님과 하나님을 앎으로 영생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져야합니다.

그런데 영생을 얻었는데 영생을 확신하고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과 영생을 얻었고 영생을 내가 얻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아십니까? 
예를 들어 말하면, 제 호주머니에 돈 10만원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점심때가 되어졌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그러면 있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내어서 점심을 사먹습니다. 그러면 점심때가 되어져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더 배고픈데 배고프지 않습니다.
친구를 만났습니다. 내게 돈 10만원이 있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 같이 밥 먹으면, 차 사먹으면 전혀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10만원이 내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10만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점심때가 되어지면 왠지 내가 배가 더 고파옵니다. 사람만나면 내가 밥 사줘야 되는데 생각하면 사람만나기 싫습니다. 사람을 외면하게 되어집니다.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돈 10만원이 있는 것은 같아요. 그러나 그것을 확신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차이가 나는 것처럼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는데 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영생 얻었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그 확신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영생주시기 위하여서 이 자리에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가슴 속에 영접하고 모셔서 다 영생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내게 영생이 있음을 확실히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지 말고, 장차 하늘나라에서 누릴 그 영광과 그 영원한 생명을 여기에서 누릴 수 있도록 예수님과 늘 교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늘 관계를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체험을 통해서 늘 알게 될 때에 그 사람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에서 누릴 그 축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이 맛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영생얻은 것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만나서 아세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경험적으로 만나서 체험하세요. 그렇게 하게 될 때에 내 생명이 영원한 생명임을 알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내가 어떤 환경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부요를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당당하고, 얼마나 능력있고, 얼마나 활기차고, 얼마나 늠름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 죽지를 늘어뜨리고 궁상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영생을 누리며 살아서 오늘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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