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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과 믿음의 삶 (사 7:9, 롬 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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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믿음의 삶 (이사야7:9, 로마서10:9~10)
                             
현대를 사는 오늘의 현실의 특징을 사람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한다. 이 시대의 특성은 우리가 지금까지 삶의 절대적 가치로 삼았던 것들이 모두 분해되어 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신뢰하고 믿어오던 것들이 모두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가는 현실에서 과연 "무엇을 믿어야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라는 문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무거운 생의 짐이 아닐 수 없다. 요즘처럼 산다는 것에 대해 어렵게 느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의식주의 문제가 아닌 영적 문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오늘 우리 시대에서 매우 절실한 생의 문제라 생각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그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자는 사회학적인 입장에서, 정치인은 정치적인 입장에서, 경제인은 경제적인 입장에서, 종교인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각기 자기의 주장을 말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입장을 생각해 본다.

여기에서 우리 기독교는 교회가 물려받은 영적 유산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십계명"과 "사도신경"은 매우 값진 유산이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받은 것이며, 사도신경은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값진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 것도 받지 않은 것처럼 결핍된 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꽃에 비유하면 믿는다는 것은 숨겨진 뿌리와 같은 부분이며, 살아가는 문제는 외부로 나타나 있는 꽃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보이지 않은 부분에 건실한 뿌리가 있다. 우리가 아무리 현실에서 충실하게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해도 현실에 나타나지 않은 이면적인 삶이 없을 때는 늘 고갈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사도 신경에 그리고 삶의 방향을 십계명에 두었다. 현실이라는 이 어두움의 상황에서 우리의 생이 좌초되어 파멸하지 않으면서 바르게 온전한 방향으로나 가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삶의 방향 지표가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성령의 실재와 그의 하시는 일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신구약성서에 성령과 관련된 호칭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그것은 성령이 그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로 가장 중요한 일은 신뢰를 깨닫게 하고 믿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과 연합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주후 381년 콘스탄틴노플 회의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성령을 생명의 수호자 또는 생명의 근원자로 묘사했다. 구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은 영도 초자연적인 지식의 원천보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자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영의 특성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기 개방성, 자기 초월성, 관계성으로 나타나고 특히 음악가, 조각가, 시인, 예언자, 영웅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창조적 영감과 지혜의 빛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생물학에서 생명의 현상을 살아 있는 세포 기능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구약의 히브리 민족은 초월해 가는 힘으로 생명의 존재를 이해함에 주의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살아 있는 한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육체를 지닌 피조물로서 에덴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몸담고 살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인간은 생각하고 느끼며 선택하는 존재로서 자기의 개방 자기 초월이라는 삶의 특성을 나타나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이 결국에는 생명의 근원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완전 이탈이란 비극을 자아내게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을 가져오게 한 주요 원인은 죄였다.

그 결과로 인간에게는 육체의 죽음이 오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인간의 영적 죽음뿐만 아니라 육체적 죽음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은 마지막 때에 인간에게 부어지게 되고 인간의 삶의 상황에서 강렬한 생명력이 있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다. 특히 요엘과 에스겔에 의해 예언된 내용에는 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요엘 2:28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의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

에스겔 37;5에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예언자 요엘의 성취로 해석하였다. 생명의 힘으로 하나님의 영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 그리고 그 영이 역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가운데 거하시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라(롬8;11)".

영원한 부활의 삶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이 있는 곳에는 성령이 거기 함께 계신다.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이 가능한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입으로 그를 주로 시인하면 그 사람은 이미 부활의 영이신 그의 안에 있게 된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말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으신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부활의 영이 있는 자는 이미 새로운 부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부활의 삶은 아니다. 부활의 궁극적 실체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전히 드러나게 될 때 우리의 부활의 실체도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혼불멸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흔히 믿는 자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영혼이 불멸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곧 하나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새 생명의 삶을 방해하는 죄를 깨달아야 한다. 죄는 생명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침식시킨다. 그러나 정직한 고백은 생명을 중단시킨 원인을 제거하고 생명을 다시 흐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경계함과 함께 회개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

부활의 주님을 나의 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게 하는 이가 성령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진리는 이성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받아 들여 진다. 그리고 성령의 실재하는 곳은 믿는 자들 가운데 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믿음을 가능케 하는 길을 열어 보인다. 첫째, "믿음 (Belief)은 실험과 논증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과학도가 실험실에서 실험을 거쳐 분명한 논리로 그 사실을 입증할 때 누구나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다는데 인식을 둔다. 둘째, "믿음은 논증의 과정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어떤 모호한 사실을 합리적인 논증으로 계속 입증해 갈 때 그 모호성이 점점 없어지면서 그 사실을 있게 되는 것처럼 안다고 말한다. 셋째, "믿음은 권위의 인정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믿음과 권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무리 합리적이며 논리에 맞는 학설이나 이론이라 할지라도 누가 그것을 말했느냐에 따라 신뢰도가 다르다. 우리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기관이나 사람으로부터 풍기는 그의 인격일수록 그것을 쉽게 받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믿음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증언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에서 많은 소식들을 들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떠한 신비스러운 사건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전해주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 진 것을 알게 된다. 다섯째 "믿음은 어떤 것의 결과를 봄으로써 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계획한 일에 대해 아무리 설득력이 있게 논리를 전개하더라도 실제로 그가 그 일을 시작해서 행한 결과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다른 사람을 믿게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좋은 점을 열심히 전해도 실제로 전하는 사람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믿게 할 수 없음을 알게 한다. 여섯째, "믿음은 경험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어떤 사실에 대한 경험은 마지막 말이다. 즉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이 백 번 말로 듣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듣는 것보다 직접 체험할 때 진리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서 신앙의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신앙을 확고하게 세워 주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 없이 사도신경을 고백해서는 아니 된다. 사도 신경은 믿음을 기준점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는 지시표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믿음의 기준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기준점을 찾아내지 못했을 때 우리는 방황하게 된다. 삶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고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 문제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먹고 입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다. 사람은 먹는 것으로만 살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디에다 삶의 기준점을 두고 삶을 시작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이 믿음의 기준점은 생활에 나타난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준다. 뿌리가 병든 꽃나무는 그 꽃도 병들 듯이 믿음의 기준점이 건실하지 못한 삶은 건강한 삶을 살수가 없다. 꽃나무에 있어서 그 뿌리는 꽃나무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근간이 되는 것과 같이 믿음의 기준점은 우리의 생활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뿌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의 기준점을 어디에다 두고 삶을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삶의 기준점이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재물, 어떤 사람은 명예, 권력에다 두는 사람, 어떤 종교인들은 성황당의 돌무덤이나 고목 나무, 사람이 만든 신비스러운 조각에 두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다 유한한 것으로 생명력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고백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정녕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으려면 몇 가지 전제가 따른다. 1. 우리의 삶을 지속적으로 지탱해 줄 수 있는 유한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한적인 존재이어야 한다. 2. 우리의 존재의 결핍을 채워 줄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3.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쳐 희망을 걸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4. 계속해서 탐구해도 다함이 없으며 그러면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존재이어야 한다. 5. 우리와 대화할 수 있고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이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의 대상을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인이 믿고 고백하는 삼위일체 우리의 하나님은 완전한 믿음의 대상임을 다시 한번 확신케 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리시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예수님은 구체적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부터 예수님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하셨다"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우리 가운데 계심)하심을 믿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자신의 삶을 현재의 사건으로 나타나고 계심을 믿음으로 생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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